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통권 제1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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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그림책 이야기 방식 읽기]
글과 그림, 스밈과 번짐

김영욱 | 2016년 11월

올해 노벨 문학상은 미국의 포크 록 가수 밥 딜런에게 돌아갔다. 노벨 문학상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억될 이번 스웨덴 학술원의 결정은 ‘시가 시집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님’을 선포한 셈이 되었다. 예술에서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서로 스며드는 현상을 두고 문학 순수주의자들이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이고도 있지만, 그 옛날 사람들은 소리 내어 노래 부르기 위해 시를 지었다. 따라서 시집 한 권 내지 않고도 문학을 한다고 할 수 있으며, 시의 본령을 곰곰 따져 볼수록 내재된 음악성과 떼어놓고 생각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그림책은 미술일까, 문학일까? 우리는 그림책이 문학과 미술이 서로 스며든 새로운 양식의 책이라는 정도에서 간단하게 답하고 만다. 사실 이에 대하여, 지금껏 그리 진지한 고민은 드물었다. 서양문화사에서는 회화와 문학에서의 우위 논쟁이 몇 차례 있었지만, 근대 이후 태동한 그림책 영역에서 그림과 글의 비중에 대한 연구나 논의 등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바버러 쿠니는 그림책에서의 글을 목걸이 줄에, 그림을 목걸이 알에 비유하며 그림이 주가 되는 특이한 문학 장르임을 강조했고, 유리 슐레비츠는 좋은 그림책일수록 글이 그림으로 스며들어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유리 슐레비츠는 소위 말하는 ‘말 없는 그림책(wordless picturebook)’을 추구한 셈인데, 헷갈린다. 글이 없이 그림으로만 구성된 그림책이 문학 작품이랄 수 있을까?

한편 요사이 출간되는 그림책들 중에서는 글의 비중이 상당히 많은 작품들이 가끔 눈에 띈다. 그림책 연구자 옌스 틸레는 “그림책을 일차적으로 그림에 의해 결정되는 책”이라고 정의한 바 있는데, 어떤 그림책들은 글의 분량이 많고 그마저도 그림을 설명하는 군말인 경우도 왕왕 있다. 하여, 그림책을 읽는 책으로 접하지 않고 보는 책으로 접하는 어린이 독자들을 위해 그림책에서 글이 추구해야 할 방향이 어디일지 고민해 보았다.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들의 놀이를 가까이에서 관찰해 본 사람이라면, 아이들이 언어에 대한 감수성이 무척이나 강하고 창의적으로 언어를 만들어 내는 활동을 즐기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 위해 나름대로 여러 가지 방법을 쓰는데, 단어를 리듬감 있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아이의 혼잣말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마치 노래라도 부르듯 흥얼거리는 걸 알아낼 수 있다. 아동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모든 어린이가 ‘시인’이고, 조금 큰 뒤에야 산문체로 말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 어린이의 언어 세계와 동시를 연구한 러시아 아동문학계의 거장 코르네이 추콥스키는 “아이의 귀가 모국어, 모국의 감성의 소리에 조율되어 있게 하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마음으로 가득하게 하라. 시가 음악처럼 가슴을 울릴 수 있게 하라.”고 당부한 바 있다.

시인 마이클 로젠이 글을 쓰고 퀜틴 블레이크가 그림을 그린 『내가 가장 슬플 때』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비통한 마음을 다루고 있는 그림책이다. 가장 사랑하는 이를 잃은 엄청난 고통에서도 행복한 추억들을 떠올리며 극복하려 애쓰고 있다는 이야기가 시적인 문체로 씌어져 있다. 가뜩이나 분리불안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이 늘어가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죽음’이란 부정적 정서를 다룬 그림책을 과연 아이들에게 읽어 주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에 대한 고민을 피할 수는 없다.

사실, 어린 독자들이 죽음이라는 사실과 개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연령별로 연구한 추콥스키는 어른들의 우려와 달리 아이들의 영혼에서 가장 눈부신 특성 중 하나로 낙관주의를 꼽는다. 말하자면, 아이들은 삶이 오직 즐거움과 끝없는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믿거나 믿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모든 생물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는 연령에 이르러도 자신을 포함한 사랑하는 이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안심시킨다고 한다. 글쎄, 필자로서는 꼭 그런 건지 확신이 서지는 않는다. 어른의 눈으로 바라본 『내가 가장 슬플 때』는 시인 마이클 로젠이 감정을 절제하면서 상실 이후의 희망을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황량하고 우울한 마음의 풍경을 상상하게 된다.

