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6월 통권 제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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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그림책과 작가 이야기]
기억 속의 철길을 따라 그린 그림책 ― 도널드 크루즈 2

서남희 | 2010년 06월

아무리 박람회나 퍼레이드가 즐겁다 해도, 기나긴 여름 방학 때 시골 할머니 댁에 가는 것만큼 재미있는 게 또 있을까요? 도널드 크루즈는 어린 시절 2박 3일 기차를 타고 플로리다 농촌에 있는 외가에 가서 논 경험을 『할머니 댁 Bigmama’s』에 고스란히 담고 있어요. ‘Bigmama’가 뭐냐고요? 엄마의 엄마, 즉 외할머니를 아이들이 그렇게 부르는 거랍니다. 여름 방학 때마다 2박 3일 기차를 타고 아이들은 외가에 갑니다. 기차역에는 외삼촌이 마중 나와요. 아이들은 마차를 타고 가고 싶지만, 그건 그저 바람일 뿐, 삼촌의 차를 타고 철길을 건너고 붉은 흙길을 달려 외가에 도착합니다. 머리가 새하얀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들을 반갑게 맞아 주지요.

아이들은 양말과 신발부터 벗어던지고 탐험을 시작합니다. 낡은 발재봉틀과 호롱불과 축음기는 갈 때마다 제자리에 있는데도 늘 신기하지요. 그냥 시골집도 아니고 농가이니 신 나는 일은 많지요. 마당에 나가면 우물이 있어 기다란 밧줄 끝에 달린 물통으로 물도 길어 볼 수 있고, 뒷마당에는 닭장이 있어 닭들도 쫓아다닐 수 있지요. 그뿐인가요? 배나무 옆에는 칠면조들도 있고, 펌프도 있어 신 나게 펌프질을 하면 시원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지요. 삽이니 쇠스랑이니 칼이니 망치니 온갖 연장들이 자리 잡은 연장 창고 앞의 트랙터 밑에서 닭들이 숨겨 놓은 달걀도 찾아보고, 시럽을 짜고 쌓아 둔 사탕수수 찌끼를 쇠스랑으로 파서 벌레도 찾아내요. 또 말들과도 놀고, 연못에서 물고기도 잡고 식구들과는 맛있는 저녁을 먹고 깜깜한 밤하늘에서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한 새하얀 별들을 구경하지요.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작가가 도시의 불빛에 가려 별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하늘을 쳐다보며 그때 그 여름을 그리워하고 있군요. 초창기 책들이 그래픽적인 간결함을 추구한 데 비해 수채 물감과 구아슈를 쓴 이 책의 그림들은 회화적이고, 이야기를 한층 풍부하게 담고 있어요. 닭이니 우물이니, 트랙터 바퀴니 하는 자잘한 그림들이 저마다 정겨운 이야기를 술술 풀어낼 것만 같은데, 그중 압권은 아이들의 맨발이지요. 맨발로 느끼는 풀밭, 맨발이 닿는 흙길, 맨발로 가는 연못은 아이들이 닭이나 개, 병아리 들처럼 시골 생활을 날것으로 온통 받아들이고 있음을 드러내는 섬세한 장치랍니다.

글 또한 꽤 많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할 이야기가 많아서였어요. 우리도 ‘엄마 어렸을 적엔’ 류의 그때 그 시절에 대한 전시회에 가보면 할 말이 많잖아요? 교실 안의 조개탄 난로 위에 쌓인 양은 도시락들을 보면 밥알만큼 자잘한 얘깃거리들이  끝도 없이 나올 판이니까요. 작가는 그때 그 시절을 담은 사진들이 별로 없으니만치, 헛간이니 변소니 큰 농가니 하는 것들이 어떻게 생겼나 꼬마들이 궁금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흑인 가정과 그들의 삶에 대한 책들이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런 면에서 자신이 기여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 이야기를 담아 글을 써 보고 그림을 스케치해서 마침내 이 책이 탄생했지요. 그런데 이 책에 담긴 것은 외할머니 댁의 그리운 시골 생활뿐이 아니랍니다. 기차 안 풍경을 보면, 승객들은 모두 흑인이고, 차장은 백인입니다. 그리고 객실 내부에는 ‘Colored (유색인종용)’라는 표지가 있습니다. 기차나 버스, 식당에서 흑백분리가 철저하게 이루어졌던 당시 사회 분위기가 이렇게 드러나지요.

그가 『화물 열차』 등 초기 책들에 비해 후기 책들에 이런 내용을 담은 것은 다문화에 대해 조금 너그러워진 사회 분위기에 힘입은 게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도널드 크루즈가 흑인 작가로, 또 흑백 커플(아내인 그림책 작가 앤 조나스는 백인입니다.)로 살아가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곁가지를 치자면, ‘color-blind’라는 표현에는 ‘색맹의’라는 뜻도 있지만,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뜻도 있답니다.) 이렇게 ‘유색인종용’ 칸에라도 타고 철길을 달리면 그리운 외할머니 댁에 가서 재미나게 놀 수 있지만, 실제 철길은 어마어마하게 큰 쇳덩어리가 바퀴를 달고 굉음을 내며 폭주하는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작가는 『지름길 Shortcut』에서 바로 그 공포스런 대상과 아이들의 두려움을 인상적으로 그려 냅니다.

