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07월 통권 제1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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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세상 이야기]
실학 시대의 유산 - 수원 화성

김연희 | 2015년 07월

정조 임금이 나라를 다스릴 때 조선의 유교 문화는 절정에 달했어요. 세상을 다르게 보는 일도 자연스러워졌고, 이를 나쁘게 보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방법도 개발되었지요. 그 앞에는 정조 임금이 있었어요. 정조 임금은 그 자신이 꽤 빼어난 유학자이기도 했기에 청나라에서 들어오는 여러 문물들에 껴묻어 들어왔던 서학, 즉 기독교에 대처할 방법을 마련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요. 정학, 즉 성리학의 탁월한 이론으로 기독교의 허황됨을 다스릴 수 있다고 여긴 거예요. 그런 만큼 서양 문물에 관대했지요. 정약용이나 박지원, 박제가와 같이 훌륭한 학자들이 정조 임금의 치하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자신감에 의한 것이지요.

정조 임금은 서양 문물의 효과에 관한 통찰력도 있었어요. 정조 임금은 자신이 계획했던 일에 서양 방식이 꽤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게 뭐냐고요? 바로 ‘화성’ 건축입니다.

화성 건축, 효심으로 원혼을 달래다

잘 알려졌다시피 정조의 아버지이자 뒤주에 갇혀 돌아가신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에 있는 화산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 화산은 수원의 주산이어서 묘를 이곳으로 옮기려면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이주시켜야 했지요. 그래서 만들어진 곳이 바로 이 팔달산 아래 있는 화성입니다.

정조 임금은 아버지 묘소와 깊은 관련이 있는 만큼 제대로, 그리고 그곳 사람들이 먹고 살 걱정 없게 화성을 잘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것저것을 깊이 생각해서 만든 만큼 도시의 장치들이 빼어납니다.

화성 사람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해서는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국영 농장을 만들어 농사지을 땅을 잃은 백성들을 이곳에 오게 하여 농사를 짓게 했대요. 이들이 지을 농토에 물을 대기 위해 성 밖에 저수지를 만들기도 했어요. 이 저수지는 ‘만석거(萬石渠)’라고 불리었는데, ‘10년을 기다려 만석(萬石)을 거두는 이익이 있다면 성을 지키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뜻이랍니다. 물 걱정 없이 나라의 땅에서 농사를 짓게 된 농민들은 수확량의 30%만을 세금으로 냈다고 해요. 당시 수확량의 50%만 가져가도 인심 좋다느니 참 좋은 사람이니 하는 칭찬을 받았는데, 그것보다 훨씬 적은 양만 내게 되니 이 국영 농장에서 농사를 짓게 된 사람들은 행복했을 겁니다.

단지 농사만 신경 쓴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도시는 상업도 많이 고려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먼저 도시가 만들어진 터가 그렇습니다. 화성은 산으로 둘러싸인 수원과는 달리 팔달산을 제외하고는 툭 트여 있었어요. 서울로 가는 길목에 말이지요. 사람들이 쉽게 오고 갈 수 있었고, 교통의 요충지로 발전할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었어요. 그 영향으로 상업이 발달하게 되는 거고요.

옛 성들이 산으로 둘러싸였던 것과는 달리 평지에 떡 하니 위치하였기에 화성은 전통적 조선의 성이 아니라고 하지요. 오히려 요즘 도시와 비슷하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도로를 내는 방법도 전통과는 많이 다릅니다. 관청이나 궁궐이 모든 길의 시작점이 되어 정(丁)자 모양을 만드는 것이 전통이라면 화성은 관청을 중심으로 십(十)자형을 택했어요. 교차점마다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 것이지요. 이 화성을 만들면서 음양오행이니 풍수니 하는 전통적 생각은 모두 지워 버렸어요.

오직 아버지의 묘소를 옮기면서 생길지도 모를 나쁜 말들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아주 세심하게 배려했지요. 사람들이 살기 편해지면 아버지의 묘역을 옮긴 일이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러면 사도세자도 마음 편히 영면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을 겁니다.

정약용, 화성 건축을 지휘하다

새로운 도시를 만들고 또 왕이 머물 행궁을 짓는 일은 보통 큰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공사 기간이 28개월밖에 걸리지 않았지요. 돌로 성벽을 쌓고 저수지를 파고 새 물길을 내고 도로를 만들고 궁을 짓고 사람들이 살 집을 만들고 하는 일을 28개월만에 끝냈습니다. 그것은 화성 건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입니다. 정조 임금이 효심에 호소한 것만큼이나 반대자들의 논리 역시 유교에 토대를 두고 있지요. 나라에서 이런 “성을 쌓는 일과 같은 토목 일, 궁 짓는 일 등을 많이 하게 되면 백성들이 시간을 많이 뺏겨 먹고 살 일을 못하게 된다”는 것이고 “서울 밖에 도시를 세울 나랏돈이 어디 있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화성 건축을 반대했던 가장 큰 이유는 화성으로 수도를 옮겨 버리거나 하다못해 상업 중심을 화성으로 옮기면 자신들의 중요 재정 기반인 종로 상권이 망가질까 싶어서였지요. 그들의 반대를 무마하는 것은 빨리 이 일을 끝내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화성 건축을 빨리 끝내도록 총지휘한 사람이 정약용입니다. 그는 정조 임금에게서 책 한 권을 받았는데 바로 『기기도설』이라는 것입니다. 『기기도설』은 청나라에서 만든 책인데, 서양에서 사용하는 여러 기계들이 그려져 있지요. 그 가운데 정약용은 거중기와 더불어 유형거를 개발했습니다.