퀜틴 블레이크가 예의 그 날카로운 펜 그림에 슬쩍 노란색을 가미해 우중충한 분위기에 약간의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해도, 슬픔이 스멀스멀 기어드는 걸 완벽히 막을 수는 없었다는 판단이 든다. 가령 좌우의 펼친 면을 네 개의 기다란 프레임이 있는 그림으로 분리하고, 그 각각의 그림 속에 1인칭 화자의 심리적 변화를 도시의 풍경에 빗대 은유적으로 그린 장면을 보면, 햇살이 환한 낮 동안엔 그럭저럭 슬픔을 모른 체할 수 있던 주인공도 어둑해지는 저녁 무렵이 되면 칙칙한 잿빛이 되어 쓸쓸히 빈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나마 노란색과 연두색이 있던 낮 풍경도 어둠만이 지배하는 밤 풍경이 되어 버렸을 때, 시인은 이렇게 읊조리고 있다.

왜 슬픈지 알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슬픔은 어디선가 나타나 나를 덮어 버리는 구름 같습니다./ 에디가 없어서 슬픈 건 아닙니다./ 어머니가 안 계셔서 슬픈 것도 아닙니다. 그냥 슬플뿐이죠.

몇 번을 눈으로 읽고 소리까지 내어 읽어 봐도 마음 깊이 새겨진 상실의 슬픔은 가벼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은 ‘왜?’라는 질문을 거듭할 것이다. 어른들은 마땅한 대답을 준비해 둘 수 없을 만큼 먹먹할 뿐인데도. 『내가 가장 슬플 때』를 우리말로 옮긴 김기택 시인은 “어른이 되어도 어린이의 말을 잃지 않는 사람, 굳어져 딱딱한 고정 관념이 없이 말랑말랑한 새 말을 쓰는 사람, 그런 사람이 시인이다.”라고 『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에서 이야기했다. 이오덕 선생도 『시정신과 유희정신』에서 “시는 맨 처음 어린이의 것이었다고 하는데, 그 말은 옳다.”고 말한 바 있다.

동시 「콩, 너는 죽었다」를 지은 김용택 시인의 경우가 그렇다. 한평생을 자신이 나고 자란 섬진강가 작은 마을을 떠나지 않고, 자신이 나온 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로 정년퇴직을 한 시인이다. 그가 할머니의 죽음을 맞아 상례를 치르며 떠오른 감정과 생각을 옮긴 시 「맑은 날」이 전갑배 화가의 채색 담채화와 만나 그림책이 되었다. 다만 시인은 그림책으로 시를 옮기는 과정에서 좀 더 읽기 쉽게 다듬고 고쳤다고 한다. 총 여섯 개의 장으로 구분된 이야기는 상례의 절차대로 흘러가는데, 할머니의 부음과 초혼에서부터 입관과 별상까지의 과정이 아련하고 아릿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헛간 구석에 남은 어둠까지 모두 태운 봄볕이 할머니의 죽음을 숨김없이 드러내 주던 어느 맑디맑은 봄날, 강가 마을의 가난한 마을 초상집 마당에 핀 살구꽃은 뜻밖에도 환하게 그려져 있다.

전갑배 화가는 아지랑이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자세로 이 봄날의 마지막 작별을 표현하고 있는데, 압권이다. 시의 한 구절 “살구꽃 그늘이 마당에 떨어지고/ 앵두꽃 그늘이 뒤안 우물에 드리워지고”에 조응하는 전갑배 화가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분홍 먹물이 화선지로 번지고 스며드는 것이야말로 삶과 죽음이 서로 번져 스며드는 우리네 인생살이를 둘러보게 된다. 평소 소원대로 환한 봄날에 생명줄을 놓은 아흔 넘은 할머니 영혼의 빛이랄까? 이 빛은 슬그머니 담장을 넘어 마을 어귀까지 환하게, 주검을 태운 상여를 환하게, 상여가 넘어가는 고갯마루까지 환하고 붉게 물들이다가, 봉분에서 나온 먼저 죽은 어르신들이 선산 잔디밭에 앉아 할머니를 고이 맞는다는 상상의 풍경화에 이르면, 이 분홍을 바라보는 눈은 부시다 못해 시려 온다.

