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08월 통권 제1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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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으로 통하는 세계]
그림책, 이미지로 소통하다

한명희 | 2014년 08월

그림책을 구성하는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미지이다. 이미지 언어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보여주는 방식은 그림책을 다른 책과 구별하는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림책 작가는 그림을 통해 독자와 소통하고, 독자는 그림을 통해 작가가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찾아내고 나름의 해석을 곁들인다. 그림책의 그림이 담고 있는 것은 개인의 삶일 수도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일 수도 있다.
 
그림책 안에는 때로 작가가 있기도 하고, 때로는 작가 없이 독자만 있을 수도 있다. 그림책의 그림도 때로는 주체가 분명히 드러나기도 하고, 전혀 드러나지 않기도 한다. 묘사가 풍부한 그림책이 있는가 하면, 여백을 충분히 살리는 그림책도 있다. 이렇게 그림책의 이미지가 가진 상상력의 구체적 표현과 표현되지 않은 부분에서 발휘되는 또 다른 상상력의 가능성은 그림책이 나이, 국적, 인종을 뛰어넘어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매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딕부르너하우스

많은 어린이에게 어린 시절에 읽었던 그림책 중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중 분명 ‘미피’(Miffy)가 포함될 것이다. 미피는 1955년 네덜란드의 그림책 작가 딕 부르너(Dick Bruna)에 의해 탄생했다. 가족과 함께 집 주변을 뛰어노는 작은 토끼를 발견한 부르너는 토끼를 그리기 시작한다. 일상 속 작은 일화에서 태어난 미피는 출판되자마자 어린이 독자의 엄청난 사랑을 받게 된다. 미피 그림책은 전 세계에서 5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고, 8,500만 부 이상 판매되었을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전 세계의 어린이 팬을 확보한 미피는 애니메이션은 물론 다양한 상품으로도 제작, 유통되었다.


미피가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어느 하나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미피 그림책은 대부분 12페이지 짧은 구성 안에 어린이들의 일상, 심리, 관계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미피의 독자 중 대부분이 글자 언어를 배우고 익히기 전의 유아들이다. 글을 통해 책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미피 그림책은 안성맞춤이다. 글 없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그림책이기 때문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아이들도 미피 그림책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이유, 언어가 달라도 충분히 미피 그림책을 좋아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분명 그림책의 이미지에 있다 할 것이다. 부르너는 미피는 물론 그의 다양한 그림책 시리즈에서도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형체는 단순하고 윤곽은 두껍게 그리는 스타일을 고수한다. 그의 이러한 화법은 어린이 독자는 물론, 지나치면서 그의 그림책을 본 어른들도 미피나 보리스 같은 주인공들을 쉽게 잊을 수 없게 한다. 두꺼운 윤곽과 단순한 형태는 움직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이후의 동작 혹은 보여주지 않는 동작을 상상하게 한다.

미피와 보리스는 표정이 없는 캐릭터로 유명하다. 표정이 없는 대신 얼굴과 몸의 각도, 또는 라인에 의해 주인공의 심리와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미피 그림책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 기쁜 일이 있는 듯 동동 뛰는 모습, 고개를 숙이고 동그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보며 미피에게 쉽게 감정을 이입하곤 한다.

두꺼운 윤곽, 단순한 형태와 더불어 미피 그림책의 이미지가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각인되는 요소는 바로 색상이다. 많은 어른이 아이들에게 밝고 화사한 파스텔 색상을 권하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기호와 무관하게 자신들이 선호하는 색깔을 고른다. 미피를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어른들의 기대와 달리 화사하고 밝은 파스텔보다는 원색에 가깝지만 명도가 낮은 색깔에 더 환호할 수 있는 것이다. 브루너가 그림책에서 주로 쓰는 몇 가지 색, 즉 파랑, 노랑, 짙은 녹색, 주황, 흰색 등은 미피를 상징하는 색이다. 작가 본인이 선호하는 색일지 모르지만, 그러한 색들을 통해 분명 독자인 아이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을 것이다.

