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통권 제1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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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책 만드는 이야기]
시가 그림책으로 태어나다

고선아 | 2014년 11월

시와 그림책, 결합 가능할까

시 그림책은 언어와 이미지의 결합이다. 시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 주는 것 같다. 하나의 시에서도 다양한 해석을 통해 여러 모양새의 그림책이 나올 수 있다. 작업을 하면서 하나의 시어가 물꼬가 되어 이를 통해 시야가 확대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마치 시가 주는 선물과 같다. 달리 사무실을 차린 후에 그림책을 만들게 되기까지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림책 만드는 일은 벅차고 힘들지만 행복한 일이다.

‘우리시그림책’ 시리즈는 달리의 첫 번째 기획이었다. 이 시리즈를 기획한 것은 1999년도였는데 그때 우리는 그림책을 서너 권밖에 만들어 보지 못한 집단이었다. 당시에 우리는 동시의 즐거움에 흠뻑 빠져 있었는데, 아이들이 시를 읽거나 접할 수 있는 통로가 없다는 점에서 시를 그림책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시에는 이야기에 견줄 수 없는 상징과 비약의 언어가 담겨 있었고, 세상을 만나는 색다른 접근 방식이 되어 주었다. 우리에게는 이 세계가 아주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왔고, 자연스럽게 그림책과 동시 두 세계를 연결하는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때 운 좋게도 작지만 아주 소중한 힌트를 얻게 되었다. 모리스 센닥이나 랜돌프 칼데콧, 찰스 키핑도 시나 전래동요를 가지고 그림책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시로 그림책을 만들겠다고 생각하게 된 배경이다. 그때의 생각은 ‘시와 같은 방식으로 아이들과 그림책을 나누고 싶다.’ 또는 ‘시가 드러내는 멋진 세계를 그림책 속에 담고 싶다.’ 또는 ‘시에는 놓치지 말아야 할 무엇이 있다.’ 정도였던 것 같다.

여기에 더해 우리 시에는 민족이 가진 미의 가치가 논리나 당위가 아닌 가슴의 울림으로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비록 일천하나마 역사의식, 민족의식에서 비롯된 생각인데, 우리 민족이 남긴 전통을 그나마 이해하고 계승할 수 있는 존재가 우리 세대라는 자각 때문이기도 했다.

시가 그림책이 될 수 있는 이유, 시를 그림책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

그로부터 일 년간 우리는 한국 시문학의 역사, 시 이론서, 작가론들을 나름대로 꼼꼼히 공부하기 시작했고 검토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시를 수집했다. 시인, 문학 연구자, 어린이 문학 평론가, 그림책 기획자, 편집자들을 무작정 만나러 다녔고, 그 과정에서 그림책 텍스트로 삼을 시를 뽑는 몇 가지 기준을 세울 수 있었다.

예컨대 문학적 가치가 있는가, 그 시대의 삶과 가치를 충실히 반영하는가, 그림책으로 재창조 가능한가, 그림을 펼칠 독자적인 공간이 있는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모아졌을 때 그림책으로 자기 완결성과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등등이 기준으로 제시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시가 그림책이 될 수 있는 이유, 시를 그림책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정리했다.

총 42편의 시를 뽑고 작가를 선정했다. 출판사와 간단한 구두 계약을 맺고, 그림 작가들에게 후보 시가 담긴 기획서를 작성하여 대대적인 설명회를 준비했다. 설명회를 준비하면서 우리는 고작 서너 명의 작가가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20여 명에 달하는 유명 작가들이 몰려왔다. 설명회에 모인 작가들은 엄청난 질문공세를 했다.

그 후 우리는 우리 역량의 부족함 때문에 도중에 작업을 포기하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준 것은 작가들이었고, 지금까지의 작품을 통해 우리를 교육시키고 가르쳐 준 것도 작가였다. 작가들에게 40여 편의 모든 시를 보여주고 작가 스스로 작업할 시를 선택하도록 했다. 우리는 시가 작가에게 말을 걸거나 작가가 시에게 말을 걸 수 있을 때에야 작업이 시작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3년부터 ‘우리시그림책’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우리 시가 가진 매력과 마력

다소 민족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민족의 아름답고 건강한 생활을 익혀야 한다. 그것도 머리가 아닌 감성과 감흥으로. 우리 시에는 민족 고유의 정서와 운율과 박자가 있고 은유와 상징과 함축이 있다. 절제된 언어이기에 더 넓고 깊은 행간이 존재한다.

이 행간이 그림책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에는 그림 작가를 불러들이는 강한 매력이 있으며, 나아가 그림 작가를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이 시가 그림책이 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지점이었다고 본다.

