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통권 제1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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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그림책 만나며]
네 이름은 뭐니?

김봄희 | 2017년 11월

요즘 나를 소개해야 할 시간이 자주 찾아온다. 크고 작은 모임에 나가고 강의를 듣는 시간이 많아진 까닭이다. 하지만 아직도 나를 소개하는 건 어색하기만 하다. 내 차례가 돌아오면 긴장하고 쭈뼛거리기 일쑤다. 짧은 시간에 나를, 내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고 싶은 욕심 때문이리라.

평범한 이름을 한 번 들어서 기억하기란 쉽지 않은 일. 그래서 자기만의 독특한 별명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아는 한 분은 별명이 독특하다. “내 별명은 감자입니다.” 하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고개를 들어 얼굴을 쳐다본단다. 그리고는 배를 잡고 한바탕 크게 웃은 다음 덧붙이는 말. “닮았다 진짜 닮았어. 어쩜 이렇게 딱 어울릴까?” 감자처럼 동글동글 생긴 얼굴과 별명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오랫동안 기억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개성을 살린 별명을 쓰다 보니 해프닝도 있었다는데. 본명은 모르고 별명으로 통하는 모임의 상가 부조 봉투가 볼 만했다고. 감자, 보리, 도토리, 밤토리.

언제부턴가 내 이름은 봄희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은미라는 흔한 내 이름이 썩 맘에 들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우리 반에 이름이 같은 아이가 있었다. 고심하던 담임 선생님은 큰 은미, 작은 은미로 불렀다. 그게 싫었다. 특징이 있는 이름을 갖고 싶었던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이름을 바꿔서 소개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름이 봄희였다. 봄을 좋아해서 지은 이름이었는데, 이름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나. 하지만 은행에 갈 때, 공공기관에 들어가 일을 처리할 때, 해외로 나갈 때, 다시 ‘내 이름’ 김은미로 돌아가야 했다. 그게 반갑지만은 않았다.

한번은 SNS를 하다가 딸에게 본명 대신 필명으로 바꿔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딸이 그러는 거다. “엄마 원래 이름은 김은미잖아. 그런데 왜 자꾸 이름을 바꾸려고 해?” 그 질문을 받고 보니 뭐라 할 말이 없다. 글쎄, 나는 왜 자꾸 김은미로부터 달아나려 하는 것일까? 그 시절 너무 흔한 이름이어서?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가만히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어쩌면 코보, 말라깽이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 아닐까.

그림책 『내 이름』은 말한다. 이름에도 다양한 표정과 성격이 있다고. 두근두근 설레는 이름, 으쓱으쓱 하늘을 나는 이름, 화가 나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이름, 꽁꽁 숨고 싶어지는 이름, 그러다가도 열심히 닦으면 빛이 나는 이름이 있다고.

먼 훗날/ 내 이름도/ 저 별들처럼 반짝일까?
다시 써 볼래./ 내 이름!

나는 얼른 내가 좋아하는 이름을 써 본다. 김봄희라고. 내가 좋아하고 열심히 닦고 싶은 이름으로 말이다.

『아주 특별한 내 이름』에 나오는 아이도 이름에 불만이 많다. 아이 이름은 천둥이다. ‘천둥이 스미스’는 독특해서 어디에 내놔도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이름이겠구나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천둥이는 아빠와 이름이 같다.

사람들은 아빠를 이렇게 불러.
힘세고 큰 아빠 천둥이.
하늘을 뒤흔드는 우렁찬 천둥소리가 생각나는 별명이지.
사람들은 나를 이렇게 불러.
꼬마 천둥이.
꺼억 트림 소리나
뿡뿡 방귀 소리가
생각나는 별명이지.

그래서 아이는 자기만의 특별한 이름을 갖고 싶다고 말한다. 한 번 들으면 바로 내가 떠오르는 그런 이름, 내가 해낸 멋진 일들을 나타내는 그런 이름을 말이다. 아이는 그런 이름을 척척 만들어 낸다. 무시무시한 범고래 콧잔등을 만져 봤으니 ‘천 개의 이빨도 무섭지 않은 자’,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본 적도 있으니 ‘걸어서 구름까지’, 흙장난을 좋아하니 ‘귓속까지 흙투성이’, 세 살 때부터 자전거를 탔으니, 장난감을 좋아하니, 강아지를 좋아하니, 인디언 전통 춤을 좋아하니…. 이런 식으로 독특한 자기만의 이름을 지어 나가는 것이다. 천둥이 스미스는 말한다.

나는 우리 아빠를 사랑해./ 그래도 난 나만의 이름을 갖고 싶어./

내 행동과 내 생각을 나타낼 수 있는 이름.

