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07월 통권 제1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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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밑줄 긋는 시간]
콩알만큼 작은 것들의 속삭임

송미경 | 2015년 07월

『신기한 시간표』에는 ‘서로 다른 초등학교, 다른 계절, 다른 시간에 생긴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우리 큰 아이가 어릴 때 저에게 보여 주려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었죠. 나는 작고 음침한 청회색빛 책을 펼치는 순간 갑자기 입고 있던 옷들이 헐렁해지고, 안경이 주르륵 얼굴에서 흘러내리고, 앉아 있던 책상이 아주 높게 변해 버린 기분이었어요. 마치 이 책을 읽는 동안 초등학생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멋진 동화는 이렇게 우리에게 마법을 겁니다. 굳이 어린 시절 내가 다닌 초등학교로 나를 데리고 가지 않아도. 내게 어린아이 분장을 시켜 주지 않아도 나는 이야기 속 아이들과 같이 운동장을 달리거나 교실에 앉아 친구에게 쪽지를 보내게 되지요. 나는 이렇게 일상 공간에서 일어나는 판타지들을 좋아합니다.

이 동화는 현실과 상상이 씨실과 날실처럼 느슨하게 직조되어 있죠. 구멍이 숭숭 뚫려서 바람이나 빛이 좀 들어올 정도예요. 저는 이 이야기들이 그렇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살아가는 삶과 상상하는 것들 그리고 내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여백들이 이야기 속에 어우러져 있죠. 작가는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거나 따지고 들지 않고 그 여백 안에 적당히 내버려둔 것 같아요. 그래야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서 같이 놀아도 비좁지 않을 테니까요.

『신기한 시간표』에는 아주 짧은 열 개의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이야기 속 아이들은 작은 동물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공놀이하다가 마법사 할아버지를 만나고, 색깔을 찾아 가며 뛰어다니는 고양이를 복도에서 만나며, 어린이로 돌아온 나이 든 선생님과 잡기 놀이를 하고, 마녀에게서 얻어낸 치즈를 생쥐에게 주기도 합니다. 이 아이들이 신비한 일을 겪는 공간은 우리가 누구나 지나쳐온 일상 공간이에요. 이 책을 영화로 만든다면 저예산 영화가 되겠지요. 이가 빠질 때마다 다른 색 타일로 끼운 복도의 타일들, 구멍 난 교실 마루바닥, 백엽상이 있는 운동장 구석, 급식실, 몸을 숨길 만한 청소함 같은 것이 있는 아주 평범한 학교만 있으면 될 테고, 어린이들도 어려운 연기를 할 필요 없이 조금 다투거나 잠시 뛰어다니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이 흔한 공간에서 어쩌면 이 이야기는 이렇게 놀랍도록 신비롭고 태연하게 심장을 조여 오는 걸까요. 거창한 시공간에 우리를 데려가지 않고도 이렇게 멋진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다는 걸 이 책만큼 확실하게 증명해낸 책이 또 있을까요?(있다면 제게 좀 알려 주시기를) 다시 한 번 저는 이 책을 빌려와 내게 쥐어 주었던 큰 아이에게 고마워집니다.

작가 오카다 준은 일본 효고 현에서 태어나 미술을 공부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대요. 그의 책 『신기한 시간표』의 공간은 학교지만 작가는 선생님의 입장이 아닌 자신 안의 어린이로 변신해서 이 글을 써내려간 듯해요. 『신기한 시간표』 속 여덟 번째 이야기인 방과 후 「다시 한번 달리고 싶다」에선 이제 곧 학교를 그만두시는 타바 선생님이 등장합니다. 타바 선생님은 최근 회의가 없을 때마다 창가에서 운동장을 바라보곤 했어요. 아이들은 그날도 방과 후 운동장에서 경찰과 도둑 놀이를 하느라 정신없었습니다. 뒤에서 경찰이 된 아이들이 따라 오고 도둑이 된 주인공은 있는 힘껏 도망을 가고요.

그런데 옆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가 같이 뛰어서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요. 그 아이는 주인공 히로시의 눈엔 낯설기만 합니다. 펄렁하고 짧은 검은 바지에 낡은 가죽 허리띠를 휘날리며 달리던 낯선 아이는 히로시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가늘게 뜨며 싱긋 웃죠. 하지만 히로시는 열심히 도망가야 해서 그 아이가 누군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요. 그때 집에 가라는 종소리가 울리고 놀이는 끝납니다. 히로시는 하얀 숨을 내뿜으며 책가방을 가지러 교실로 갔다가 타바 선생님과 마주칩니다. 그리고 창으로 자신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봤을 선생님이 어쩐 일인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요. 히로시와 타바 선생님은 숨을 헐떡거리며 서로를 바라보았어요. 이윽고 선생님은 눈을 가늘게 뜨며 싱긋 웃지요. 바로 아까 운동장에서 함께 달리던 아이처럼요. 옆에서 함께 달린 아이는 누구였을까요? 이 작품에서 보여 준 것처럼 오카다 준은 언제라도 자신 속의 어린이를 불러내는 듯해요.

열 편의 이야기 중 특히 저는 「지우개 도마뱀」이란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2학년인 사오리는 글쓰기 시간에 일찌감치 글쓰기를 마치고 지우개를 굴리며 놀고 있었어요. 사오리는 지우개가 콩알만 해질 때까지 쓰기 때문에 입학해서 지금까지 지우개를 딱 두 개 밖에 사지 않았죠. 그날 사오리는 글쓰기 시간에 구슬처럼 작아진 지우개를 굴리며 놀고 있었는데 그만 지우개가 굴러 떨어졌어요. 지우개는 책상 밑으로 굴러가서 마루바닥 갈라진 틈으로 쏙 빠져 버렸지요. 순간 사오리는 친구들을 둘러보았어요. 그러자 옆 모둠에 앉은 유키히로가 움찔하죠. 사오리는 유키히로의 입술이 웃는 것처럼 보여서 화가 나요. 자기가 바보 같은 장난을 했다고 비웃는 듯 보였거든요.

