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06월 통권 제1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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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밑줄 긋는 시간]
마법이 필요한 순간

김일옥 | 2016년 06월

분명 세상은 훨씬 풍요로워졌는데, 어째 사는 건 더 힘들고 팍팍해진다. 힘들수록 남자보다는 여자가, 어른보다는 아이가 더 궁지로 내몰린다는 건 사실이다. 이 어렵고 힘든 상황을 벗어날 수는 없을까? 방법은 두 가지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무언가에 취해 현실을 외면하거나 욕이라도 박박 해대면서 현실을 뚫고 지나가는 수밖에 없다. 모두들 현실을 정면 돌파하는 게 옳은 방법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은 소수이다. 대개 현실을 외면하는 방법을 택한다. 달아날 수 있고, 외면할 수 있는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삶이란 그렇게 딱 둘로 쪼개지지 않는다. 버티다가 피하고, 피했다가도 들여대기도 한다. 그러니 달콤하고 향기로운 무언가는 우리 삶에 더욱 필요한 게 아닐까? 달콤하고 향기로운 거, 그건 마법이 아닐까? 내 삶에서 마법이 필요한 순간 이 책 『안녕 크렌쇼』를 펼쳐 들고 싶다.

“마법 같은 건 없어.” “음악은 마법이야.” “사랑은 마법이야.” “모자 속 토끼도 마법이야.” “갓난아기 냄새는?” “새끼 고양이들은 마법이야!”

이 글의 주인공 잭슨은 과학자가 꿈이다. 사실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항상 논리적인 설명을 원한다. 잭슨 가족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힘들고 벅찬 상황에 놓여 있다. 늘 배고프고, 살던 집에서도 곧 나가야 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해도 잭슨은 이미 자동차에서 노숙 생활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래서 그게 얼마나 힘든지도 안다. 이때 상상 친구 크렌쇼가 마법처럼 잭슨 앞에 나타난다.

잭슨은 현실적인 아이이기에 크렌쇼라는 상상 친구가 나타났다는 걸 믿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다. 파도타기를 하는 고양이 크랜쇼, 눈을 감고 열까지 세면 혹시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잭슨은 두 눈을 질끈 감는다. 우리 모두가 외면하고 싶을 때 그러하듯이. 하지만 아무리 눈을 감아도 절박한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누구 도움도 필요 없어. 그리고 난 정말이지 상상 친구 따위 필요 없어. 난 더 이상 꼬맹이가 아니야.”

잭슨은 크렌쇼를 쫓아내려고 한다. 일곱 살 때 내가 만들어 냈으니까, 널 없애 버릴 수도 있다고 소리친다. 하지만 크랜쇼는 따뜻하고 잭슨보다 더 커다랗다. 그리고 ‘친구 되기’를 연습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이 책이 참 재미있고 놀라운 건 서로 반대되는 상징과 역할을 이야기 속에 절묘하게 녹여냈다는 점이다. 사실을 중요시하는 잭슨에게 상상 친구 크렌쇼가 다가온다. 상상 친구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믿고 싶은데, 뚜렷한 증거가 눈앞에 있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상상 친구가 잭슨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속삭인다. 잭슨은 상황이 나쁠 때도 사실을 숨기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익살스런 행동을 하는 엄마 아빠가 참 싫다. 다 알고 있으니 자신을 어른스럽게 대해 달라고 소리치고 싶다. 하지만 어린 동생 로빈 앞에서는 잭슨 역시 엄마 아빠처럼 군다.

“넌 너무 걱정이 많아, 꼬맹아. 다 괜찮아. 오빠가 약속해. 이제 라일 책이나 읽자.”

잭슨은 어느 순간 ‘애늙은이’가 되어 버렸을까? 애늙은이는 나이에 비해 철이 들었다는 거다. 잭슨은 시키지 않아도 연필깎이 통을 비우는 동생에게 그 모습도 예쁘다면서, 기특하다고, 칭찬하는 말이라고 한다. 엄마도 잭슨이 ‘착한 아이’ 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착한 아이들’은 착해서 착한 건 아닐 것이다. 그들은 ‘긍정적 강화(착한 행동을 하는 것)’가 최적의 선택이라는 걸 일찍 알아챈 것일 뿐이다.