천둥이 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빠는 천둥이에게 새로운 이름을 선물한다. 우르릉 쾅쾅 번쩍번쩍할 이름으로 말이다. 문득 「늑대와 춤을」이란 영화에 등장하는 독특한 인디언식 이름이 떠올랐다. ‘주먹 쥐고 일어서’, ‘발로 차는 새’, ‘웃음이 예쁘다’ 등. 물론 ‘늑대와 춤을’도 주인공 이름이다. 오래 전에 본 영화인데 지금까지도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건 아주 독특한 이름의 여운 때문이다. 특히 ‘주먹 쥐고 일어서’가 주먹을 꽉 쥐고 벌떡 일어서는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림책을 함께 읽던 엄마들과 인디언식 이름 짓기 놀이를 한번 해 보자고 했다. 스스로 자기 이름을 지어 보자 했더니 쉽게 나오지 않는다. “저는 ○○ 엄마로 살고 있고, 내가 좋아하는 게 뭐였더라….” 하고 머뭇거렸다. 그래서 상대방의 이름을 지어 주는 걸로 놀이 방법을 바꿨다. 그때부터 차츰 서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살도 살림도 욕심도 조금씩 덜어 내고 싶대서 ‘한 개만 빼자’ 웃음소리가 독특하고 힘차서 ‘호탕한 웃음소리’ 목소리가 예뻐서 ‘행복한 목소리’ 모임에 안 나와서 만장일치로 통과한 이름 ‘아무거나 잘 먹어’ 이름을 지으며 서로를 보았다. 평소에 잘 보지 못했던 서로의 좋은 점, 성격, 특징을 생각해 보고 어울리는 이름을 찾으며 한참동안 즐거웠다. 누구누구 엄마, 누구누구 아내로 불리며 살다가 나만의 닉네임을 가져 보는 특별한 경험. 그건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출발점이 되기에 충분했다. 서로를 잘 알지 못한 채 책만 읽고 헤어졌던 우리에게 교집합이 생기는 지점이기도 했다.

이름 짓기 놀이에 꽂힌 우리는 내친김에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도 함께 읽어 보았다. 이름 짓기를 좋아하는 할머니는 낡은 자가용에게, 헌 의자에게, 누워 자는 침대에게, 오래오래 살아온 집에게 이름을 지어 준다. 왜 할머니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닌 생명이 없는 사물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일까. 할머니는 친구가 없어 외로웠고, 다정하게 이름 부를 친구가 없다는 것이 싫었다. 차, 의자, 침대, 집보다 더 오래 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을 지어 준 것이다.

어느 날, 갈색 강아지 한 마리가 할머니 집 문으로 다가왔다. 할머니는 강아지에게 먹이를 주면서도 강아지를 머물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강아지를 머물게 하려면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하니까. 강아지가 자신보다 오래 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던 할머니는 이름을 지어 주지 않고 강아지를 돌려보내곤 했다. 강아지가 무럭무럭 자라 개가 될 때까지. 그러던 어느 날, 갈색 개는 더 이상 할머니 집에 찾아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문득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해졌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갈색 개를 찾아다녔다. 떠돌이 개들을 보호하는 사육장으로 달려가 “우리 개를 찾으러 왔어요.” 하고 말한다. 사육사가 털 색깔을 물으니 갈색이라고, 그 개가 몇 살이냐고 물으니 “한 살쯤 됐어요.”라고. 이름까지 물으니 할머니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한다. “우리 개 이름은 ‘러키’랍니다! ‘행운’이라는 뜻이 담긴 이름이죠.”라고. 이름과 존재의 관계 맺기!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생긴다는 건 그것과 관계 맺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름을 새로 받은 러키와 할머니처럼.

문득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을 하나하나 넘겨본다. 별명도 있고 본명도 있고 누구누구 엄마도 있고. 각양각색의 이름들이 자기를 알아봐 달라고 아우성이다. 각기 다른 표정을 하고서. 반갑게 눈인사를 나누는데, 맨 위 말라깽이 이름 하나 쭈뼛댄다. 자기도 사랑받는 이름이고 싶단다. 그 이름과 눈을 맞추며 토닥여 줬다. 걱정 마. 외롭지 않게 잘할게.
김봄희 | 고양시 책놀이터 작은도서관에서 아이들과 책으로 소통하며 지냅니다. 가끔씩 공기놀이나 딱지치기, 산가지 놀이도 하며 아이들의 숨통이 되고자 합니다. 아이들 웃음소리로 넘쳐나는 도서관 만들기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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