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통권 제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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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책 만드는 이야기]
책으로 만나는 세상, 나를 깨우는 바람

최윤정 | 2010년 12월

독자에서 저자, 편집자로

책을 중심에 놓고 보면 인간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독자, 저자 그리고 편집자. 가장 오랫동안 독자였고 그다음으로 오랫동안 저자였던 내가 막 편집자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책이라는, 어쩌면 내게 가장 친숙한 물건이 오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책이 ‘물건’이라는 느낌이 든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그 ‘물건’을 찬찬히 만드는 일이 내게는 가죽으로 가방이나 구두를 만드는 작업처럼 재미있다고 느껴졌다.

명품도 많고 공장에서 세련되게 만들어서 백화점에 진열해놓는 물건들도 즐비하지만, 그런 물건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니는 길거리 어디에 차려진 조그만 공방, 문 열고 들어서면 바깥의 소음과 화려함은 딴 세상 일인 듯 은은하게 번져나는 적막과 집중의 냄새, 그런 공간에서 한 땀 한 땀 손으로 기워서 만든, 투박하지만 멋진 물건. 내가 만든 책이 적어도 내게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 냄새에 취해 있는데 사람들이 물었다. 저자에서 편집자가 된 느낌이 어떠냐고. 지금 생각하니 의미심장한 질문이었을 수 있겠다. 그런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단순하디단순한 대답을 했다. “재미있어요!” 이렇게. 돌아보니 실소가 나오긴 하지만 참 잘 대답한 거 같다.

그렇게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도를 못 읽고 숫자에는 개념이 없는 내가 책 만드는 데 집중하는 일은 비교적 쉬웠다. 걱정은 거의 남들 몫이었고 나는 꼭 필요하고도 새로운 일을 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다. 어디선가 꿈틀대는 게 느껴지는 새 기운을 어떻게 눈에 보이게 만들 것인가에만 골몰했다. 그렇게 신인을 개발하겠다고 나서고, 청소년 소설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을 때 누구도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 같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런 생각으로는 출판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말들에 내가 그다지 마음을 두지 않았던 것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보다는 왜 안 되는지를 가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책은 어디에 가야 살 수 있냐고

과연 책을 만들고 나니 어렵긴 어려웠다. 디자인, 제작까지도 다 마음에 들게 해서 만들었는데 손에 들고 있는 책을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이미 넘쳐나는 출판사들 때문에 골치가 아픈 서점들은 그 이름도 이상한 ‘바람의아이들’과 거래를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첫 책인 『64의 비밀』이 몇몇 일간지에 메인으로 소개가 되었고 우리는 이런 전화를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그 책은 어디에 가야 살 수 있는 건가요!”

일이 이렇게 되자 문턱 높은 대형 서점들이 우리 책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새내기 출판사에서 이름도 한 번 들어 본 적이 없는 작가들이 책을 내는데, 독자들의 호응도 좋고 꾸준히 좋은 책으로 선정되자 “아직도 안 망했냐”고 애정 어린 관심을 보여 주던 사람들이 “잘 되지? 잘 된다더라, 잘 돼서 다행이다”라고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런 인사들을 들으면서 ‘한국 어린이 청소년 문학의 새 물꼬를 터나갈 신인들을 꾸준히 발굴하고 육성한다’는 결의에 찼던 각오를 돌아보니 내가 참 황당한 일을 벌인 것 같기는 하다.

불과 7년 전 일이지만, 다방면에서 무서운 속도로 모든 게 변하는 한국 사회의 어린이 문학 동네도 그동안 참 많이 변했다. 그때는 신인개발 같은 위험부담이 있는 일을 하는 출판사가 없었지만 지금은 안 하는 출판사가 없다. 청소년 책은 대학입시 때문에 인문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게 당시 통념이었지만 지금은 청소년 소설에 대한 열기가 뜨겁다. 거액의 상금을 내걸고 원고를 찾는 출판사들의 목적은 하나같이 신인발굴이다.

