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02월 통권 제1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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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어린이 책 깊이 들여다보기]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답하기

박성애 | 2017년 02월

가족은 인간이 처음 만나는 사회이자, 개인이 사회에 접속하는 첫 통로이다. 특히 아이들의 세계에서 가족은 절대적이다. 독립적 삶이 거의 불가능한 아이들에게 물질적, 정신적, 정서적 필요의 대부분을 채워 주는 것이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가족이란 무엇으로 구성되는 것일까. 너무나 당연한 듯 보이는 질문이지만 현재 우리 사회가 꼭 물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가족을 가족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정상 가족’을 설정하는 기준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정상 가족’ 담론은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 경계선을 그어 이 범주에서 벗어난 많은 다른 형태의 가족들을 억압하곤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부부와 그들이 낳은 아이(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가족의 모습으로 상상한다. 이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혈연관계로 우리 사회에서 가족의 구성 요소로서 ‘피’는 무척 중요하다. 문제는 혈연으로 구성된 공동체가 ‘정상’이라는 이름을 갖는 순간, 이에 부합하지 않는 가족은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감당해야 하며, 그 구성원은 사회 속에서 혼란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구성원들 중 일부는 정상 가족이 되고 싶은 열망 속에서 지속적인 좌절을 겪는다.

‘정상 가족’ 담론은 현대 우리 사회 가족 이데올로기의 한 면을 보여 준다. 가족은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속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이자, 아이들에게는 절대적인 세계이기에, 가족이 무엇인지에 대한 작가의 사유는 무척 중요하다. 혈연관계에 기반한 가족이 급속히 해체되어 가고 있는 현재,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는 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여러 형태의 가족 구성원들을 고통스럽게 한다. ‘정상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 자체를 의심하고 과감히 그 밖으로 걸어 나가는 시도가 필요한 이유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지울 수 있다면 다양한 가족의 모습이 긍정될 수 있지 않을까. ‘정상 가족’의 경계를 허무는 일은 여러 형태의 가족을 긍정적으로 제시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정상 가족’의 경계에 서서 가족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만드는 방식을 『뺑덕』과 『섬마을 스캔들』을 통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피의 공동체’ 로서의 가족과 그 너머의 가능성 - 『뺑덕』

『뺑덕』은 「심청전」에서 단순한 악역에 머물고 있는 ‘뺑덕어미’의 삶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봄으로써 「심청전」을 현대적이고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작가는 사회의 소수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뺑덕어미)의 기구한 삶을 새롭게 환기시키고 원 서사에 드러나지 않은 하위 주체의 목소리를 복원한다. 『뺑덕』은 ‘뺑덕어미’라는 이름에 이미 나타나 있음에도 「심청전」에는 등장하지 않는 그녀의 아들, ‘뺑덕(병덕)’을 등장시켜 그가 어머니와 재회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인 대신 아이를 낳아 주러 들어간 집에서 병덕을 낳았지만, 본부인의 질투로 뺑덕어미는 아이를 뺏긴 채 쫓겨난다. 씨받이로 남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도 그랬지만, 그 집에서 쫓겨난 이후로 그녀의 삶은 더욱 힘겨워져, 결국 장꾼들의 술 시중을 드는 주막집에 기거하는 몸이 된다. 이렇게 『뺑덕』은 뺑덕어미에게 목소리를 부여해,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하위 계층의 여성이 어떻게 희생되는지를 그리고 있다.(이런 시각에서 보면 아이를 낳지 못한 여인이나, 씨받이였던 뺑덕어미, 그리고 심청이까지도 가부장제의 희생양이다.)

