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01월 통권 제1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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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나의 작품 나의 이야기]
할머니와 나의 시간

이지은 | 2017년 01월

물 좋고 산 좋은 곳에 살던 나의 할머니는 ‘꽃다운 중년’에 당시 흔치 않았던 워킹맘 외동딸을 위해 할머니 말로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그림책에선 고작 아이 한 명이었지만 실제로는 손주 셋의 육아와 집안 살림을 해내야 했다. 지금 내가 그 나이 언저리가 되고 보니 난 사흘도 못하고 야반도주를 했을 것 같다.

책에서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똑똑하고 성실했고 책임감이 강했다. 엄격한 성격 덕에 난 할머니의 바다에 풍덩 빠져 놀다가도 혼쭐나는 일이 왕왕 있었다. 할머니는 무언가를 보살피는 데 탁월한 사람이었다. 어디서 아빠가 비리비리한 감나무 묘목을 받아 왔는데 몇 년 후 갓난쟁이 머리 만한 감이 주렁주렁한 감나무로 자라났다. 동네에서 가을만 되면 그 대단한 감 한 알 얻어 보려고 이웃들이 줄을 섰다. 난 지금까지 그렇게 큰 감은 본 적이 없다.

또 한 번은 오빠가 학교 앞에서 팔던 병아리 두어 마리를 사왔는데 알다시피 그 병아리가 닭으로 생을 마감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헌데 고 두 녀석이 일주일 보름을 살아 내더니 어느새 억센 털이 삐죽 나오고 닭이 되었다. 두 마리였던 닭이 매일 알을 낳고 그 알이 부화를 하고 나중엔 닭장까지 지어 줘야 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도시에서 닭의 존재는 민폐일 뿐, 닭들은 이웃들의 일용할 양식으로 한 마리씩 보내지고 할머니의 닭장은 마당에서 사라졌다. 『할머니 엄마』의 닭 장면은 이런 닭의 추억에서 나온 장면이기도 하다. 지금도 완전히 사망 선고를 받은 나무 뿌리를 할머니 집에 가져다 놓으면 튼튼한 나무로 변신한다. 감나무, 병아리가 다 뭐람. 이렇게 철없는 엄마 아빠 세 손주들을 잘 키워 낸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내가 지닌 할머니 기억의 시작은 할머니의 동그랗게 말린 비녀 머리다. 아마 할머니 등에 업혀 있던 기억일 것인데 참빗으로 긴 머리를 싹싹 빗고 마술처럼 이리저리 꼬아서 주먹처럼 동그랗게 말고 은색 비녀를 쑥 넣으면 그 또아리 머리가 단단하게 고정됐다. 눈을 지그시 감고 손가락을 휘리릭 하는 할머니의 머리 손질이 마술 쇼처럼 신기했다. “할머니 눈은 뒷통수에도 있어?” 했더니 “그럼 달렸지.” 하시길래 한동안 할머니가 귀신 아닐까 걱정했던 적이 있다. 할머니의 까맣고 긴머리…. 지금은 하얗고 듬성듬성한 짧은 파마머리도 까만 동아줄처럼 그랬던 적이 있었구나. 이 글을 쓰면서도 할머니의 기억이 내 콧등을 쥐어짠다.

밖에 나가 노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 나와 밖에 나가 놀 시간이 없었던 할머니는 집안의 동무이기도 했다. 함께 칼국수를 해 먹고 공기놀이를 하고 종이놀이를 했다. 할머니는 일제 시대라든지 모진 시집살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격동의 시대에 여인네의 한을 이해하기엔 난 그저 고로케를 좋아하던 남들보다 조금 듬직한 6살이었을 뿐이었다. 어른이 되어서야 할머니의 대서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 가족 중에 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내가 할머니의 유일한 말벗이었다는 것이 놀랍고 슬펐다.

낮엔 할머니와 함께 종종 그림을 그렸는데 할머니는 손가락 담당이었다. 손가락 열개를 틀리지도 않고 어찌나 잘 그리셨는지 할머니가 화가를 해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몸은 내가, 손가락은 할머니가 그리는 화가 콤비, 멋지지 않은가. 난 할머니의 책 읽는 소리가 좋았다. 할머니는 마치 책에 음표가 있는 것처럼 노래하듯이 책을 읽었다. 왜 그렇게 읽냐고 했더니 할머니 학교에선 그렇게 배웠다고 했다. 어느 날 책을 읽다 말고 나에게 엄마가 보고 싶다고 한 적 있다. 나는 우주의 비밀을 들은 것처럼 멍해졌다. 할머니한테 엄마가 있다니! 할머니는 그냥 할머니가 아닌가. 아직까지 그 말이 내 가슴을 누른다. 엄마를 그리워했던 늙지도 젊지도 않았던 여자의 마음과 먼 미래에 나에게도 생길 그리움.

나의 온 시간에 존재하는 할머니의 기억 때문인지 할머니 책을 만드는 일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항상 꿈꾸던 할머니 책이었지만 스토리 작업 초반부터 벽에 부딪혔다. 모래알처럼 많은 기억들을 어떤 방식으로 꿰어야 하는지 막막했다. 할머니와의 추억을 하나라도 더 보여 주고 싶은 욕심이 스토리를 계속 엉클어뜨렸다. 꼬인 생각에도 할머니 참빗이 있었다면 쉬웠을 것을.

