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02월 통권 제1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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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그림책 만나며]
아슬아슬, 친구에게 그리고…

이숙현 | 2017년 02월

지난 연말, 우리 가족은 『변신! 아슬아슬 가면!』의 주인공 고타가 되었다. 모처럼의 여행길에 비행기 타는 곳을 잘못 알고 엉뚱한 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찌감치 공항에 도착해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던 우리는 순식간에 ‘아슬아슬 가면’을 쓰고 ‘아슬아슬맨’으로 변신,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에스컬레이터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가 저 멀리, 점점 작아지는 키 큰 남자와 “아빠, 아빠!” 소리치며 울먹울먹 뒤쫓는 아이 둘의 모습은 구름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던 고타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 뒤를 달리다 걷다 숨을 헐떡이며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던 나는 고타의 말을 떠올렸다.

“으아아아아!”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라.

이게 바로 아슬아슬 가면의 힘이야!

아슬아슬 여행의 아슬아슬한 시작이었다. 이후로도 몇 번이나 아슬아슬 가면을 찾게 될 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에어 인디아 비행기 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으며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실실거렸다. 바퀴 달린 큰 가방 안에 정신없이 흔들리며 비행기에 실렸을 그림책 『친구에게』 두 권도 모처럼 한숨 돌렸을 터였다. 비행기가 날아오르자 친구에게 가는 길이 실감났다. 내가 진짜 인도 델리를 거쳐 무스카트로 가는구나, 싶었다.

친구가 아니었다면 떠나지 못했을 여행이었다. 친구가 아니었다면 『선생님도 한번 봐 봐요』에 나오는 연심희 선생님처럼 오만의 수도가 무스카트라는 사실도 몰랐을 테고, 아빠가 오만에 있어 오만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는 성준이도 만나지 못했을 거다. 친구는 큰아이 이름(성준)이 나온 책을 무척 신기해 했다. 나야말로 오래전, 갑작스런 부탁에도 기꺼이 마음을 내 준 친구가 신기하다. 뒤늦게 유아 교육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친구는 거문고 전공 얘기를 듣자마자 얼마 남지 않은 결혼식 날짜를 들이대며 거문고 연주를 부탁한 내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회관에서 주례 없이 여러 친구들의 재능 기부로 진행됐던 결혼식은 친구의 거문고 연주로 뜻깊게 마무리 되었다. 소중한 날, 함께해 준 친구의 고운 자태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어려운 일로 혼자서 고민하지 마. 네 이야기를 들어 줄게.” 『친구에게』 그림책 속 여자아이처럼 그때 그 시절, 내 이야기를 들어준 친구가 새삼 고맙고 고마웠다. 오만에서 나를 불러 준 것도…. 나는 마음 건넬 선물로 『친구에게』 그림책을 정성껏 챙겨 넣었다. 작년 여름, 친구는 두 아이와 함께 멀리 구미까지 나를 만나러 왔다. 반갑고 기쁜 마음 나누며 지낸 것도 잠시, 금세 헤어지는 날이 되어 아쉬운 작별을 했는데 마지막에 주고받은 말이, “오만에서 다시 만나요!”였다. 그리고 친구는 오만으로 돌아가서도 잊지 않고 마음을 보내 주었다. “기다리고 있어요… 꼭 오세요!” 친구 덕분에 없던 마음이 생겨나고 아득하게만 여겨졌던 여행길이 열렸다. 멀리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여정은 또 다른 친구를 만나는 길도 터주었다. 무스카트까지 오가는 길에 인도에 들르기로 한 것이다. 푸네(Pune)와 판츠가니(Panchgani)에 곁지기의 오랜 인연이 있다고 했다.