한동안 참 난감하고 허탈했다. 이런 상황은 ‘책으로 만나는 세상, 나를 깨우는 바람’과도 같은 책을 한 권 한 권 만들어 나가려는 바람의아이들에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 아직도 새내기 출판사인 바람의아이들이 그렇다고 책 만드는 일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국내 작가 작품의 비율이 외국 작품 비율보다 많게 하겠다는 결심을 일시적으로 깨뜨렸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외국작가들도 신인이거나 우리나라에는 처음으로 소개가 되는 작가들이 우리와 인연이 닿았다. 그 이름만으로도 경쟁력이 있는 작가들의 책은 검토할 기회조차 오지 않았지만 그런 현실과는 별개로 나는 익숙한 것들보다 새로운 것들에 흥미가 당겼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그렇게 해서 펴낸 책들이 『닭들이 이상해』, 『파리의 휴가』, 『알래스카를 찾아서』 등의 외서였다. 그리고 수지 모건스턴 작가의 방한에 맞춰서 여러 가지 행사를 기획하며 이 프랑스의 베스트셀러 작가와 우리나라 작가들과의 진솔한 대화의 기회도 마련하고, 온·오프라인을 통한 독자들과의 소통에도 진지한 노력을 기울였다. 답이 안 나오는 문제는 잠시 잊고 그렇게 1,2년을 보내는 동안 에너지는 재충전이 되고 새로운 믿음과 열정이 찾아와 주었다. 원점을 돌아보고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상식적으로 하기로 했다. 부대끼던 마음을 그렇게 돌리고 나자 이상하게도 어디선가 좋은 기운들이 전해져 왔다. 마치 산들바람이 불듯이 우연히 그렇게. 괜찮은 원고를 보내오는 작가들 그리고 꾸준히 바람의아이들을 응원하는 독자들이 자꾸 말을 걸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 기운으로 다시 또 신 나게 책을 만들고 있다.

가장 최근에 만든 책이 『가족입니까』이다. 네 명의 작가가 각기 다른 목소리로 가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이 작품은 특이한 방식으로 쓰여진 작품집이다. 네 개의 작품 속에서 인물들은 중첩되고 하나의 모티브가 네 개의 이야기를 관통한다. 서로 전혀 상관이 없는 네 인물이 모여 한 가족의 구성원을 연기하면서 휴대폰 광고를 찍는다는 설정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은 가족이라는 평범한 테마를 새로운 이야기 방식으로 풀어 나간다. 다소 복잡한 구성의 이 작품을 네 사람의 작가가 함께 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황당한 아이디어들을 안주 삼아 웃음꽃을 피우며 즐거워한 순간들도 있었지만 막상 글쓰기에 들어가자 난감했다.

서로 최대한 자유롭게 쓰되, 자신이 만든 인물이 다른 작가들의 글 속에서 어떻게 호흡하는지 예민하게 체크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서로 모순되거나 어긋나는 부분이 없는지 구석구석 살펴야 했다. 그렇게 완성된 네 편의 이야기는 한 편 한 편이 독립된 이야기이면서도 서로 얽힘으로써 그 이상의 효과를 내는 독특한 작품집으로 탄생했다. 이런 시도는 처음이라서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없었지만 우리 모두는 기꺼이 위험부담을 나누어서 지기로 하고 시작했다. 그 결과 안 될 듯 안 될 듯한 순간들을 거치면서 15개월 만에 원고가 완성되었다. 그 시간 동안 노심초사하면서 얼마나 여러 번 후회했는지 모른다.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고 안 될 것만 같던 순간들이 그만큼 많았다. 작은 실마리들에 일희일비하면서 한 편 한 편의 원고가 완성되던 순간들은 그만큼 또 기쁨도 컸다.

새로운 물꼬를 트다

『가족입니까』는 2006년부터 새로운 시도로 시작한 ‘바람단편집’ 여섯 번째 책에 해당한다. 바람단편집은 잡지가 아닌 단행본으로서는 처음으로 등단의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다. 각종 문학상이나 잡지에서 단편동화로 상을 주기도 하지만 정작 그 작품은 독자들에게 가 닿지 못한다. 정기 간행물 형태의 출판물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 착안한 첫 번째 바람단편집 『달려라, 바퀴』는 원고 공모를 통해서 만들어졌다. 직관적 판단에 의한 방식이었지만 생각보다 호응이 좋았다.