우리의 기획 과정은 깊은 연애에 빠져 보낸 시간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 권의 시 그림책은 보통 일 년 가량의 시간에 걸쳐 9회 이상의 더미, 2회 이상의 취재, 20여 권에 이르는 자료 검토, 그리고 30여 회에 달하는 작업 회의, 연령별 독자 모니터링 등등을 통해 만들어졌다. 작가가 한 편의 시로 완성된 원고를 만드는 데에 최소 일 년, 그 후 디자인과 제작에 3개월 남짓 더 걸렸다.

예민하고 기꺼운 연애

시리즈의 첫 번째 권인 『시리동동 거미동동』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이 책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작업이다.

첫 작업이기도 하거니와 시 그림책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을 시작하게 된 시점이기도 하고, 작가를 배우기 시작한 계기가 된 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전래동요를 가지고 만든 그림책이다. 처음부터 구전되어 온 전래동요의 성격을 어떻게 살려내는가 하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권윤덕 작가는 우리에게 ‘작가는 매우매우 집요한 존재다’, ‘집요함의 결실을 낳는 것이 작가다’ 하는 것을 처음 알게 해 주었다. 이 작가는 그림책의 모든 것, 편집, 디자인, 타이포 등에까지 집요한 연출력으로 일했고 이 작가에 의해서 우리는 그림책에 대한 기본 개념을 수정할 수 있었다.

원래 이 시는 “안녕 삼각, 또 와라 사각”이라는 노래로 시작했는데 작가가 첫 번째 더미를 만들어 놓고 나니 이 노래가 일본에서 건너온 노래일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우리는 울고불고 하고 있던 때에도 권윤덕 작가는 묵묵히 고민을 계속하여 시를 바꾸고 세 가지 다른 방향의 더미를 만들어냈다. 최종적으로 나온 그림책에는 처음의 고민과 사고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세 번째 책인 『넉 점 반』을 만든 이영경 작가는 ‘우리시그림책’ 작업 과정에 대해 그야말로 이영경 작가다운 소감을 밝힌 바 있다.

“내 어린 시절 몇 안 되는 추억 중에 시장통에 있던 참기름 집의 기억이 있다. 깨를 볶아서 참기름을 즉석에서 짜 주었는데 고소한 냄새가 온 시장 바닥을 진동시키고 나면 노란 참기름이 병에 담겼다. 그리고 압착기에 남은 것은 거무죽죽하고 딴딴하게 뭉친 깻묵 덩어리. 동시 한 편을 가지고 그림책을 만든다고 덤비는 일이 꼭 참깨를 가지고 기름 짜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시 한 편이 참깨라고 하면 시 그림책은 뭘까. 기왕이면 깻묵보다는 참기름이 되어라, 하고 욕심을 부린다.”

돌아보면 시 그림책은 한 권 한 권을 만들 때마다 연애하는 기분이었다. 연애할 때 세포마다 예민해지는 것처럼 작가나 시에 대해 예민해지고 새롭게 보였다. 내 방식이 실현되지 않을 때 좌절하기도 했지만 그것 자체도 나에게는 행복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작가들이 시를 통과하고, 시를 통해서만 닿을 수 있는 세계의 문을 열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시 그림책의 핵심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것은 시와 같은 모습일 수도 있고, 시와는 정반대의 것일 수도 있고, 황당할 정도로 상상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시 그림책은 형식이 아닌 내용이며, 나아가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는 통로이다.

이제 ‘우리시그림책’이 『강아지와 염소 새끼』(권정생 시, 김병하 그림)를 내며 15권으로 완간되었다. ‘우리시그림책’은 내로라하는 우리 그림책 작가들이 11년 동안 머리를 맞대 가며 노력한 결과물이다. 작가들이 가장 빛나는 시간에 가장 진실한 노력을 들여 만들어 낸 시리즈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그 시간과 노력을 우리가 함께할 수 있어서 기쁘다. 우리가 시 그림책에서 느꼈던 아름다운 세계를 많은 어린이들이 함께 느끼면 좋겠다.
고선아 |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오늘의 한국 여성신문사’ 취재기자, ‘길을 찾는 사람들’ ‘이다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로 일했습니다. 1999년부터 그림책 기획과 디자인을 하는 ‘달리 크리에이티브’의 문을 열고 사계절의 ‘보아요’ 시리즈, ‘뭐야뭐야 아기 그림책 시리즈’, 창비 ‘우리시그림책’ 시리즈 등의 기획과 디자인을 진행했습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