2017년 12월 통권 제1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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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밑줄 긋는 시간]
포기하는 법이 없는 폴레케

백승남 | 2017년 12월

열한 살 소녀 폴레케한테는 사는 일이 참 복잡하다. 주변에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엄마는 폴레케의 담임과 사랑에 빠지고, 아빠는 마약 거래로 경찰서에 잡혀가고, 남자 친구의 엄마는 폴레케가 이슬람교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아들과 헤어질 것을 강요한다. 『엄청나게 시끄러운 폴레케 이야기』로 되어 있지만, ‘엄청나게’와 ‘시끄러운’ 사이에 ‘주변이’가 들어가야 할 거 같은 제목의 이 동화는 네덜란드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네덜란드 하면 튤립과 풍차, 국토의 많은 부분이 해수면보다 낮다는 정도가 떠오를 뿐 한 번도 가 보지는 못했다. 네덜란드를 배경으로 한 작품도 내게는 아직 낯설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누구보다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이며 외국인과 외국 문화에 매우 관대하다고 한다. 유럽 여러 나라 중 외국인 노동자들과의 갈등도 가장 적고 이주민을 자국 사회에 가장 잘 통합시킨 나라라고도 한다. 『엄청나게 시끄러운 폴레케 이야기』에는 그러한 사회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다.

학교에서 폴레케네 반에만 해도 진짜 네덜란드인은 폴레케와 카로 둘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외국인이다, 폴레케는 모로코 이민자의 아들인 미문과 사귀는 사이다. 폴레케의 아빠는 마약 중독인데, 네덜란드에서는 마약 복용이 합법이라 커피숍에서도 살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도 거의 없는 모양이다. 가령 폴레케의 가장 친한 친구 카로의 친아빠는 동성애자다. 카로 엄마의 애인인 애버트 아저씨가 아이를 원하지 않아, 엄마는 게이인 한스의 정자를 받아 임신을 해 카로를 낳았다. 그런 게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듯 폴레케와 카로는 게이니 레즈비언이니, 혹은 레즈비언이나 되어 버릴까? 하는 말들을 스스럼없이 나눈다.

우리 사회와 심한 문화 차이가 느껴지면서 그 다양성에 대한 포용에 먼저 눈길이 갔다.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팻말을 들고 외쳐대는, 대통령 후보들의 토론에서조차 동성애자를 지지하냐 아니냐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소수자에 대한 판결에 소수 의견을 냈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을 국회가 부결시키는 나라에 사는 독자로서 부럽기도 했다. 개인의 자유와 각자의 욕망을 우선 중시하는 듯한 사회 분위기도 그랬다.

엄마는 폴레케의 담임과 사귀면서도 이웃에서 뭐라든 상관없다며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아빠는 엄마와 만나기 전에 살던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데리고, 지금은 다른 여자와 사는데 그 사이에도 딸이 하나 있다. 그래도 변함없이 폴레케를 사랑하고, 폴레케도 엄마와 아빠를 무척이나 사랑한다. 폴레케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베푸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있다. 경찰서에 잡혀간 아들을 면회하지 않는 걸 궁금해 하는 폴레케에게 할아버지는 말해 준다. 그 애는 그 애 인생을 사는 거고 우린 우리 인생을 사는 거라고.

물론 이제 열한 살인 폴레케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들이 힘겨울 때도 많다. 엄마도 좋은 사람이고 담임도 착한 사람이지만 둘이 사랑하게 된 것은 폴레케한테 힘든 일이다. 하지만 폴레케는 주눅 들거나 움츠러들지 않는다. 쏟아지는 아이들의 시선에도 꿋꿋하다. 한밤중에 집안에서 잠옷 입은 담임과 마주쳤을 때는 ‘도대체 어른들은 왜 늘 이 모양이지? 뭐는 해도 되고, 뭐는 하면 안 되는지 구분도 못하나? 예의범절도 없어?’ 하고 속으로 외치고, 담임이 벌써 아빠라도 된 듯 잔소리할 때는 조용히 맞받아친다. “여기서는 선생님이 아니잖아요. 학교에서는 선생님일지 몰라도 여기서는 아니에요. 그렇다고 선생님이 우리 아빠도 아니고요. 여기서는 그냥 발터 아저씨일 뿐이에요. 그리고 이 집에 사는 사람은 저예요. 이 집에서 저는 소리 질러도 되지만, 선생님은 아니라고요!”

폴레케를 더욱 곤란하게 하는 사람은 아빠다. 마약 중독에 사회부적응자인 아빠는 세 번째 부인한테서도 쫓겨나 노숙자가 되고, 폴레케한테까지 손을 벌린다. 엄마의 저금통까지 손댄 아빠를 감싸려고 폴레케는 거짓말까지 하게 되지만, 그래도 아빠를 포기하지 않는다. 몽상가인 아빠에게 시를 쓰는 재능이 있다고 믿으며 시를 쓰게 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번번이 실패하지만. 나중에 이제 시를 쓸 수 있을 거 같다는 아빠의 말을 믿지 않게 되었을 때도, 아빠가 슬퍼할까 봐 믿는 척해 주는 폴레케. 어쩌면 이렇게 사랑스러운 애어른이 있을까 싶다. 아빠가 케이크를 사 주겠다 해 놓고는 돈이 모자라자 곤란을 겪을까 봐 바람처럼 달려가 담임한테 돈을 빌려오기도 한다.

