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8월 통권 제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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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그림책과 작가 이야기]
달이 차오른다, 가자! ― 기 빌루 2

서남희 | 2010년 08월

어린 시절의 공포란 상상 속에서 만나는 것이니 피할 수도 있지만, 어른이 되어서 만나는 공포 중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밥벌이의 두려움’ 아닐까요? 기 빌루는 자기 일의 불안정성과 두려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다른 예술가들과 말할 때 우리는 두려움에 대해 많이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를 많이 하다 보면, 모두들 일거리가 없을 까봐 불안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직업에  모든 것을 걸었는데, 내가 예술가인 것 외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게 두렵다. 그건 정말 끔찍하다. 만약 상황이 나빠지면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지금도 그림을 보내면서 나는 불안하다. 우리가 얼마나 불확실하게 사는지 참 기막힌 일이다. 차라리 앞일을 예측할 수 있는 버스 운전사가 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http://www.drawger.com/zinasaunders/?article_id=4949)

두려움에서 그를 구제해 준 것은 가끔이나마 들어오는 일거리와 작업하며 느끼는 놀라운 기쁨이었어요. 『뉴욕』 지를 위해 센트럴 파크를 그릴 때였죠. 그때까지 기 빌루는 매우 양식화된 단순한 방식으로 나무를 표현했고, 잡지에서는 그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는 나뭇잎을 관찰하면서 구조에 매료되었고, 센트럴 파크의 나무들과 건물들을 사진 찍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그 사진을 트레이싱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기 빌루의 스타일을 다행히 『애틀랜틱』 지에서 좋아해 주어 일 년에 6회, 풀 페이지로 작품이 『애틀랜틱』에 실리게 됩니다. 제가 최근에 본 것은 힘을 잃고 있는 미국의 자동차 산업에 대한 그림인데, 세차장에서 세차를 끝내고 나온 차가 장난감 차로 변해 있는 내용이었지요. 전체적으로 이 작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금방 파악이 되는 그림들도 있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그림들도 있어요. 그 중에서 의도가 선명한 작품 몇 개를 보도록 하지요. (작품을 감상하려면 이 링크를 따라가 보세요. http://www.theatlantic.com/ magazine/ archive/ 2001/03/mimesis/2126/)

「Mimesis(모방)」은 비행기 활주로에서 이륙하기 시작하는 무거운 비행기와 잔디밭에서 놀고 있는 비둘기들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요즘 비둘기들은 멀리까지 제대로 날지 못하지요? 일명 닭둘기라고 하는 것들 말이에요. 닭둘기 발에 작은 바퀴가 달려 있군요. 비행기는 새를 모방해서 쌩~하고 날아가는데, 막상 새는 제 것이었던 비상을 잊고, 이제야 비행기를 모방해 바퀴를 달고 있으니 그 역설적 풍경이 대단한 작품이지요.

인간이라면 대개 공감하겠지만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마감’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니면 끝도 없이 늘어지게 되지요. 기 빌루 역시 작업을 진행시킬 어떤 시스템과 압박이 필요하다고 고백합니다. 자기가 요즘 책을 만들고 있는데, 계약서도 없고 마감일도 없으니 언제 마칠지 알 수 없다면서요. 그의 일러스트레이션 중 「Writer’s Block(작가의 장애)」를 보면 (http://www.theatlantic.com/past/docs/issues/98may/billout.htm) 꼼짝없이 막혀 버린 글쓰기 혹은 그림 그리기가 댕강 끊어진 폭포 줄기로 표현되지요.

기 빌루는 이런 식으로 살짝 변화를 주는 것을 좋아하지요. 물줄기란 늘 이어지는 거라는 고정관념을 살짝 비틀어 끊어버리거나, 건물 벽을 비추는 서치라이트는 그 벽에서 끝나야 하는데 건물을 통과해서 맞은 편 벽까지 꿰뚫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바꿔서 전혀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그런 이미지들을 모아 글이 거의 없는 그림책으로 꾸민 것이 『꿈꾸는 소년의 짧고도 긴 여행』이지요. 이 책은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소년의 상상 여행입니다. 기찻길은 재미있는 장치로군요. 일직선으로 쭉 뻗어 있는 기찻길을 따라 상상도 뻗어 나갑니다. 기차역에서 부모와 작별을 나눈 소년은 기차를 타고 가며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지요. 왼쪽에는 주인공이 기차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장면이 배치되어 있고 짤막하게 날짜와 장소가 나오는군요. 이에 비해 오른쪽은 그 창밖 풍경이 상상 속에서 기발하게 펼쳐진 장면을 보여줍니다.

창밖에 보이는 커다란 철교는 비어있지만, 오른쪽 그림에서는 공룡들이 뛰어 건너고 있거나 5월의 들판을 지날 때 토가 차림에 샌들을 신은 남자가 들판 속으로 걸어가는 장면은 평범하지만, 8월 13일, 푸른 달 장면은 매우 신기하군요. 짐승들이 시내를 건넙니다. 하지만 시냇물 위로 건너는 게 아니라, 물을 들추고 가는군요. 물을 건너려면 누구나 위로 절벅거리며 가든가, 헤엄을 치든가, 배를 타든가 하는 장면을 당연시 여기는데, 기 빌루는 그것을 살짝 바꿉니다. 마치 카펫 속으로 들어갔다 들추고 나오듯이 물을 건너는 것으로 그려냈으니까요.

