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05월 통권 제1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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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고릴라 아저씨의 제멋대로 그림책 읽기]
담백하지만 울림 있는 그림, 수묵화

김중석 | 2015년 05월

그림책 작가들이 글을 받아서 그림을 그리거나 아니면 자신이 글과 그림을 모두 소화하는 경우나 결국 그림을 그리게 될 때는 글과 어울리는 채색 방법은 무엇일까? 어떤 기법으로 그림을 그려야 이야기를 더 돋보이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이야기에 맑은 톤이 필요할 때와 강렬한 그림이 필요할 때는 전혀 다른 재료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기법에 대해 다양하게 고민하다가 작가들이 선택하는 기법 중 하나가 수묵 담채화이다. 수묵화는 색상이 회색 톤과 검은색이어서 어린이 책에 맞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먹의 농담으로 이루어 내는 풍부한 깊이는 다른 재료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그림책 언어로 사용되기 충분하다. 인공 조미료에 지친 미각을 살려 주는 천연의 맛처럼 수묵화로 그린 그림은 담백하고 절제되어 있어서 눈의 피로를 잠시나마 잊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오늘은 수묵 담채화로 그린 그림책을 찾아보기로 한다. 수묵 담채화는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이기는 하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공부했기 때문에 동양화라고는 전공 선택 시간에 해본 사군자가 전부다. 하지만 먹의 느낌을 좋아해서 가끔 작업에 활용해 보기도 했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재료의 차이가 있지만 그보다는 그림을 대하는 태도에도 차이가 있다. 수묵화에서 보여지는 평면적인 느낌이나 여백과 공간을 중요시하는 태도는 서양화의 입체적인 접근법하고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서양의 미술이 인간과 내면을 중시하고 객관적인 시선을 중요시한 반면 동양의 미술은 자연과 하나되는 인간, 그리고 주관적인 시선을 더 중요시한다. 또한 서양 미술은 입체를 동양 미술은 평면성을 중요시한다. 이런 동양화의 ‘평면성’이 그림책과 만나서 좋은 결과물이 나올 때가 있다.

이명애의 『플라스틱 섬』은 수묵화의 장점을 극대화시킨 작품이다. 표지를 보니 연한 베이지색 바탕에 검은 새 한 마리가 멀리 섬들을 바라보고 있다. ‘플라스틱 섬’이라고? 도대체 어떤 섬일까? 첫 장면을 살펴본다. “나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에 살고 있어요.” 라는 글과 함께 수많은 집들이 몰려 있다. 먹의 다양한 농담과 재미있는 선으로 도시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도시에서 조금씩 나오는 쓰레기들은 바다로 계속 흘러 들어가게 된다. 이 쓰레기들을 새나 동물들이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들의 몸에 도시의 쓰레기들이 쌓이게 된다. 이런 쓰레기들이 많아질수록 물고기들은 점점 사라진다. 사람들이 가끔씩 몰려와서 치우기는 하지만 소용없다. 이제 이곳은 바다 한가운데에 새로 생겨난 플라스틱 섬이다. 중간쯤에 여러 동물들이 도시의 쓰레기에 호기심을 가지는 장면과 그 뒤의 몇 장면은 마음 짠해지는 감정 이입이 생긴다. 먹의 회색이 이토록 깊은 울림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이 책은 잔잔한 글과 멋진 그림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책이다. 조금씩 사용되는 원색의 쓰레기와 먹선으로 표현되는 풍부한 농담은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해 주는 것 같다.

유주연의 『어느 날』을 펼쳐 본다. 옅은 갈색의 바탕에 굵은 붓 터치가 더해진 표지 그림이 눈에 띈다. 이 그림만 보고 있어도 먹의 향이 코끝으로 전해지는 것 같다. 이 터치도 몇 개의 톤을 가지고 있어서 결코 단순하지 않고 풍부한 색감이 있다. 이런 것이 수묵화의 맛일 것이다. 제목 옆을 보면 붉은 새의 모습이 보인다. 붉은 새는 전각으로 새긴 그림이라고 한다. 이 새의 여정을 따라가 보자.