미피 그림책에서는 면을 가득 채운 색상이 그대로 이야기의 배경이 되기 때문에 선명한 색깔은 장면에 따라 주인공의 심리를 표현하기도 하고 상황을 암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여러 이미지가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지는 않지만, 두꺼운 윤곽으로 나누어진 면들은 색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 공간이 비어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림책의 공간을 색으로 가득 채우거나 혹은 비우거나를 적절히 사용하여 상황을 설명하고 음률을 표현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다른 묘사 없이 색상으로만 채워져 있거나 하얗게 비어있는 이러한 공간 안에서 독자들, 특히 어린이들의 상상력은 더욱 증폭될 것이다.

이국적인 색상과 화법에도 미피가 네덜란드에서 탄생한 캐릭터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미피를 탄생시킨 딕 부르너가 태어나고 살았던 도시 위트레흐트(Utrecht)에는 시립미술관 분관으로 딕부르너하우스, 일명 미피하우스가 운영되고 있다. 풍부한 색감과 황홀한 붓 터치로 유명한 빈센트반고흐미술관 다음으로 네덜란드를 찾는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미술관이다. 시립미술관의 분관이라지만 시립미술관보다 관람객 수가 훨씬 많다. 딕부르너하우스 전시관에는 전 세계에서 찾아온 많은 관광객을 환영하는 메시지가 다양한 언어로 쓰여 있다.

전시관 한편에 ‘미피, 우리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한국어로도 쓰여 있을 정도로 한국 관광객들에게도 관광 명소이다. 주 전시장에는 말 그대로 미피가 살고 있을 것 같은 작은 오두막집이 설치되어 있다. 아이들은 익숙한 미피 그림책의 상징 색으로 칠해진 집 내부에 설치된 노란 침대와 파란 식탁에 눕거나 앉아본다. 다양한 언어로 번역 출간된 미피의 그림책이 타일처럼 벽을 빼곡하게 메운 작은 방에서는 헤드셋을 쓰고 미피 이야기를 네덜란드어, 영어, 일본어로 들을 수 있다. 미피뿐 아니라 작가 딕 부르너의 일생을 설명하는 전시장도 마련되어 있다.

미피 그림책의 원화와 미피의 변천사, 제작 과정 등을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들은 딕부르너하우스가 상업 시설이 아닌 미술관 또는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입구에서부터 딕 부르너가 미피 그림책의 한 장면을 작업하는 과정을 순서대로 보여주고 있다. 주로 콜라주 기법을 활용하여 이미지를 표현하는 브루너는 색상, 공간, 형태의 다양한 시도를 거쳐 한 장면을 완성한다. 단순한 이미지일수록 작은 표현에도 전달하고자 하는 느낌과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한 장면을 완성하기 위해 수없이 시도되었던 스케치와 다양하게 바꿔 본 화면 배치 등은 완성작 못지않게 작가와 소통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비단 딕부르너하우스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시작부터 완성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그림책 전시가 갖는 가장 큰 매력이자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딕부르너하우스에서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어느 공간에서도 아이들이 재미와 호기심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미피 그림책 중 유령 놀이 이야기는 두꺼운 윤곽으로 표현했던 몸이 천을 뒤집어쓰면서 가려지고 몸의 형태가 없어지자 주변의 친구들에게 유령으로 보이게 되면서 놀이가 시작된다.

이 이야기를 본떠 전시관 한편에는 아이들이 유령놀이를 경험해볼 수 있도록 흰 천이 걸려있다. 또 다른 편에는 옷장이 설치되어 있다. 옷장 속에 걸려 있는 옷들 속에 숨거나 갑자기 나타나는 놀이가 가능한 것이다. 이런 매력 때문에 딕부르너하우스를 방문한 아이들은 미술관이 문을 닫을 시간까지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미국 필라델피아, 제리 핑크니 전시
 
필자가 필라델피아를 방문했던 시기에 우연히도 필라델피아시립미술관 최초로 그림책 원화전이 열렸다. 안내해주던 지인이 “한국의 방문객을 환영하는 뜻인 것 같다”는 농을 건넬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다. 공공미술관, 그것도 한 도시를 대표하는 시립미술관에서 그림책 원화전이 열린다는 것은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흔치 않은 일이다. 그 특별한 전시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 도시 출신 그림책 작가, 제리 핑크니(Jerry Pinkney)였다.