뺑덕어미의 가족은 그녀에게 희생만을 요구한다. 특히 아버지와 오빠로 대변되는 남성들은 뺑덕어미의 희생을 당연시 여기고, 그녀의 것을 모두 취한다. 뺑덕어미는 아버지와 오빠의 빚 때문에 팔리듯 시집을 가고, 씨받이로 들어갔다 아이를 낳고 쫓겨나지만, 가족들 중 누구도 그녀를 받아 주지 않는다. 이에 악만 남은 뺑덕어미는 심청이가 살고 있는 마을의 주막집에 기거하며 ‘행실이 바르지 않은 여자’로 살아가게 된다. 뺑덕어미는 청이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내 꼬라지 봐라. 내 신세만 이리되고 아비도 오라비도 제대로 살지 못했잖아. 나 팔아서라도 잘살았으면 내가 이렇게 억울하기나 했겠니?”(133쪽)라며 청이를 만류한다.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가면, 행실이 나쁘고 아무 데서나 패악을 부려 대는 뺑덕어미도 숭고한 효의 표상으로 추앙되는 청이와 결국 같은 가족 이데올로기 속에서 희생된 존재임이 드러난다. 그러나 뺑덕어미는 자신의 희생이 결과적으로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면 억울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함으로써 가족을 위한 희생 자체를 문제 삼고 있지는 않다. 희생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그 결과가 좋지 않을 때는 억울해진다는 것.

이는 가족이란 피로 맺어진 공동체이며 좋든 싫든 받아들여야만 하는 운명 같은 것이라는 논리를 전제로 한다. 이 논리 안에서는 가족을 위한 희생이 당연한 것이 되는데, 가족이 있어 그 구성원들은 “허벅다리에 뻐근하게 힘이 실리”고 “반듯하게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병덕은 어머니를 만나기 전이나 후에나 같은 뱃사람들의 공동체에 속해 살아가면서도, 뺑덕어미를 만난 이후 “누군가의 아들이 되어 보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작품 초반, 병덕이 방황하는 이유도 결국은 자신과 피로 엮인 누군가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주요 인물들인 뺑덕어미나 심청이, 병덕, 깡치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고 그 희생은 구체적이다. 청이는 아버지를 위해 돈을 벌고 집안일을 하며, 아버지의 온갖 필요를 채운다. 뺑덕어미의 삶도 구체적인 노동으로 채워져 있다. 병덕도 계모에게 거의 쫓겨나다시피 집을 나오기 전까지 집안에서 여러 일들을 해 왔고, 깡치(강재)는 힘든 줄 모르고 유일한 핏줄인 누나를 위해 조개를 캔다. 이들의 구체적인 노동은 ‘힘든 현실을 이겨 내도록 하는 것, 내가 살아갈 이유’라는 피상적인 이념과 교환된다.

병덕의 계모는 아이를 낳지 못해 뺑덕어미를 들여 병덕을 낳는다. 그녀는 자기가 낳지 않은 병덕에게서 지속적으로 엄마임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후 직접 아이를 낳고 피로 맺어진 가족을 얻게 되자 태도가 돌변한다. 더하여 병덕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자, 계모는 노골적으로 집안에서 병덕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계모는 병덕과 피로 맺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고자 집착적으로 ‘엄마’ 소리를 듣고 싶어 했던 만큼, 자신의 아이를 낳은 후에는 병덕의 노동에 도움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를 내쫓고 싶어 한다. 이는 피로 이어진 가족 공동체를 온전히 이루고 싶은, 즉 ‘정상 가족’을 만들고 싶은 욕망과 같다. 병덕 또한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무던히도 그 집안의 가족이고자 애쓴다. 동네 친구들에게 아버지와도 피가 다를지 모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병덕은 폭력을 행사할 만큼 아버지의 피에 집착한다. 더불어 병덕이 행실 나쁜 어미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하면서도 뺑덕어미 주변에 머무는 것도 피를 나눈 가족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피를 나눈 가족’은 병덕을 비롯한 깡치, 청이, 뺑덕어미 등 이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의 이유다.

이처럼 『뺑덕』은 피로 맺어지지 않았던 가족 공동체에서 벗어나 피의 공동체인 가족으로 이동하는 서사다. 병덕이 자신을 낳지 않은 어머니와 살면서 겪었던 불행은 자신을 낳아 준 어미를 찾음으로써 사라지고, 비로소 ‘다리에 힘이 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병덕과 뺑덕어미의 삶을 살펴보면 그들이 그토록 재건하고자 하는 ‘피로 맺어진 가족’은 피상적 이데올로기에 가까운 것인 반면, 그들의 삶을 실제로 지탱하고 도와주는 것은 그들과 함께 있는 공동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피의 공동체에서 버림받은 깡치, 병덕, 뺑덕어미가 사회에서 완전히 내쳐지지 않도록 가족을 넘어서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마련해 놓는다. 무작정 집을 나온 깡치와 병덕을 받아 주고 그의 실질적인 필요를 채워 주면서 동시에 따듯한 자비와 우정으로 정신적 성장을 돕는 뱃사람들의 공동체가 바로 그것이다. 더불어 제멋대로인 뺑덕어미를 끝까지 보듬고 이해해 주는 주막집 할머니도 혈연관계를 과감히 넘어서는 인물이며, 청이의 친구인 귀덕이와 그의 어머니도 청이 부녀의 삶을 지탱해 주는 가족과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피의 관계’를 넘어서는 공동체의 존재 가능성과 그에 대한 긍정의 시선은 가족 이데올로기 속의 ‘정상’을 해체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공동체로서의 가족 - 『섬마을 스캔들』