몇날 며칠 에피소드만 늘어놓다 어느 날 할머니에게 악을 쓰며 대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할머니에겐 ‘땡깡’이라는 게 통하는 법이 없었는데 왜인지 그날은 서러움에 북받쳐 길바닥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보통 할머니 성격이라면 호랑이 목청이 나올 일인데 내 울음이 멈출 때까지 할머니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우리는 골목 끝까지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걸었다. “지은아, 그래 서운했나. 우리 시장 가서 고로케 먹을까.” 할머니가 말했다. 7살의 설움과 화해. 꼬였던 이야기는 여기서 풀렸다. 할머니와 나의 갈등 구조를 만들고 화해까지 끌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나를 그리도 서럽게 했던 건 뭘까? 도통 생각이 나질 않는다.

책에는 엄마랑 같이 운동회 가고 싶은 지은이가 등장하지만 내 유치원 행사에 엄마가 참석하는 걸 감히 상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슬프거나 속상한 적은 없다. 다만 할머니가 젊은 엄마들 틈에서 꽃을 달고 율동하는 장면이라든지 엉거주춤 달리는 모습이 나에게 인상 깊었을 뿐. 한번은 엄마가 아이를 업고 뛰는 달리기 시합이 있었는데 할머니가 손을 번쩍 들더니 “난 무릎이 아파서 야를 못 업어요.”라고 했다. 난 동네 친구 동민이네 엄마가 업어 주었는데 삐치거나 속상했던 건 아니다. 나는 단지 이겨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으므로. 운동회 전날엔 꽃춤 준비물인 종이꽃을 만들어 가야 했는데 할머니가 만드는 종이꽃은 언제나 완벽했다. 이리저리 접어서 가위질 몇 번 하고 펼치면 기가 막힌 꽃이 되었다. (할머니와의 종이놀이의 기억은 『종이 아빠』의 모티프가 되었다.) 이런 작은 기억들을 사나흘 정도의 이야기로 엮었더니 조금씩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출판사에선 할머니의 사랑을 좀 더 곰살맞고 따듯하고 직접적인 캐릭터로 표현하길 바랐다. 하지만 난 할머니의 외로움을 느끼면서 자랐다. 흔들림 없는 헌신 뒤엔 외로움의 자국이 깊었다. 어렸지만 난 알 수 있었다. 어엿한 7살이었으므로. 이야기도 채색 기법도 최대한 담백하게 가려고 했다.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할머니랑 그림을 그렸던 나른한 오후, 딱 그만큼만 보여 주고 싶었다. 거창하고 대단한 내리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 어쩌면 『할머니 엄마』는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할머니에게 좋은 친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할머니는 나에게 훌륭한 친구였다.

봄의 새싹을 좋아하고 꽃을 좋아했고 “동물은 손이 많이 가서 영 귀찮아.”라면서도 한겨울 내가 밖에서 주워 온 강아지들에게 내복을 지어 입히고, 함박눈이 펑펑 오면 언제 이 눈을 다 치우냐 투정 부리다가도 동네에서 제일 큰 눈사람을 굴려 주던 내 늙은 친구 박무연. 그 친구가 이제 아흔 살이다. 요새 할머니는 모든 일에 놀람이 없고 당연하다. 새벽밥 짓던 할머니는 온데간데없이 하루 종일 잠만 잔다.

책이 나오자마자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또 낮잠을 자는 할머니를 일으켜 세워 할머니가 주인공인 책을 내가 만들었다고 했더니 “아이고 이게 나라구? 지은이 덕에 호강하네.”라며 기뻐하신다. 내가 읽어 주는 『할머니 엄마』를 아이처럼 같이 읽는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었다. 손가락도 못 그리던 어린 아이가 어느새 훌쩍 커서 할머니에게 할머니 책을 지어 읽어 주다니.

책을 다 읽고 책 속의 지은이처럼 머리를 땋아 달라고 했다. 할머니는 “애기 땐 아프다고 자꾸 도망가서 다리 사이에 꼭 끼고 땋았는데 지금은 손가락에 힘이 없어 머리카락이 잘 안 쥐어지네.” 했다. 정말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 같이 거울 앞에 섰다. 할머니는 작고 난 한참 크다. 할머니가 말했다. “거울을 보면 깜짝 놀라. 내가 생각하는 내 얼굴은 이 얼굴이 아닌데 말이야.” 아, 늘 모든 게 당연한 거라고 말하는 할머니에게도 늙음은 낯설구나. 그 마음을 이해할 나이가 된 나도 할머니의 마음도 모두 애틋하다. “할머니는 아직도 짱 예뻐.”라고 했더니 아이처럼 활짝 웃는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흘러간다. 그래도 우리는 웃고 울고 떠든다. 이 책의 독자들이 할머니와 나의 시간에 들어와 주길 바란다. 잠시라도 이 책이 그대들의 소중한 기억을 소환하길 바라며.
이지은 | 첫 책으로 『종이 아빠』를 지었습니다. 앞으로 재밌는 그림과 이야기를 그리고 쓰며 행복한 할머니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