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통권 제1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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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과학 기술로 만나는 서울]
대한의원
――백성의 몸을 보살피라 (2)

김연희 | 2016년 11월

서울대학교 병원 안에 자리를 잡고 1908년에 완공된 대한의원은 조선에서의 서양 의학 시점과 관련해 논란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은 조선 정부가 운영한 병원이기 때문인데요. 서울대 병원은 조선 정부가 운영했고, 대한제국기 내부병원의 기원은 이 병원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 역시 자신의 뿌리가 이 병원에서 시작했다고 주장합니다. 이 병원이 무엇이냐고요? 바로 조선에서 서양 의술이 처음 시작된 광혜원이며, 이 병원에서 의사로 활동한 사람은 선교사 알렌(H. N. Allen)입니다.

알렌의 신화 뛰어넘기

알렌이 조선에서 서양 의료를 처음 시작한 것은 맞습니다. 이를 둘러싸고 이름하여 알렌의 신화가 만들어졌지요. 1884년 갑신정변 때, 크게 다친 민영익을 치료해 불과 3개월 만에 완치되자 고종과 민비가 서양 의학의 효과에 감탄했다고 하지요. 이 기세를 몰아 알렌은 고종에게 서양식 병원을 세워줄 것을 요청했고, 고종의 명에 의해 광혜원이 설립되었다는 것입니다.(얼마 후 광혜원은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알렌은 조선 정부에 서양 의술 병원과 학교 설립을 제안했지요.

“만약 전하의 정부가 제게 약간의 시설을 윤허해 주신다면 서양 과학으로 환자들을 치료하고 부상병들을 돌볼 수 있는 장소를 확보함으로써 큰 이익이 될 것입니다. 또한 청년들에게 서양 의학과 위생학을 가르치는 수단이 될 것입니다. 저는 정부의 감독 아래 병원을 책임지되 이 업무에 대한 보수는 없어도 됩니다. 필요한 것은 쾌적한 곳에 자리한 큰 한옥과 매년 지출될 경상비가 전부입니다. 이 제안을 허락해 주신다면 이 기관은 전하의 병원으로 부르게 될 것이고 전하께서는 고통 속에 빠져 있는 백성들이 적절하게 치료받는 것을 보시면서 만족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전하께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될 것이 틀림없으며 다방면으로 백성들의 사기가 올라갈 것입니다.”

알렌은 월급을 받지 않는 대신 병원의 터와 건물, 유지 운용을 위해 필요한 비용을 마련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 병원이 조선 정부의 병원이라는 것이지요. 자신은 이 병원에서 의사로, 그리고 의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서양 의학을 전파하며 일할 것이지만 급료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명확하게 했습니다.

알렌의 활약으로 서양 의료 병원이 세워졌다는 것이 알렌 신화의 큰 줄거리입니다. 하지만 대한의원의 설립 배경에 이런 알렌의 신화가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알렌이 월급을 받지 않은 것도, 서양 병원이 세워진 것도, 서양 의학이 전적으로 알렌에 의해 조선에 전해진 것도, 그리고 서양 의학이 동양 의학에 비해 백성의 고통을 덜어 줄 만큼 발전한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하나 살펴볼까요?

먼저 조선에 서양 의학이 알려진 시점과 관련해 살펴보겠습니다. 서양 의학은 19세기 이전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정약용이나 최한기 같은 실학자들은 서양 의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글을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1883년 창간한 「한성순보」에서 서양 의학을 대중적으로 소개했고요. 1877년 일본인이 부산에서 제생병원을 개원해 일본인만이 아니라 조선인들도 이용할 수 있게 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조선 정부는 병원 설립을 위해 관련 정보를 활발하게 수집했습니다. 1878년 정부는 한의학에 기초한 국립의료기관 혜민서와 활인서를 폐지하고 왕실의원인 전의감을 축소해 국가 의료 정책 자체를 개혁하려 했지요. 이를 위해 1881년 고종은 일본에 간 조사시찰단들로 하여금 일본 의료계를 시찰하고 보고하게 했어요. 또 1883년 미국을 방문한 보빙사 일행 역시 미국의 의료 시설을 시찰하며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이 정보들은 서양 의학, 혹은 서양 의술이 특히 총칼과 대포의 파편에 의해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하는 데 탁월하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집단 생활하는 군인들이 걸리기 쉬운 전염병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고 했지요.

