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5월 통권 제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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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읽는다]
결정했어, 내일 다시 오자

윤석연 | 2010년 05월

매일 하는 생각

‘국경 없는 의사회’에서 일하는 아내를 따라 버마로 간 만화가 기 들릴 씨.(내가 쓰는 컴퓨터가 참 영특하다. 버마라고 자판을 두들겨도 미얀마로 바뀐다. 오 놀라워라. 마치 컴퓨터가 비웃는 듯하다. “이보게, 글 쓰는 양반. 버마라는 나라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오. 쯧쯧.”) 자기가 머무는 집 근처에 아웅산 수지가 산다는 말을 듣고는 유모차를 끌고 아웅산 수지 때문에 봉쇄된 길을 가보기로 한다. “아이와 함께 있는 죄 없는 아빠를 가로막진 않겠지.” 하며. “실없는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지나가려고 했지만 결국 검문에 걸려 발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다.

이때 기 들릴 씨가 하는 생각은 이렇다.
“잠깐,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이렇게 매일 와서 시도를 해 보는 거야. (……) 항상 같은 시간에. (……) 나의 열정이 조금씩 당국을 긴장시키겠지. 양곤의 시민들은 아웅산 수지의 집을 보겠다고 우기는 고집불통 외국인의 이야기를 듣게 될 거야. (……) 거대한 군중이 만들어지겠지. 그리고 고요하면서도 비폭력적인 반정부 시위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겠지. 대규모 시위에 크게 당황하고 겁먹은 정부는 ‘검문소’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로막을 거야. 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상황도 상황이려니와 국제적인 압력 때문에 군사정권은 태도를 바꿔서 아무 제재 없이 날 통과시켜 줄 거야. 놀랄 만한 일이지. (……) 결정했어. 내일 다시 오자.”

그러나 다음날 같은 시각 기 들릴 씨는 유모차를 끌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한참 뒤집어져서 웃었다.
“난 승리를 거두고 아웅산 여사의 집으로 평화로운 한 발을 내디딜 거야. 그리고 힘내서 투쟁하라고 손을 흔들어야지.”
머릿속 생각은 얼마나 멋진가. 하나가 열이 되고, 물방울이 모여 강을 이루는.  아, 얼마나 위대한가!

생각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진다

서울 시내 한복판 순화동에서 10년 넘게 한식당을 운영하던 사장님(고 윤용헌 씨)은 어느 날 불어닥친 재개발과 강제 철거 바람에 자신의 터전에서 밀려나 하루아침에 철거민이 된다. 그리고 2009년 1월 20일 새벽, 용산 4구역 남일당 망루에서 경찰의 진압으로 사망한다.

윤용헌 씨는 “사람이 당하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언젠가 한번은 다 철거민이라는 경험을 하고 살 거요. 철거민이라는 말이 생소하게, 상관없게 들리겠지만,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언제 철거 대상지역이 될지 모르는 겁니다.” 용산 4구역에서 벌어지는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던 윤용헌 씨는, 그래서 남일당 망루에 올랐다. 어쩌면 『굿모닝 버마』와  『내가 살던 용산』을 같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 모른다.

유모차를 좋아하는 이유

“내가 유모차를 좋아하는 나에게 관심이 쏠리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끄는 루이스(기 들릴 씨의 아들) 덕분이다.”

기 들릴 씨에게 버마는 딱 이만큼의 거리에 있다. 어슬렁거리며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거리. 나에게 관심이 쏠리지 않지만 내가 끌고 다니는 유모차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끈다. 버마는 성범죄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외국 영화 관람이 금지되고, 오토바이는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시내 통행이 금지되고, 모든 출판물은 검열을 거치고, 남의 집에서 자려면 당국에 신고해야 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수도가 바뀌기도 하는 군사 독재의 그늘 아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기 들릴 씨에게 군사 독재가 빚어내는 풍경은 만화의 소재일 뿐이다. 그이는 버마의 역사와 사람들을 기록하거나 기억하지 않는다. 그저 그릴 뿐이다. 설령 기 들릴 씨가 만화가 지망생들을 상대로 만화 강좌를 열었다가 자칫 반정부 행위로 오해받아 수강생이 잡혀갈지도 모를 경험을 하더라도…… 짐 싸서 돌아가면 된다.(물론 이런 상황이라면 아웅산 수지 집을 어슬렁거리다 검문에 걸렸던 것처럼 평화로운 한 발을 내딛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놀랄 만한 일을 결정할지 모른다. 물론 다음날, 그 놀랄 만한 결정을 기억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인간다운 삶을 꿈꾸는 보통사람들의 연대