친구에게 가는 길이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델리 공항에서는 지하철역으로 가는 쉽고 빠른 지름길을 코앞에 두고 뱅뱅 돌고 돌아 결국 마지막 지하철을 놓쳐 버린 한밤중도 있었고, 무비자 실랑이로 한참 기다리는 바람에, 또 줄을 잘못 선 바람에 비행기를 놓칠까 마음 졸인 한낮도 있었다. 푸네에서는 달리던 택시가 갑자기 시동이 꺼지면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바람에, 그럼에도 기사님이 “노 프라블럼(No problem)!”이라고 외치며 도로 한가운데서 자동차 엔진 덮개를 여는 바람에 심장이 쪼그라들 만큼 아슬아슬하기도 했다.

아슬아슬 가면은 아슬아슬할 때만 쓸 수 있어.

아슬아슬맨으로 변신하면

엄청난 힘이 솟아나지.


가장 아슬아슬했던 때는 뉴델리 기차역에서의 꼭두새벽이었다. 무스카트에서 밤 비행기를 타고 델리에 내린 우리는 이어서 새벽 기차를 타야 했다. 잠이 덜 깬 아이 둘을 어르고 달래 지하철을 타고 뉴델리에 내려 기차역까지 걸어갔다. 출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터라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전광판에 우리 기차 번호가 보이지 않았다. 기차를 어디서 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었고,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한없이 낯선 기차역이 몹시 추웠다. “1번이래. 빨리 가자.” 날아다니다시피 여기저기 상황을 살피고 온 곁지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리는 기차역 계단을 뛰어올랐다. 손에 든 큰 가방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무수한 사람들 사이로 요리조리 파고들어 뛰고 달렸다. 저기 저 끝에 있는 1번 플랫폼으로 어서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예약한 기차는 취소가 안 된다고 했다. 놓치면 끝이라는 생각에 숨이 턱에 닿았다. 1번 플랫폼에 발을 디딘 시각이 열차 출발 5분 전! ‘아슬아슬 파워’가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기차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알아보니, 짙은 안개로 기차 출발 시간이 4시간이나 늦춰졌다고 했다. 아이 둘이 울음을 터뜨렸다. 집에 가고 싶다며 비죽비죽 울었다. 그제야 바닥 여기저기 다닥다닥 붙어 누워 자고 있는 수많은 인도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 둘을 끌어안았다. 괜찮다고, 애써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마음이 휘청거렸다. 온갖 조바심과 두려움이 서늘하게 몸속을 파고들었다. 여름옷을 두세 개 껴입고 겉옷까지 덧입었지만 안개 낀 새벽 찬 공기를 막아 내기엔 옷이 너무 얇았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따듯한 방에 눕히고 싶었다.

네가 두려워 머뭇거린다면

내가 그 길에 함께할게.


혼자였다면 두려움에 주춤, 머뭇거리다 돌아왔을지도 모르겠다. 혼자가 아니어서, 함께라서, 흔들리는 마음 붙잡을 수 있었다. 추위를 견디고, 두려운 마음 넘어설 수 있었다. 우리를 기다릴 친구들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다행히, 기차는 뒤늦게나마 우리 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기차에 올라 다시 길을 나섰다. 안개가 걷히지 않아 이틀 뒤 기차는 취소해야 했지만 다른 방법으로 아슬아슬, 친구들이 있는 판츠가니 ‘변화의 첫걸음(IofC) 센터’에 닿을 수 있었다. 십여 년 전 유치원을 다녀간 수레쉬와 레나 부부를 비롯해 오랜 인연들과 기쁘게 만날 수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십여 년 전으로, 또 곁지기가 인도를 다녀간 이십여 년 전으로 뿅! 순간 이동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더 놀라운 순간 이동은 푸네의 한 아파트, 작은 거실에서 이뤄졌다. 우리가 그곳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로 마음 써 준 키란 간디가 아내 네루를 불렀다. 백발의 머리카락이 밝게 빛나는 키란과 닮아 보이는 네루. 반가운 마음이 펼쳐진 순간, 드디어 『친구에게』 그림책을 꺼냈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다. ‘With you’라고 영어 제목을 읽는 목소리가 설렜다.