유형거의 정확한 작동 원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통나무 바퀴를 썼던 전통의 수레를 개량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바퀴 크기를 줄이고 정(井) 모양의 강한 바퀴살을 넣어 수레를 지지하게 했어요. 바퀴 크기를 줄인 이유는 짐을 쉽게 싣기 위해서였지요. 또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복토’라는 장치를 만들어 비탈진 길에서 수레가 수평을 유지하도록 했어요. 싣고 나르기 편하게 말이지요.

유명한 거중기는 움직도르래의 원리를 녹로 원리에 적용한 거예요. 녹로는 하나짜리 도르래로 물건을 들어 올리는 것인데요. 거중기는 물건의 무게를 여러 개의 도르래로 나누어 사람의 힘이 적게 들어갈 수 있도록 한 거지요.

유형거는 11대가 만들어졌고, 거중기는 1대만 만들어졌어요. 거중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줄, 예를 들면 화성 높이를 4미터로 치면 32미터의 줄이 필요하고 이를 감는다고 생각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그만큼 효과가 있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사실 거중기는 한 군데 세워놓고 써야 해요.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해체했다가 다시 조립하기가 쉽지 않은 구조이기도 하지요. 좀 복잡하거든요. 거중기보다는 녹로처럼 간단한 구조의 도르래로 물건을 끌어올렸을 가능성이 더 크지요. 여기서 말하는 물건이라는 것이 대부분 성을 쌓기 위한 돌이라는 것은 아시지요?

건축 기간을 줄이기 위해 정약용이 사용한 방법은 바로 벽돌을 건축 현장 가까이서 구웠다는 겁니다. 돌도 건축 현장 가까운 산에서 채취했고요. 중요한 것은 이 건축 자재들을 가져오면 바로바로 돈을 지불했다는 겁니다. 미루었다가 한꺼번에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바로 돈을 주면, 사람들이 신이 나서 또 가져오겠지요?

성을 지키기 위한 장치들

화성이 유명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바로 곳곳에 숨겨져 있는 성 방어 장치들입니다. 화성이 평평한 터에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는 했지요? 그런 만큼 외적들이 쳐들어왔을 때 난리를 피해 숨어들어갈 산이 없어 불안하지요. 따라서 평지에 만드는 성은 수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지요. 화성에도 적지 않은, 아니 꽤 많은, 적의 공격을 막는 장치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전쟁의 양상이 화포를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반영한 것들입니다.

암문 : 사람이나 가축이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문. 전시에 성이 포위당했을 때 외부와의 교통을 유지하기 위해 비밀리에 사용할 수 있게 만든 문이며 총 5개의 암문이 있다. 또한 각각의 암문은 위치에 따라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도록 만들거나, 성벽이 어긋나는 곳에 암문의 출입구를 만들어 밖에서 성문을 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공심돈 : 일종의 망루와 같은 것으로 중앙부는 빈 공간으로 되어 있어 병사들이 들어갈 수 있다. 외부 벽체에는 구멍을 뚫어 바깥의 동정을 엿볼 수 있다. 화포와 총 등을 발사하였다. 이는 중국의 축성 기술이 도입된 것으로 각각의 위치에 따라서 기능을 달리하였다. 예를 들어 서북공심돈의 경우에는 사면에 판문을 설치하였고, 동북공심돈의 경우에는 온돌방을 만들어 군사들이 숙직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남북공심돈의 경우는 현재 미복원이다.

포루 : 치성 위에 건물을 세우고, 화포를 설치하여 적을 공격하도록 한 시설물이다.(치성은 성벽에서 튀어나온 부분으로 성벽 가까이 붙은 적을 제거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화포의 공격에 성벽이 한꺼번에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둑의 역할도 하였다고 한다.) 북동포루와 북서포루 부분의 성벽 내측은 우진각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병사가 창을 가지고 들어오기 때문에 창이 지붕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라고 한다.

봉돈 : 봉화로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시설이다. 평지에 만들어져서 높은 산 위에 만들어진 봉화보다 편리하다. 이전의 산꼭대기의 봉화가 태업 등의 이유로 제 기능을 못했던 것에 대한 대책이라고 할 수 있다.

용포루 : 이는 팔달산 위쪽의 본 성벽에서 솟아나온 꼬리와 같은 형태의 성벽이다. 화성의 설계 당시 팔달산을 일부만 덮고 이 용포루가 없는 형태로 설계되었는데, 그 지역에서의 적군이 성벽 안쪽을 공격할 경우를 대비하여 추가로 건축되었다고 한다.

- 본문에 사용한 사진들은 문화재청 공공누리 자료를 사용하였습니다.
김연희 | 서울대학교에서 한국과학사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서울대학교 연구교수로 있습니다. 한국 역사 속에서의 자연 이해와 자연 이용 기술에 관심이 많습니다. 서양 과학과 우리 전통 과학이 만났을 때의 이해 방식에 관해 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 『창덕궁에서 만나는 우리 과학』과 『강은 어떻게 흘러가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