“어느 날은 넓은 하늘 만나고 싶은 날. 새로운 게 없을까? 저 너머 보이는 곳으로” 이런 문장으로 시작된다. 붉은 새는 오른쪽 방향으로 계속 여정을 떠난다. 뭐 새로운 게 없을까를 고민(?)하면서. 도시의 평범한 집들이 보이고, 마을도 보이고, 도시가 보인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그저 매일 지나쳤을 낯익은 풍경들이 먹의 향기로 다시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풍경들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가 아는 도시의 풍경들은 직선의 모음이다. 빌딩, 크레인, 전봇대 같은 풍경들이다. 이런 풍경들을 먹물로 멋들어지게 그려낸 모습이 인상적이다. 직선은 자유로운 곡선이 되고 넓은 터치로 그어진 면이 되기도 한다. 또한 이런 풍경들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은 것이 이 그림책의 매력이다. 집도 지붕을 붓 터치 한 번으로 간단하게 그려냈다. 공중에 떠있는 전선도 가는 선으로 날렵하게 그려냈다. 이 붉은 새의 일상을 따라가면서 보는 풍경의 모습만으로도 이 책은 매력 넘치는 그림책인 것 같다.

서세옥의 『즐거운 비』는 조금 특이한 그림책이다. 이 책은 원로 화가 서세옥의 작품에 글을 입혀 만든 책이다. 표지에도 ‘서세옥 화백 먹물 그림책’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 책은 사람들의 모습을 추상적으로, 단순한 먹물의 느낌으로 그려왔던 서세옥의 그림들을 이리저리 순서를 만들고 이미지를 보며 상상하면서 김향수 작가가 글을 입힌 그림책이다. 그림의 이미지만을 보면서 글을 지어낸 것이 쉬운 작업은 아니었을 것인데 그림과 잘 어우러져 멋진 그림책이 되었다.

툭툭 찍은 몇 개의 점들과 길게 뻗은 긴 선 같은 추상적인 이미지들이 자연스럽게 리듬을 가지고 있다. 먹물이 번져나가며 간단한 몇 개의 선만으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송사리가 되기도 하고 개구리가 되기도 한다. 추상화된 선들은 그냥 보았을 때는 점이고 선이지만 몇 개가 모이면서 구체적인 형태가 연상되는 이미지로 보인다. 텅 비운 공간조차도 그냥 빈 공간이 아니라 선들과 밀당을 하면서 팽팽한 긴장감을 가진다. 이런 여백이 지니는 아름다움이 수묵화의 깊은 매력이 아닐까? 이런 그림책이 다양하게 나와도 재미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권문희의 『줄줄이 꿴 호랑이』는 수묵화의 전통에 현대적인 익살스러움과 재치가 더해진 그림책이다. 표지를 보니 큰 호랑이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왼쪽에는 누런 강아지 한 마리가 ‘어쩔래’ 하는 표정으로 빤히 보고 있다.

옛날에 게으른 아이가 살고 있었다. 어찌나 게으른지 도통 일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맨날 방에만 누워 있다. 게으른 아이에게는 언제나 잔소리하는 엄마가 있기 마련이다. 오늘도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아이는 귀찮은 듯이 겨우겨우 괭이 하나를 받아다가 구덩이를 판다. 이곳에 온 동네 똥을 모아서 참깨나무를 심고 이 나무에서 참기름을 가득 생산한다. 이 참기름을 강아지의 몸에 잔뜩 바르니 온 산에 살고 있는 호랑이가 모두 몰려온다. 호랑이들이 강아지를 잡으려고 하면 강아지는 호랑이를 관통(?)해서 한 마리 한 마리 호랑이들을 모두 줄줄이 꿴다는 내용이다.

현실감은 없지만 유머가 넘치는 책이다. 이 책은 곳곳에 작가의 유머가 숨어 있다. 때론 만화 같이 말풍선을 이용하여 재미있는 대사들로 구석구석을 채워 놓아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하고 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살려내는 것이 자유롭고 활달한 먹선일 것이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슬슬 그린 듯한 먹선이 때론 비실비실 하다가 어떨 때는 나무라듯 강하게 소리치는 것 같다.