그 구멍을 애타게 보고 있는데 구멍에서 도마뱀 한 마리가 튀어나왔어요. 사오리는 마음속으로 도마뱀에게 구멍에 빠진 지우개를 주워달라고 말을 걸었어요. 그러자 도마뱀은 금세 비슷한 지우개를 안고 나타났습니다. 사오리 지우개는 지저분한데 도마뱀이 가져온 지우개는 하얀 지우개였지요. 사오리는 마음속으로 그 지우개가 아니라고 말을 했어요. 그러자 도마뱀은 진짜 사오리의 지우개를 찾아 왔지요. 사오리가 다시 주위를 돌아보자 놀란 토끼 눈을 한 유키히로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유키히로는 허둥지둥 눈을 돌려 딴청을 했지요.

그 모습을 본 사오리는 다시 화가 났어요. 정말 신기한 일이라는 표정을 해주었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면서요. 그래서 원고지 한 켠에 연필로 ‘지금 도마뱀 봤지?’라고 써서 유키히로에게 주었어요. 유키히로는 고개를 가로저었지요. 사오리는 유키히로가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면서 도마뱀이 준 흰 지우개로 원고지 구석의 글자를 지웁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물음표만 지워지고 ‘지금 도마뱀을 봤지’라는 글자는 안 지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사오리가 자기 지우개로 지우니 글자가 지워졌어요. 사오리는 늘 자기에게 말 한 번 제대로 걸어 주지 않는 유키히로에게 다시 쪽지를 보냅니다. ‘그런 유키히로는 좋아하지 않아’라고요. 하지만 쓰고 보니 조금 미안해져서 도마뱀이 준 흰 지우개로 글을 지웁니다.

그런데 ‘하지 않아’만 지워지고 ‘그런 유키히로는 좋아’라는 글자는 그대로 있는 거예요. 사오리는 글이 끝부분만 지워지는 것인가 싶어서 다시 글을 써봅니다. ‘유키히로를 싫어한다’고요. 그리고 도마뱀이 준 흰 지우개로 글자를 지워 보는 거죠. 그러자 ‘싫어’라는 글자만 지워져요. 그제야 사오리는 종이에 쓴 글자가 거짓이면 지워지고 정말이면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오리는 붉어진 얼굴로 ‘유키히로는 나를 좋아한다’고 써봅니다. 흰 지우개로도 그 글자는 지워질 리 있나요. 둘이 좋아하는데 말이죠. 자기 둘만 모를 뿐이죠. 그때 종이 울립니다. 아이들이 모두 교실을 빠져 나간 뒤에도 사오리와 유키히로는 교실에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둘의 실수로 도마뱀이 준 하얀 지우개는 원래 있던 구멍으로 굴러 떨어져 버립니다.


이 이야기는 한 시간 동안 일어난 이야기예요 등장인물도 셋이고 게다가 도마뱀은 대사 한 마디 없고 유키히로라는 남자애도 마지막 단락에서야 두어 마디를 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소품으로 등장하는 물건은 고작 때 묻은 구슬만 한 지우개 한 개와 하얀 지우개 한 개가 전부인 셈이죠. 『신기한 시간표』 속의 이야기들은 이렇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로 새로운 것을 깨달아가게 합니다. 그저 우연히 만난 듯한 어떤 것들과 놀다가 자신을 알아가죠. 자기가 그 남자애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사오리는 자꾸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유키히로에게 짜증 내는 자신이 사실은 유키히로를 좋아했었다는 것을, 유키히로가 사오리에게 말을 붙이기 힘들었던 이유가 사실 사오리를 좋아해서였다는 걸 알게 되는 거죠.

이야기 속 아이들은 하루 온종일 이런저런 흔한 일들을 겪으며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합니다. 공을 찾으러 갔다가 마법사 할아버지를 만나고 고양이와 타일 놀이를 하다가 자신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지우개를 잃었다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걸 알게 되고요. 『신기한 시간표』를 통해 나는 매일 일어나는 사건과 만남이 사실은 도처에서 내 자신이 내게 거는 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교실에 갑자기 찾아온 이상한 할머니, 복도에서 만난 생쥐나 고양이, 운동장에서 함께 논 낯선 아이, 어쩐지 나를 자꾸 화나게 하는 어떤 존재들에게 사실 그런 비밀이 있는 거죠. 오늘의 내 처지에서 내가 들을 수 있는 속삭임이 무언가를 생각해봅니다.

정말 확실한 건요. 상상은 이렇게 콩알만 한 지우개 한 개나 작은 치즈 세 덩어리 같은 것들에서 더 힘세게 시작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작은 것에서 시작되어야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빠져들 수 있으니까요. 오카다 준이 알고 있던 그 비밀을 저도 이제 알게 되었고 여러 분도 알게 된 셈이네요. 그러면 이제 그 콩알만큼 작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기로 해요. 매일 틈틈이 아주 흔하고 별 것 아닌 공간에서요. 그러면 우린 별다를 것 없는 오늘 하루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들을 듣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저는 당장 몽당연필로 변신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보고 재미 없으면 쥐며느리로 변신할 거예요.
송미경 | 2008년 웅진주니어 문학상을 받으며 동화 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학교 가기 싫은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일기 먹는 일기장』 『복수의 여신』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광인 수술 보고서』 『돌 씹어 먹는 아이』 『바느질 소녀』가 있고 『어떤 아이가』로 제54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경기도 고양시에서 세 아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