나쁜 상황을 어찌 할 수가 없다. 자동차에서 생활하는데 엄마 아빠는 ‘그저 자동차를 타고 캠핑을 즐기는 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경찰 아저씨는 사회복지관, 쉼터 푸드 뱅크를 소개시켜 준다. 아빠의 거리 공연 팻말에는 ‘낚시나 떠나 볼까?’라고 쓰였다. 이 장면을 읽을 땐 정말 가슴이 뭉클했다. 하지만 이 모든 긍정적 사고방식도 잠시뿐, 빗속에서 흐르는 아빠의 눈물을 닦아 주진 못했다. 며칠만 더 버티면 될까?

착한 아이, 긍정적 사고방식,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혹은 최악의 선택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잭슨이 선택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었을 뿐이다. 어쩌면 어려운 대답을 주고 싶지 않은 엄마 아빠 마음을 알아 버렸기에 착한 아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착한 아이는 어려운 질문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사실을 말해야 한다고 크렌쇼는 속삭인다.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에게. “어떤 사실? 누구한테 진실을 말하라고?” 잭슨은 버티고 또 버틴다. 잭슨이 말해야 하는 진실은 뭘까?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이야기의 흐름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구성도 촘촘해서 한 번 읽기 시작하니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치닫는다. 추억의 쇼핑백(팔지 말아야 하는 물건들을 넣은 가방)에 미처 넣지 못한 동생 로빈의 휴지통을 팔러 나가고, 아빠의 기타가 팔릴 때는 어느 누가 마법을 믿을 수 있을까?

세상은 발 디디고 서는 것이라고 한다. 그 발 디디고 서 있는 현실 속의 친구 마리솔이 잭슨의 크렌쇼 조각상을 작별 선물로 가져간다. 상상 친구 크렌쇼, 시시한 조각상이다. 하지만 네가 만든 거라면 시시하지 않다고 말하는 친구에 의해 드디어 진실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 번 열린 진실의 문은 쉬이 닫히지도 않는다.

“사실을 말해 줄게. 난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데 지쳤어. (중략) 난 이렇게 사는 게 싫어.”

“아이로 사는 것도 어렵기 마찬가지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는 건 힘들어.”

“우리한테 이런 일을 겪게 한 게 미웠어. 불공평해!”

“미안해 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건 아니잖아.”


하지만 서서히, 아주 서서히 분노가 차츰 누그러지는 걸 느낀다. 또한 삶은 뒤죽박죽 복잡하다고 하더니, 어느새 그간 차곡차곡 쌓아 놓은 마법들이 서서히 그 빛을 뿜기 시작한다. 드디어 잭슨네 가족에게 꼭 필요한, 아니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빛이 들어온다. “사랑은 마법이야.”로 시작한 이야기가 뒷부분에 가서는 “아빠, 사랑해. 이건 사실이야.”로 마무리된다.

마법과 사실, 환상과 현실을 이보다 더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이야기가 있을까?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는 마리솔의 말이 귓전에 맴돈다. “상상 친구는 절대로 잊으면 안 돼.” 상상 친구는 갑자기 나타나듯, 상황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면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크렌쇼가 말하길 상상 친구는 절대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언제나 필요할 경우에 대비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때껏 상상 친구 따윈 있어 본 적도 없는 내게도 기다리고 있는 ‘상상 친구’가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본다. 마법이 필요한 순간이 꼭 자동차 속 생활만을 말하는 게 아닐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을 짓누르는 상황이 다르니까. 내 상상 친구는 누굴까? 상상 친구를 만날 생각을 하니 두렵다. 하지만 삶은 뒤죽박죽이라고 하니 어느 순간 내게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상상 친구가 함께 하기에 그 순간을 견디어 내겠지. 참으로 묘한 친구다. “상상 친구가 잊힌 채 홀로 내버려진다면… 그땐, 누가 알겠어?”

정말 마법이, 상상이 사라져 버린다면 우린 살아 나갈 수 있을까? 『안녕 크렌쇼』는 삶에 마법이 필요한 순간을 위한 책이다. 일상 속에 녹아 있는 마법에 대해 조분조분 들려주는 이야기책이다.
김일옥 | 2007년 제5회 푸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월간 「어린이와 문학」에서 추천을 받았습니다. 지은 책으로 『욕심쟁이 왕도둑』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강희맹의 훈자오설』 『치우 탐정단이 달려간다』 『궁금쟁이 김선비 속담에 쏙 빠졌네!』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