이 책의 판형은 가로로 긴 판형이다. 처음에는 조금 의아하다가 본문을 살펴보면 긴 판형의 맛을 절묘하게 살린 몇 장면이 정말 통쾌하다. 특히 어머니가 괭이를 가져다주며 땅을 파라고 하는 장면에서 가운데 집을 두고 왼쪽과 오른쪽의 시간이 경과한 것을 표현한 것을 보면 작가의 재치가 돋보인다. 집을 간단하게 표현했지만 지붕 쪽에 간단한 채색만으로도 시간의 경과를 표현하고 있다.

김세현의 『준치 가시』를 읽어 본다. 이 그림책은 백석의 시에 김세현 작가가 그림을 그려 만든 그림책이다. 얼마 전에 완간된 ‘우리시그림책’ 시리즈 중의 한 권이다. 준치라는 물고기가 있다. 준치는 옛날에 가시가 없는 물고기였다. 준치는 다른 물고기들의 가시가 부러웠다. 어느 날 준치는 다른 물고기들에게 가시를 얻기로 한다. 하지만 자꾸 가시를 주려는 큰 물고기들 때문에 곤란하다. 도망가는 준치에게 다른 물고기들은 자꾸 가시를 달아 준다. 이 많은 가시들 때문에 준치는 가시 많은 물고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김세현 작가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만든 책이라고 한다. 어떤 독자들은 그림 몇 개 들어가는 그림책을 몇 년씩 걸려 만든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결과로 나온 그림은 간단해 보이지만 이 그림이 나오기까지 작가는 이리 그려 보고 저리 그리며 담금질해가면서 책을 완성해간다. 이 책의 뒤를 살펴보니 김세현 작가는 ‘우리 전통 민화의 질박하고 싱싱한 멋’을 담아내려 했다고 한다. 그림들을 자세히 보면 붉은색의 낙관 같은 것이 보인다. 물고기를 낙관으로 만든 것인데 물고기의 모양이 조금씩 변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붉은 낙관 때문인지 이 그림책은 장면 장면이 하나의 동양화 작품을 보는 것처럼 읽혀진다. 자연스러운 붓놀림과 먹, 그리고 색채가 잘 어우러진 책이다.

김우선의 『엄마』도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이 정확히 먹물로 그려진 그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경쾌한 선과 여백이 기분을 좋게 만드는 그림책이다. 표지를 보면 어린아이가 일어나자마자 “엄마~~”를 부르고 있다. 아이는 엄마를 발견하고는 펄쩍 뛰어가서 엄마 품에 ‘와락’ 안긴다. 엄마와 뽀뽀를 연발한다. 샤워하다가 거품이 눈을 가려도, 놀이터에서 놀다가 커다란 개가 나타나도, 무서운 꿈을 꾸다가도 “엄마”하고 부르면 엄마는 슈퍼우먼처럼 나타나서 아이의 어려움을 해결해준다. 이 책은 복잡한 상황 묘사도 배경도 생략해서 시원스럽게 읽혀진다. 검은 먹선과 몇 가지의 색만 사용해서 인물에 더 주목하게 된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현재의 모습이 너무 이쁘고 귀여워서 이대로 멈추면 안 될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필요할 때마다 엄마를 찾는 아이의 모습이 정말 귀엽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렇게 계속 엄마를 찾는다면 ‘마마보이’라고 불리겠지만….

우리 그림책 중에 수묵 담채화로 그린 그림책을 살펴보았다. 그림책 작가들이 자신의 표현 도구로 선택한 수묵 담채화는 기존에 보던 그림책과는 좀 다른 느낌이 있다. 색은 절제되었지만 먹의 농담을 통해서 더 많은 색채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여기에 언급된 책들을 차분히 읽으며 우리 차를 한 잔 마셔 보는 것은 어떨까?
김중석 | 대학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미술교육을 공부했습니다. 2003년 보림 창작그림책 공모전에서 우수상과 2013년 소년한국 우수도서상 일러스트레이션 부분상을 받았습니다. 『아빠가 보고 싶어』를 쓰고 그렸고 『나는 백치다』 『찐찐군과 두빵두』 『웨이싸이드학교 별난 아이들』 『엄마 사용법』 등 여러 동화책과 그림책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요즈음은 ‘드로잉 그림책 학교’에서 학생들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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