대양 속의 폭포를 향해 배가 나아가며 곧 떨어질 지경인데, 배에 탄 사람들은 하릴없이 바다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물의 진행 방향을 보건대, 자신들도 곧 휩쓸려 폭포로 떨어질 게 훤한데도 잠시라도 죽음을 뒤로 미루고 싶은 그 심정. 아,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사람들이 뛰어내린 물은 매우 얕아, 어떤 이는 (헤엄치는 게 아니라) 뛰어 도망가기까지 하는군요. 전혀 위험하지 않은 배에서 사람들은 탈출합니다. 대양 속에 폭포가 있다는 것조차 (물론 대양이 아니라 오대호처럼 수평선이 보이는 큰 호수일 수도 있지만) 엉뚱해 보이지만, 배 자체가 전혀 위험하지 않은 상황인데도 사람들이 오해하고 달아나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이란 제 생각에 겨워 현상을 엉뚱하게 받아들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2월 22일 계단 그림에서 초병들은 계단을 따라 부동자세로 서 있지만, 계단이 끝나는  콘크리트 바닥의 병사들은 위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점차 푹 들어가 있습니다.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요? 6월 8일의 강가에는 가로수가 줄지어 있지만, 오른쪽 장면에서는 도끼질에 나무 하나가 베어나가 이제 곧 도미노처럼 다른 나무들이 줄지어 쓰러질 게 예상되고, 남녀가 아무 것도 모른 채 한가로이 산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삶이란 어느 날 갑자기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기는 법. 어린 독자들은 이 그림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군요. 먹이 사슬을 따라 이어 점점 큰 물고기들이 따라 올라오는 낚시 등 신기한 그림들이 이어지고, 1월 30일 한밤중, 소년에서 머리가 새하얀 노인으로 된 주인공은 일어나 가방을 챙기고 내릴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3월 11일 대서양 장면, 기찻길은 대서양 바로 앞 벼랑에서 끊어지고,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군요.

표지로 돌아가 보면, 바닷가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모두 저 멀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기차가 대서양을 향해 계속 가고 있거든요. 철길도 없는 공중을 따라 달리는 기차란 무슨 뜻일까요? 1984년에 쉴러 와프터 갤러리에서 열린 자신의 일러스트레이션 전시회 포스터를 위한 스케치를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구름 너머 하늘에서 스스로 줄을 그어가며 외줄 타기를 하는 청년은 『꿈꾸는 소년의 짧고도 긴 여행』에서 벼랑 너머 기차 길 없는 곳을 달리는 기차와 똑같지요. 외줄을 타며 느끼는 살 떨리는 긴장감과 두려움, 그러나 오로지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 바로 이것이 삶의 본질 아닐까요? 

『꿈꾸는 소년의 짧고도 긴 여행』이나 『바다가 보고 싶었던 개구리』, 『뭔가 잘못된 것 같아 Something’s Not Quite Right』 등 그의 그림책들 중 네 권은 『뉴욕 타임즈』에서 선정한 ‘올해 최고의 그림책 10’ 목록에 올랐고, 특히 『바다가 보고 싶었던 개구리』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때론 그의 책이 어린이용이 아니라 성인용이라고 비판받는 일도 있었지요. 그림책을 오로지 어린이용이라고 붙박는 일부 평자들의 편협함에 대해 기 빌루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 제 책의 독자층을 어린이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그저 어떤 분위기나 감정을 표현할 뿐입니다. 또 성인을 어린이와 전혀 관련 없는 듯이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어른을 위한 동화책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스티븐 헬러, 『일러스트레이터는 무엇으로 사는가』, 디자인하우스, 2002, 223쪽)

계약서도 없고, 마감도 없는 인생. 그래도 책을 만들고 있다는 그가 외줄을 조금만 더 그어 아주 괜찮은 책을 만들어 주면 좋겠습니다. 보름달이 차오를 때마다 백번도 넘게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두려움과 기쁨에 마음 졸이며 달그림자 안으로 발을 슬며시 들여놓았던 개구리 앨리스처럼. 


참고 책 및 사이트
스티븐 헬러, 『일러스트레이터는 무엇으로 사는가』  디자인하우스, 2002, 216~224쪽
Zina Saunders의 사이트 : http://www.drawger.com/zinasaunders/?article_id=4949
『애틀랜틱』의 기 빌루 일러스트레이션 모음 : http://www.theatlantic.com/guy-billout/
서남희 | 대학에서 역사와 영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지금은 세상살이 자체가 공부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볕 드는 마루에서 만난 그림책과 작가 이야기』 『아이와 함께 만드는 꼬마 영어그림책』을 썼고, 『페페 가로등을 켜는 아이』 『마녀에게 가족이 생겼어요』 『꿀벌 나무』 『작은 새의 노래』 『꼬꼬닭 빨강이를 누가 도와줄래?』 등 많은 책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