목이 마를 때 물이 없다고 슬퍼하지 마.

내 물을 나누어 줄게.


책장 넘기는 손길 따라 투명한 OHP 필름 앞뒤로 인쇄된 물이 둥실 떠오르더니 친구의 빈 컵에 포개졌다. 백발 부부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문득, 오만 곳곳에서 물을 챙겨 주던 친구가 떠올랐다. 이것저것 살뜰히 챙겨 주던 고마운 친구. “네가 차가운 빗속에 있다면 나도 함께 그 비를 맞을 거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건너가 함께 비를 맞는 책 속 여자아이를 쳐다보던 키란과 네루의 눈빛이 서로 마주쳤다. “넘어져도 괜찮아. 내가 언제나 너를 일으켜 줄 테니.” 감기 때문에 자꾸 기침이 난다며 말을 아끼고 조용히 있던 네루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변화의 첫걸음 NGO 활동을 하는 남편을 따라 인도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언어부터 환경까지 모든 게 낯선 이곳으로 떠나와 무척 힘들었다는 네루. 낯선 곳에 뿌리 내리며 세 딸을 키우고 시집보낸 그녀의 얼굴 위로 갑자기 엄마 얼굴이 어룽거렸다. 아빠를 만나 낯선 시간들과 씨름하며 세 딸을 길러 낸 나의 엄마. 엄마의 얼굴은 나의 얼굴로, 또 지금 낯선 곳에서 어린 남매를 키우며 애쓰고 있는 친구의 얼굴로 바뀌었다. 서로 다른 곳에 있지만 서로 닿아 있는 얼굴, 닮아 있는 이야기….

네가 혼자라고 느낄 때도

나는 항상 네 편이야.//

혼자서는 힘들어도

너와 함께라면 더 큰 꿈을 꿀 수 있어.

키란이 네루를 바라보았다. 네루도 키란을 바라보았다. 책 속 장면과 딱 겹치는 그 순간, 나는 마음을 다해 읽었다. “우리는 친구니까.” 백발의 부부는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함께한 오랜 시간들을 보듬는 정겹고 따스한 웃음이었다. “늘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책 속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나란히 포개어져 같은 곳, 파랑새를 바라볼 때 나는 우리의 마음과 마음이 서로 포개지고 이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넌 내 가장 소중한 친구야.” 가만히, 힘주어, 마지막 뒤표지의 글을 읽으며 나는 키란과 네루를, 곁지기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까지 함께한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소중한 친구, 가족. 새삼 마음이 뭉클했다. 키란이 엄지를 들어 보이더니 박수를 쳤다. 함께한 순간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친구에게』는 이렇게 우리 모두에게 아주 특별한 추억의 책이 되었다.

돌아오자마자 마주한 세월호 참사 1000일… 순간, 『친구에게』의 또 다른 제목 ‘With you’가 떠올랐다. ‘함께 하겠다는 약속’, ‘잊지 않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가슴 아프게…. 새해에는 다른 사람 아닌 국민과 함께하는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 국민의 편에서, 국민과 함께 더 큰 꿈을 꾸는, 참된 대통령을. 아슬아슬한 때라도 ‘아슬아슬 파워’, ‘엄청난 힘’으로, 우리가 바라는 순간을 꼭 이루어 낼 수 있기를!
이숙현 | 경북 구미, 오래된 아파트 한가운데 이야기 숲 옆구리에 끼고 있는 곳, 금오유치원에서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소중한 인연 엮으며 이야기 짓고 지냅니다. 여럿이 함께 그림책 보고 읽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좋아합니다. 월간 『어린이와 문학』을 통해 동화 마당에 나왔으며, 지은 책으로 『초코칩 쿠키, 안녕』 『선생님도 한번 봐 봐요』 『날마다 달마다 신나는 책놀이터』(공저)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