물론 서양 의학이 만병통치가 아니라는 점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서양 의술이 지금처럼 많이 발전하지 않았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세균이 병의 근원임을 겨우 알기 시작했던 때입니다. 다만 조선의 의료보다 발달한 것은 찢긴 상처를 꿰맨다거나 피를 멈추게 한다거나 부러진 다리를 덧나지 않도록 하는 외과적 처치 정도였어요. 전염병의 치료도 말라리아와 같은 열병에 키니네를 처방하는 정도였습니다. 서양 의료에 조선 정부가 기대한 것은 바로 군진 의료, 즉 군대의 유지와 전쟁에서의 부상자 치료였습니다.

이런 정보들을 바탕으로 고종은 당시 외교 고문이던 독일인 묄렌도르프(Paul. G. von Möllendorff)에게 서양 병원과 의학교 설립 계획을 세우라고 했지요. 또 1884년 미국 북감리회 소속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는 김옥균을 통해 서양식 국립병원을 설립하자고 제안했고, 고종이 이를 윤허했습니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서양식 국립병원 설립과 서양 근대 의학 수용을 위한 학교의 설립과 같은 움직임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어요. 이런 상황들을 보면 알렌이 민비의 조카였던 민영익을 살려 서양 의학을 전혀 몰랐던 조선 정부에 근대 서양식 병원 설립을 요청하여 병원이 세워졌다는 것은 말 그대로 부풀려진 ‘신화’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파견된 선교사들의 의학 수준이 높지 않았고, 그들의 의술이 선교 수단이지, 서양 의료 시행과 전파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은 선교 활동을 위해 언제든지 병원 문을 닫았던 거지요. 서양 의학 전파가 목적이었다면 의학교를 세우고 의학을 가르치고 진료가 활동의 중심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1880년대에 서양 의사들은 대부분 선교를 위해 조선을 찾았고, 그런 까닭에 조선 정부가 세운 병원의 문을 닫고 선교 여행을 떠나는 일이 빈번했어요. 이런 일이 이후 제중원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만큼 서양 의학의 도입이 전적으로 선교사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도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광혜원에서 제중원으로, 국가병원에서 선교사 병원으로

조선 정부는 갑신정변의 주모자인 홍영식의 집(서울시 종로구 재동, 현재 헌법재판소)에 서양 의술 병원을 세웠어요. 고종의 명에 따라 이름을 광혜원으로 해서 문을 열었지요. 널리 은혜를 베푸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조선 정부는 병원으로 쓸 건물, 시설, 병원에서 사용하는 기기 및 도구 약품 구입 비용, 경영 및 유지 인력(국가의 관리와 하인)등을 제공했고, 여기에는 미국인 의사에게 주는 급여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병원 운영을 위한 모든 경비를 제공했어요. 알렌이 요구한 이상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병원을 운영하며 손해를 봐도 조선 정부가 모두 메워 주기로 한 것이지요.

병원 이름은 곧 제중원으로 바뀌었습니다. 제중원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사도 했습니다. 1886년 북촌 홍영식의 집에서 구리개, 지금의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알렌은 제중원이 좁다고 했지만 사실은 좁아서라기보다는 양반들이 모여 사는 한적한 북촌보다는 좀 더 번화하고 복잡한 곳으로 옮기고 싶어서 그렇게 요구했던 것 같습니다. 구리개에는 청나라 군대도 있었지요. 그리고 구리개는 일본인들의 거주지인 진고개(지금의 충무로)와도 가까웠어요.