그러나 붉은 흙을 파고 할머니의 주검이 든 관을 내리는 하관식의 장면에서는 그림마저 상주들의 회한처럼 칙칙해진다. “관 위에 흙을 던질 때마다/ 무덤 속을 따라 들어갔던/ 햇살들이 쫓겨났습니다./ 할머니는/ 그 좋은 햇살 한 줌 쥐지 못한 채/ 흙 속에 묻히고”에 이르면 그림에도 어둠이 가득하다. 호상(好喪)이라 여겨 애써 감춰 뒀던 고인을 향한 회한들이 마음을 짓누르는, 무게감 느껴지는 그림체이다. 그러고 나서 짙은 먹빛이 황혼의 붉은 빛과 섞여 든 이 묵직한 장면 뒤로 난데없이 진달래꽃이 펼침면 가득 피어난 그림이 등장한다. 그렇다. 선산에 흐벅지게 피어난 진달래꽃도 큰일 치르고서야 서럽게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시인도 화가도 서로 이 역설적인 서글픔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토록 환한 봄날을 다시 맞을 수 있겠는가?

“해 저문/ 뒷산이 내 등을/ 내려다보고/ 나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흘러가는 강물에/ 울었습니다.” 할머니의 일생을 더듬어 보는 마지막 장에서의 한 구절을 조용히 읽어 본다. 그리고 보랏빛이 완연하게 물든 강물을, 할머니가 건너가신 강물을 담은 그림을 들여다본다. 번짐, 꽃은 번져 사라지고 당신은 번져 내가 되고, 다시 나는 당신으로 번지고, 번져야 살고, 번져야 열매를 맺고, 번져야 가을이 되고, 단풍이 번져야 낙엽이 된다. 사랑도 번지고 삶도 번진다. 번진 것은 결국엔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것 같지만, 온통 시커멓게 번진 어둠 속에서 다시 새벽이 온다는 걸 우리는 안다.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이 삶을 환히 밝혀 주는 꽃처럼 온다. 시인 김용택은 꽃이 내게 다가오는 방식이 시가 오는 방식과 참 많이 닮았다는 걸 화가인 전갑배 선생에게 말해 주었을까? 아니라면, 어찌 이리도 화가의 그림이 시인의 내면 풍경만 같을까? 글과 그림이 서로에게 스며들어 번져가는 한 편의 그림책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떠올리며, 『맑은 날』의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시인과 화가 사이에 눈빛의 스밈과 번짐이, 이심전심(以心傳心)이 느껴진다.

한동안 아동문학에서는 다소 금기시되는 소재들이 있어 왔다. 죽음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서양이든 동양이든 오랫동안 그림책에서 죽음이라는 주제로 그림 작가, 글 작가는 씨름을 해 왔다. 그림책 연구자인 마틴 솔즈베리와 모렉 스타일스는 『그림책의 모든 것』에서 부모 세대의 만혼 풍속으로 말미암아 그림책 독자의 연령대에서도 조부모를 잃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무엇을 다루고 다루지 말아야 하는가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표현하고 전달해야 하는지 공부하고 궁리해야 한다고 일침을 놓는다.

이번 노벨 문학상이 노래 가사에 주워졌다고 문화계가 술렁인다. 그 술렁임 속에서 우리는 시의 본령을 고민해 보게 된다. 오래 전 시 속에는 음악과 회화가 모두 있었다. 그러나 현대의 시는 후자 쪽으로 점점 기울고 있었다. 혹자들은 이제라도 시가 잃어가고 있는 음악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림책은 어떨까? 음악과 가사가 악보에 적히고 불리는 대중가요와 달리 글과 그림이 종이 위에서 만나 예술 작품이 되는 그림책은 무엇을 어떻게 고민해야 할까? 스밈과 번짐이야말로 경계를 나누고 세우는 일이 아니기에 그림책에서의 회화와 문학을 따로 떼어 이야기하기란 난처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 처음 어린이의 것이었던 그림책의 자리를 돌아봐야 한다. 그 자리에서 역시 맨 처음엔 어린이의 것이었던 시의 정신도 살펴봐야 한다.
김영욱 | 서울에서 태어나 교육학과 영문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아동문학과 문화콘텐츠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월간 『어린이와 문학』 편집부에서 일했고, 어린이책 기고가로 활동했습니다. 지은 책으로 동화 『책벌레 대소동』, 에세이 『그림책, 음악을 만나다』가 있고, 옮긴 책으로 『우리는 핀볼이 아니다』 『알 카포네의 수상한 빨래방』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