두 번째로 공모를 했을 때는 훨씬 더 많은 원고가 모여서 저학년용 『귀신이 곡할 집』과 고학년용 『공주의 배냇저고리』로 엮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한꺼번에 열 편이 넘는 작품을 투고한 작가가 두 사람이나 있어서 정말 깜짝 놀랐다. 들쑥날쑥한 길이의 많은 작품들이 일정 수준의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어서 크게 기뻤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귀신이 곡할 집』이나 『달려라, 바퀴』에 단편을 실었던 몇몇 작가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지속적인 글쓰기를 통해서 모음집이 아닌 자기 혼자만의 작품을 출간하게 되었는데 『한눈팔기 대장 지우』, 『꽃밥』, 『알다가도 모를 일』, 『도망자들의 비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그 녀석이 수상하다』, 『사람을 만나다』, 『거지 소녀』(근간), 『엘리스 월드』(근간) 등이 그 책들이다. 『공주의 배냇저고리』 이후의 바람단편집은 모두 청소년 소설이다. 『깨지기 쉬운, 깨지지 않을』, 『그 순간 너는』 그리고 『가족입니까』. 한 권 한 권을 기획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자, 그리고 창조적인 에너지를 증폭시키고자 애썼다. 『깨지기 쉬운, 깨지지 않을』이나 『그 순간 너는』은 청소년 소설을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작가들이 청소년 소설을 쓰게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

특히 『그 순간 너는』은 같은 시간대에 라디오 방송을 듣는 일곱 명의 전혀 상관없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독자들에게 너는 어떻게 살고 있느냐는 물음을 던지는 형식을 취한 책인데, 그 전까지의 책들에 비해서 작업이 까다로웠다. 전체 작품집을 관통하는 라디오 방송을 먼저 만들어 내야 했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독방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에 누군가와 협력해서 쓴다는 것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바람단편집은 날이 갈수록 작업 방식도 책의 구성도 복잡해지고 있다. 라디오 방송 스크립트를 먼저 만들어 놓고 그것을 공유하는 방식을 의논하고 ‘그 순간’의 시간적 통일성을 면밀하게 체크해야 했던 『그 순간 너는』도 상당히 까다로웠지만 『가족입니까』는 이야기들이 서로 얽혀서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입체적인 구성이라서 그보다 더 어려운 작업이었다.

글과 글이 서로 돕다

이제 와서 되돌아보니 어떻게 해냈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이제야 실토하는 거지만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나는 항상 안 될 것만 같았다. 글은 작가들이 쓰는 것이라 편집자가 될지 안 될지 짐작할 수 없는 건데도 나는 혼자 속을 끓이며 안 될 것만 같아서 조바심을 내곤했다. 그러나 작가들은 언제나 해냈다. 포기하겠다던 작가들도 결국에 해낼 수 있었던 것은 ‘공동’ 작업의 힘이었다. 안 될 것 같아서 애를 태우다가 글과 글이 서로를 도와서 좋아지고 완성되는 것을 지켜볼 때마다 나는 감탄한다. 그리고 믿음이 생긴다.

‘바람단편집’은 이렇게, 만들기가 다른 책들보다 몇 배나 힘이 드는 책이다. 그런데 그래서 그만큼 더 보람되고 가치가 있는 책이다. 그리고 또한 다음번에는 또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로 책을 만들까 가슴이 뛰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오늘도 언뜻언뜻 스치는 생각들과 씨름을 하고 있다. 과연 가능할 것인가, 혹은 의미가 있는 일인가, 필요한 작업인가, 되씹고 곱씹어 보면서. 세상에는 책이 넘쳐난다. 서점에 나갈 때마다 책 만드는 일이 서글프게 느껴진다. 내가 만드는 책이 과연 있어야 하는 책인가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고 기대한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올지 모른다고.
최윤정 |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와 파리3대학에서 불문학을 박사과정까지 공부했다. 두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린이 책에 눈을 떴다. 『책 밖의 어른 책 속의 아이』로 어린이 책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여 지금은 어린이 청소년 문학 전문 출판사 ‘바람의아이들’ 대표로 있다.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면서 아이들과 책과 교육에 대해서 부단히 성찰하고 작가, 편집자, 사서, 교사 등 좋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우리 어린이 문학의 발전을 꾀하고 있다. 그동안 쓴 책으로 『양파 이야기』, 『미래의 독자』, 『슬픈 거인』, 『그림책』 등이 있으며 『글쓰기 다이어리』,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 『내 꿈은 기적』 등을 번역했다. 201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 공로 훈장을 받았다. 현재 독자들과 소통하기 위하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http://blog.naver.com/ehjnee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