대부분의 아이들은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데 그 가족 구성원은 잘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섬마을 스캔들』의 주인공인 다율이는 다르다. 처음에 다율이는 피를 나눈 엄마와 아빠로 이루어진 가족 속에서 성장하지만,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는 아빠와 단둘이 살게 된다. 그러다 경제적 문제와 양육 문제로 아빠는 다율이를 보육원에 맡기고, 다율이는 가족과 완전히 떨어진 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아빠는 새엄마를 만나게 되어 다율이는 아빠와 새엄마로 구성된 새로운 가족 안으로 편입되지만, 다시 여러 문제로 인해 다율이는 섬마을에 사는 새엄마의 엄마인 새할머니에게 맡겨진다.

앞에서 살펴본 ‘피’로 맺어진 공동체를 ‘정상 가족’이라고 본다면, 다율이는 ‘정상 가족’의 모습으로 살아간 시기가 그다지 길지 않다. 다율이의 가족은 피로 맺어진 ‘정상 가족’에서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비정상 가족’으로 이동한다. 때로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다율이는 이 과정을 특별할 것 없이 살아 낸다. 많은 아동 서사에서 피를 나눈 가족의 해체와 새로운 가족의 진입을 고통스럽고 불유쾌한, 또는 지나치게 심각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는 것과 달리 작가는 다율이와 같은 아이들이 가진 긍정성과 솔직함을 신뢰하며 ‘비정상 가족’으로의 이동을 유쾌하게 그려 낸다. 결국 다율이와 새할머니로 이루어진 ‘비정상 가족’은 두 인물의 자발성과 적극성에 의해 섬마을에 무사히 안착한다.

이들은 가족 이데올로기 속에서는 비정상이지만, 가족 구성원들의 물질적, 정서적, 정신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고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에서는 온전한 가족이다. 새할머니는 다율이가 가장 필요로 했던 따듯한 사랑을 베풀고, 다율이는 글자를 모르는 할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친다. 새손녀와 새할머니로 이루어진 ‘비정상 가족’은 그 외연을 더욱 확대하여 섬마을 전체를 하나의 가족과 같은 공동체로 사유할 수 있게 한다. 가족이라는 배타적 경계를 뛰어넘은 공동체는 마을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 가면서 더욱 공고해진다. 마을 사람들은 섬마을 분교를 없애려는 교육청과 함께 싸우고, 대책을 강구하면서 마을 전체를 가족처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섬마을 스캔들』에서 가족이란 ‘피로 맺어진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공동체’가 아니기에, 숭고한 희생을 요구하는 가족 구성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구조적 희생자도 없다. 『섬마을 스캔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밥을 나눠 줄 수 있는 열린 사람들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되, 그 기준이 ‘피’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가족 이데올로기를 비켜 가는 서사이다. ‘피’에 대한 이들의 개방성은 ‘피’를 나눈 사람들끼리의 폐쇄성을 뛰어넘고, 기존의 가족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만들어, 가족 너머의 사회를 사유하도록 이끈다.

세계의 빠른 변화와 함께 가족의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다. ‘피’로 맺어진 운명의 공동체가 가진 폐쇄성을 뛰어넘을 때에 다양한 모습으로 서로를 지지하며 살아가는 가족들이 가족 이데올로기의 억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피를 나누지 않아도 괜찮지 않은가. 우리가 좋은 이웃이 되어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연대할 수만 있다면. 바로 지금, 광장에서처럼.
박성애 | 아동문학 연구자로 대학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