『내가 살던 용산』의 만화가들은 용산 4구역에서 일어난 일을 그리지 않는다. 그날 경찰 진압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생애를 복원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기록하고 기억한다. 죽어간 사람들이 생전에 품었을 희망을 기록하고 기억한다. 거기에 적당한 거리는 없다. 어슬렁거리며 느긋하게 뒷짐 지고 바라볼 수 있는 거리는 아예 없다. 망루에 올랐던 다섯 사람의 생애는 중첩되고 반복된다. 

「철거민」의 윤용헌, 「잃어버린 고향」의 한대성, 「상현이의 편지」의 이성수 씨는 왜 망루에 올랐을까? 만화가가 복원하는 죽은 이들의 생애는 어느 한 곳에 뿌리 내리고 살고 싶었으나 땅에서 뿌리 뽑히고 내쫓겨 결국은 땅을 떠날 수밖에 없는 궤적이다. 결국은 땅을 떠나 망루에 오르면서도, 그래도 “바람을 막아 주는 벽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희망을 꿈꾸는 건 「던질 수 없는 공」의 양회성, 「레아호프, 그들이 만든 희망」의 이상림 씨의 삶이 결코 나의 삶과 다르지 않다고 자각한 윤용헌과 한대성, 이성수 씨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살기 위해서 망루에 올랐다가 죽어서 내려왔다. 또 그리고 언젠가 한 번은 다 철거민이라는 경험을 하고 살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니 용산 4구역에서 죽어간 이들의 이야기가 언젠가 한 번은 땅에서 내쫓길 수밖에 없는 모두의 이야기라는 걸 기억하라고 한다.

나 또한 남일당 망루에 사람들이 올라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내가 살던 용산』이라는 만화책이 나올 때까지, 생각했다.

“이렇게 매일 와서 시도를 해보는 거야. 항상 같은 시간에. 나의 열정이 조금씩 당국을 긴장시키겠지. 거대한 군중이 만들어지겠지. 고요하면서도 비폭력적인 반정부 시위에 크게 당황하고 겁먹은 정부는 ‘망루’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로막을 거야. 놀랄 만한 일이지. 결정했어. 내일 다시 오자.”
그리고 내 몸은 어김없이 내 생각을 배반하였다. 아니, 생각은 달라진 것처럼 보였으나 행동이 달라지지 않은, 그렇다고 기 들릴 씨처럼 철학적이거나 유머를 잃지 않거나 그런 것도 아니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버마

그런데도 굳이 두 만화책을 엮은 이유는 미얀마라고 불리는 버마의 현실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과 중첩되기 때문이다. 버마를 미얀마로 부를 수 없듯이.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집회는 금지되고, 모든 언론은 검열되고, 수도를 이전하자는 다수의 의견은 묵살되고, 눈 깜짝할 사이에 4대강은 파헤쳐지고, 무상급식은 중지되고, ‘여기 인간이 있다.’고 외치는 소리에는 사람에게 가할 수 없는 공권력이 동원되고, 바람이 막아 주는 벽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은 유린당하는 여기 대한민국에도 버마의 모습이 중첩되고 지독히도 반복된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윤석연│세상의 많은 작은 것들을 좋아하고, 좋은 이들과 수다 떨기를 좋아하고, 격식이나 예절, 서열, 질서 따위를 싫어합니다. 늘 싫고 좋음을 분명하게 말해 버려 가끔 미움도 받지만, 언제나 씩씩하고 즐겁게 살고자 애씁니다. 그리고……혹시 글 쓰는 걸로 이 세상 선한 일들에 보탬이 된다면 꾸역꾸역 하겠다고 맡고 나서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