제리 핑크니는 칼데콧상 한 번과 칼데콧영예상을 다섯 번이나 받은, 필라델피아 시민들이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그림책 작가이다. 그는 남부에서 이주해온 흑인들이 모여 살던 필라델피아의 흑인 밀집 지역에서 나고 자랐다. 어린 시절, 그 시기의 많은 흑인이 그랬던 것처럼 핑크니도 가난에 대한 어려움보다 인종에 대한 상처가 깊었다.
 
당시는 흑인이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것은 고사하고 예술 교육을 받는 것조차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특히, 그는 모든 동화와 판타지의 주인공이 백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꿈을 찾는 주인공도, 문제를 해결하는 영웅도 모두 백인이었다. 자신과 같은 소수 인종은 언제나 주변인일 뿐이었다.

이 문제를 자각하게 된 순간부터 핑크니는 흑인 아이들이 읽고 보면서 스스로의 꿈을 키울 수 있는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는 『빨간 모자』 『나이팅게일』 등 고전 동화의 주인공을 흑인으로 그린 것은 물론이고 아프리카 흑인들의 삶,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삶을 담은 그림책을 펴냈다. 그림책 역사에서 소수 인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 데에는 그의 공이 실로 크다 할 것이다.
 
2013년 여름, 필라델피아시립미술관의 ‘목격자: 제리 핑크니의 예술’(Witness: The Art of Jerry Pinkney) 전시 개최를 기념하여 필라델피아시립도서관(Free Library) 로비에서도 제리 핑크니에 관한 전시가 동시에 열렸다. 미술관에서는 원화 등 작품 위주의 전시가, 도서관에서는 그림책 작가로서 제리 핑크니를 설명하는 전시가 있었다. 작가의 삶, 작가로서의 명성, 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에피소드, 창작 과정, 그림의 소재와 재료 등을 독자, 특히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보여주고 있었다.
『사자와 생쥐』 그림책과 그 창작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는 이 책으로 수상했던 칼데콧상 메달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사자와 생쥐』 는 글자 없는 그림책으로, 이솝우화에 관해 수십 년간 자신만의 해석을 찾아 그의 화법으로 표현해내었고, 글자 없이 이미지만으로도 세세하고 강렬하게 이야기를 전개해낸 그의 방식은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목격자’ 전시는 2011년 노먼로크웰미술관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 미국 전역의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전시가 진행 중이다. 그림책 전시의 제목으로는 다소 무거운 감이 없지 않지만, 그가 그림책에 담았던 흑인들의 삶과 역사를 떠올리면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전시의 대부분은 핑크니가 이솝 우화, 안데르센 동화 등 고전을 재해석해 그린 그림책과 흑인의 삶을 담은 그림책의 원화들이다.

원화 외에도 19~20세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삶을 보여주는 회화 작품들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오는 흑인들을 가득 실은 배 안의 풍경, 백인과 흑인이 따로 사용하도록 설치된 화장실 세면대 등 다양한 시대상을 흑인의 관점에서 목격하고 그림으로 진술하고 있다.
 
핑크니는 인물과 배경의 묘사를 통해 그와 같은 흑인들이 살아온 역사와 삶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그림을 살펴보면, 그 색채와 패턴이 독특하다. 이는 그가 살아왔던 흑인 밀집 지역의 배경, 사람들이 입고 있던 옷, 아프리카의 자연을 담은 색 등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핑크니 그림책의 이미지들을 통해 한 시대 흑인들의 삶을 상상할 수 있고, 나아가 현재의 흑인들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핑크니는 그림책을 통해 개인 독자뿐 아니라 온 사회와 소통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명희 | 그림책과 도서관에 파묻혀 여러 해 살았습니다. 지금은 여러 지역 동료들과 함께 ‘그림책 미술관’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키워온 그림책에 관한 관심과 경험들을 앞으로 일 년 동안 『열린어린이』에 정리해 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