폴레케는 아빠를 사랑하는 만큼 아빠를 응원하고, 아빠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다. 하지만 한동안 사라졌다 오랜만에 나타난 아빠가 이복 언니 오빠와 여동생을 봐달라고 하는 부탁만은 들어줄 수 없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송아지 폴레케를 보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빠를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그래도 내일은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갈 거라며 거절한다. 아빠도 중요하지만 폴레케 자신의 삶도 중요하니까.

이렇듯 이 동화에서는 어른과 아이의 관계가 부모 자식 사이라 해도 일방적이지 않다. 어른이든 아이든 각자 독립된 개인으로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의 마음을 존중한다. 그 바탕에는 사랑이 있다. 북유럽 국가들이 행복한 개인을 키우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에서 ‘진정한 사랑과 우정, 가족 관계는 독립적이고 동등한 개인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던 말을 떠오르게 한다.

하여간 폴레케한테는 엄마 아빠 문제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사랑마저도 순탄치가 않다. 오죽하면 “사는 게 조금만 덜 복잡하게 해 주세요. 사랑도 마찬가지고요.”라고 기도까지 했을까. 이슬람교도인 미문의 부모는 둘의 사랑을 반대하고, 이다음에 미문은 부모가 시키는 대로 모로코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 그뿐인가. 가장 친한 친구인 카로까지 미문 앞에 얼쩡거려 신경 쓰인다. 마침내 미문은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폴레케가 자신의 송아지를 보러 가는 기차에 같이 올라타 이렇게 말한다. “너랑 사귀지 않으려고 했어. 정말 노력했다고.” 사랑에도 적극적인 폴레케는 입맞춤하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자 미문을 끌어당겨 먼저 입맞춤을 해 버린다. 길거리 축제 때는 춤을 청한 카로를 따라 나서려는 미문을 단호하게 막으며 경고하기도 한다. “앉아 있어.”라고.

결혼은 안 하겠지만 지금은 사귀겠다는 폴레케와 미문의 예쁜 사랑에 웃음도 나고 응원도 해 주고 싶었다. 폴레케의 아빠가 중독 치료를 해야 한다는 말을 폴레케 말고는 해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폴레케가 아빠한테 말할 수 있게 용기를 북돋워 주는 아이도 미문이다. 그 또한 사랑의 힘이다. 그래서 폴레케는 마침내 아빠한테 말한다. 더 이상 못 참겠다고. 열다섯이나 열여섯 살쯤 되면 다시 참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안 되겠다고.

열한 살은 괴로운 나이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단 한 가지도 없다면서도, 폴레케는 자신에게 닥친 문제들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한긍정의 힘으로 하나하나 풀어나간다. 변함없이 아빠를 사랑하지만 엄마와 선생님의 사랑도 인정해 주고, 방학을 맞아 모로코에 가서 부모가 강요하는 결혼 상대자를 만나고 올 미문에게는 이렇게 당부한다. “그 애한테 넌 폴레케랑 사귄다고 말해 봐. 그 애가 폴레케가 누구냐고 묻거든, 폴레케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애야 하고 말해.”

그뿐인가. 자꾸만 포기하고 돌아서고 싶어 하는 아빠를 격려하며, 마약 중독자들의 치료를 위한 집으로 앞장서 들어간다. 아이의 부모에 대한 의존은커녕 관계의 역전이다. 하지만 그 또한 일방적이라기보다 동등한 개인으로서, 아이와 아빠의 즐거운 소통의 감정이 둘의 대화에서부터 묻어난다.

폴레케는 ‘그래도 인생은 즐겁다’고 한다. 자신을 곤란하게 하는 엄마나 아빠, 어른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사건 사고의 연속으로 애어른이 되어 버린 폴레케를 그리는 작가의 시선에도 동정이나 연민이 없다. 벌써 18년 전인 1999년에 발표된 책이라는 게 놀랍기도 했다. 인종 차별, 종교 갈등, 마약, 성문화, 붕괴된 가족 등 우리 동화에서는 만나기 쉽지 않은 무거운 주제들이 담겼는데도 심각하지 않고 오히려 밝고 유쾌하게 읽혔다. 문화 차이는 별개로 치더라도 경쾌한 문체, 현실과 인물을 보는 작가의 건강한 관점과 유머러스한 시선 덕분일 것이다. 마침내 치료의 집에 도착한 아빠가 마중 나온 젊은 간호사를 보고 표정이 환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까지 독자를 웃게 하니까.
백승남 | 월간 「어린이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며 동화 쓰기를 시작해 그동안 『부처를 만난 고구려왕자』 『떠버리 무당이와 수상한 술술씨』 『늑대 왕 핫산』 『반지엄마』 『춤은 몸으로 추는 게 아니랑께』 『루케미아, 루미』 『어느 날 신이 내게 왔다』 등의 동화와 청소년소설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