제중원은 병원비를 낼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었어요. 제중원이 왕립 병원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왕이 병든 백성을 보살피는 곳이지요. 하지만 제중원에서 활동하는 선교사 의사들은 입장이 달랐어요. 병원은 기독교 선교를 위한 발판이었습니다. 특히 1887년 9월, 알렌이 조선에서 미국 공사관의 참찬관으로 취임하자 제중원 의사는 헤론(J. W. Heron), 빈턴(C. C. Vinton)과 같은 선교사가 담당했고, 그들은 병원을 비우는 일이 많아져 병원 운영이 나빠졌어요. 1893년 7월, 새로 부임한 에비슨(Avison)은 제중원의 운용에 강한 불만을 표명했지요. 그는 선교 여행을 다니는 사이 일본인 의사가 대신 진료하게 한 일을 거세게 항의했어요. 그러면서 제중원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운영권을 미국 장로교 선교부로 넘길 것을 요구했습니다.

에비슨의 요구는 1894년 9월에야 받아들여졌어요. 그 까닭은 그 해에 일어났던 정치적 사건들 때문이지요.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개혁이 연이어 발생했고 특히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어요. 이런 사태를 맞게 되자 고종은 제중원을 일본에게 뺏길 것을 염려했고 이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에비슨에게 제중원 운영을 넘겼습니다. 하지만 소유권까지 준 것은 아니었어요. 에비슨은 제중원을 수리하고 고친 비용을 조선 정부가 지불하기만 하면 제중원을 다시 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904년 에비슨 등이 세브란스 병원을 새로 세우고 난 다음 해 대한제국 정부는 수리 비용을 지불하고 제중원을 되돌려 받았지요. 에비슨은 1900년 미국인 세브란스(L. H. Severance)로부터 병원 설립 기금을 기부 받아 1904년 남대문 밖 복숭아골(현재 서울역 맞은 편 세브란스 빌딩 자리)에 병원을 새로 세우면서 이름도 세브란스 병원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과정을 톺아보면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이 1885년에 세워진 제중원을 세브란스 병원의 뿌리라고 주장하는 일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조선 정부가 운영했음을 들어 서울대 병원의 시작으로 보는 것도 무리가 있어 보이고요.

의학 교육을 기대하다

병원이었음에도 제중원은 특이하게 외아문 즉 지금의 외무부 소속이었어요. 조선 정부가 제중원을 병원이자 서양 의학 학습 기관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한 교사 초빙, 교재 및 학습 도구 수입에 따르는 외교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알렌이 서양 의학 교육도 실시하겠다고 밝히자 조선 정부는 꿈에 부풀었어요. 군인들에게 필요한 의술과, 전염병을 막을 위생 관련 서양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기대했지요. 조선 정부는 의학당 지침을 세우고 학교 건물을 마련하고 학생들을 선발했으며 의료 도구 구입 자금도 아낌없이 주었어요. 이런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의학교에서는 아침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의료 기구 다루는 법, 약 제조법, 환자 간호법, 영어, 물리, 화학 등 기초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1886년부터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를 교사로 해서 16명 학생이 서양 의학과 관련한 과학을 공부했지요. 제중원 의학당이 출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의학당 수업은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1885~1886년의 조선 상황으로 이를 어림짐작할 수 있습니다. 미국인 선교사들이 시도한 기독교 교육에 불만을 품고 학생들이 학교를 떠났을 수도 있어요. 또 우리 언어를 모르는 서양 교사들과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로 인해 수업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또 의학교에서 가르치는 서양 과학을 기초 지식 없이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점도 이유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 정부의 모든 개혁 정책에 부정적이던 청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방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1880~1890년대에는 서양 의학 교육까지 시행되는 계기가 마련되기는 했지만 지속되지는 못했습니다. 서양 의학 교육은 1899년 의학교 설립 이후에야 본격화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사정들을 살펴보면, 미국 선교사들이 서양 의학을 조선에 가져왔다는 알렌의 신화는 깰 수 있었지만, 서울대 병원과 연세대 병원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합니다.
김연희 | 서울대학교에서 한국과학사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서울대학교 연구 교수로 있습니다. 한국 역사 속에서의 자연 이해와 자연 이용 기술에 관심이 많습니다. 서양 과학과 우리 전통 과학이 만났을 때의 이해 방식에 관해 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 『창덕궁에서 만나는 우리 과학』 『강은 어떻게 흘러가나』 『고종 시대의 과학 이야기』 『경복궁에서 만나는 우리 과학』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