밖에서 뛰놀던 아이들은 해가 뉘엿뉘엿 저물자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지름길인 철길을 따라 집에 가려고 마음먹지요. 표지를 보면 휘어진 철길은 나무숲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는데, 저 어둑어둑한 모퉁이에서 언제 기차가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며 확 달려들지 모르니 아이들이 살짝 걱정하며 옹기종기 모여 있군요. 그래도 아이들은 무서운 마음을 떨쳐 버리고, 철길로 들어섭니다. 그렇다고 서둘러 가는 것도 아니에요. 좁고 반짝이는 철로를 따라 안 떨어지려고 애쓰며 걷기도 하고, 침목만 골라 딛기도 하고, 가장자리 자갈길로 뛰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사람 타는 기차 시간표는 꿰뚫고 있지만, 화물 열차는 아무 때나 오니 걱정하지요. 모퉁이 저 너머에서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가 공기를 타고 옵니다. 

“I HEAR A TRAIN!”    (“기차 소리가 들려!”)
Everybody stopped.     (모두 멈춰요.)
Everybody listened.     (모두 귀를 기울여요.)
We all heard the train whistle.  (기적 소리가 들려요.)
Should we run ahead to the    (빨리 집 쪽으로 먼저 뛰어가야 하나)
path home or back to the cut-off?  (차단기 쪽으로 도로 가야 하나?)


소리가 크게 들리자, 아이들은 두말 없이 차단기 쪽으로 도로 뛰어갑니다. 모퉁이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이제 우렁찬 굉음으로 쏟아지고, 전조등은 어두운 하늘에 노란 불빛을 뿜어냅니다. 아이들은 급히 철길을 벗어나 가파른 언덕으로 내려갑니다. 찔레 덤불 속에 뱀이 숨어 있을지 모르지만 생각할 겨를도 없지요. 샛노란 불빛을 소방차 물줄기처럼 쫘악 뿜으며 검은 기관차가 괴물처럼 앞서오고 다른 열차들도 뒤따라옵니다. 석탄을 실은 차, 기름을 실은 차, 통나무를 실은 차 등이 줄줄이 지나가자 아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시 철길로 올라가 황급히 차단기 쪽으로 되돌아가서는 도로를 걸어 집으로 가지요. 다시는 철길로 가지 않으리라 결심하면서요.

이 책 역시 수채 그림이에요. 하지만 인물을 묘사할 때 검은색 외곽선으로 진하게 처리했고, 철길 옆 풍경인 나무 숲 그림은 에어브러시를 사용했지요. 기차가 나타날까봐 불안해 아이들의 심장이 쿵쿵대듯, 문장 또한 박자 맞춰 쿵쿵거려요. 

We looked....  (살펴보고)
We listened.... (귀 기울이고)
We decided to take  (마음먹어요,)
the shortcut home. (지름길로 가기로.)


활자체와 크기도 기차의 속도감을 비롯해 아이들의 불안한 마음을 여지없이 나타내는 요소로 활용되고 있어요. 속지는 ‘KLAKI TY-KLAK-KLAK-KLAKITY-KLAK- KLAK (철커덕 철컥)’이라는 글자로 가득 차 있고, 기차 소리를 뜻하는 글자 ‘Whoo’는 처음엔 작지만 점점 커지다가 나중에는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커지지요. 기차가 지나간 뒤에는 아주 작게 줄어들어요.

철길 주변의 나무숲과 하늘의 색채 변화를 보면 시간의 흐름을 잘 느낄 수 있지요. 처음에는 녹색 나무숲은 위쪽만 약간 거뭇거뭇할 뿐이고 하늘도 살짝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지만, 뒤로 갈수록 나무숲은 어둑어둑해지고, 하늘도 점점 먹물이 번지듯 거무스레해진답니다. 또한 모퉁이 깊숙한 쪽으로 눈길을 던지면 마치 검은 동굴이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요. 그곳에는 위험한 괴물이 똬리를 틀고 도사리고 있는 것 같지요. 그 괴물은 아이들이 한때는 멀리서 보며 즐거워했던 화물 열차이고요. 그런데 이 책을 그냥 글자 없는 그림책으로 만들었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문장이 리듬감 있고 괜찮긴 하지만, 인물들의 표정과 동작, 철길, 화물 열차가 지나가면서 내는 소리와 불빛 등으로 모든 게 충분히 설명되거든요.

2000년에 『배를 타고 Sail Away』를, 2001년에 『화물 열차 안 Inside Freight Train』을 내고 은퇴한 도널드 크루즈는 지금은 허드슨 리버 밸리에 있는 농가를 개조해 아내 앤과 살고 있어요. 기억 속의 철길을 따라 달리며 만든 그의 그림책들은 이렇게 우리에게 남고, 부부의 예술적 재능은 딸인 니나가 물려받아 그림책 작가이자 만화가로 활동하고 있답니다.

참고 사이트

http://findarticles.com/p/articles/mi_m2838/is_n1_32/ai_20610477/
서남희 | 대학에서 역사와 영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지금은 세상살이 자체가 공부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볕 드는 마루에서 만난 그림책과 작가 이야기』 『아이와 함께 만드는 꼬마 영어그림책』을 썼고, 『페페 가로등을 켜는 아이』 『마녀에게 가족이 생겼어요』 『꿀벌 나무』 『작은 새의 노래』 『꼬꼬닭 빨강이를 누가 도와줄래?』 등 많은 책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