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5월 통권 제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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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그림책과 작가 이야기]
기억 속의 철길을 따라 그린 그림책 ― 도널드 크루즈 1

서남희 | 2010년 05월

30년 전인 1980년, 서강대 뒷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철길이 있었어요. 정문 쪽도 한산했지만, 뒷문 쪽은 한가하기까지 했는데 철길까지 있으니 꼭 시골 어디쯤 와 있는 것 같았지요. 어디로 연결되는 것일까 궁금했는데, 어느 날, 웬 시커멓고 납작한 구루마(!)가 반짝반짝 새까맣게 빛나는 석탄을 싣고 철길 위를 덜덜덜덜 가는 거예요. 전철은 익숙해도 화물 열차는 난생 처음 보는데다, 게다가 뚜껑 없는 차라니! 무척 신기했지요. 이 근처에 석탄 싣고 갈 만한 곳이 어디 있지? 하며 갸우뚱했었지요. 게으름에 겨워 4반세기도 지난 이제야 찾아보니, 용산역에서 서강역을 거쳐 당인리 발전소까지 석탄을 실어 나르는 화물 열차가 운행되는 단선철도가 있었다고 하네요. 82년부터 차츰 구간별로 없어져서 지금은 완전히 철거되었대요. 어려서 사회책에서 보던 ‘당인리 발전소’는 아주 멀찌감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지금 마포구 당인동에 있는 서울화력발전소가 그거예요.

그 옛날 새까만 무개 화차는 도널드 크루즈의 『화물 열차 Freight Train』에서도 석탄을 수북이 싣고 달릴 준비를 하고 있어요. 고운 파란색으로 단장하고 있긴 하지만 예전에 본 납작한 구루마 모양인 것만큼은 틀림없네요. 책 앞부분에는 철길만 나오지만, 두어 장 넘기면 정지 상태의 화차들이 차례로 보입니다. 승무원이 타는 빨간색 화차, 기름을 실어 나르는 주황색 화차, 자갈을 실어 나르는 노란색 화차, 가축을 실어 나르는 연두색 화차, 석탄을 실어 나르는 파란색 무개 화차, 비료를 실어 나르는 보라색 유개 화차, 까만색 탄수차가 연결되어 있고, 물론 제일 앞에는 묵직한 까만색 증기 기관차가 검은색 연기를 슬슬 뿜고 있지요.

화차의 종류와 색깔을 알려 주는 개념 그림책이라고만 생각하기엔 후반부가 멋집니다. 첫 몇 장은 그저 정지 화면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슬슬 내뿜는 검은색 연기로 보아 아, 이제 열차가 출발하려나 보다, 라고 짐작할 뿐이지요. 그 다음에는 줌 아웃으로 이 열차들을 한꺼번에 한 화면에 잡아주고 있습니다. 새하얀 배경에 멀리까지 번져 가는 연기를 보면서 열차가 이제 달리고 있구나, 하는 게 느껴집니다.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작가는 제각각 다른 색깔의 화차들이 번지면서 서로 겹치는 모양을 그려, 화물 열차가 쏜살같이 지나가는 효과를 빚어냅니다. 그리고 그 열차는 터널을 통과하고, 도시를 지나고 철교를 건너, 밤에도 낮에도 달리고 또 달려갑니다. 첫 페이지에는 새하얀 배경에 철길만 놓여 있지만, 마지막 페이지에는 철길 위에 나부끼는 연기 세 자락이 보이지요. 처음과 끝을 보면 중간에 얼마나 힘찬 광경이 지나갔을지 선뜻 짐작할 수 있지요.

그림 선은 매우 간결하고 명확합니다. 화차들은 각져 있고, 화물 열차가 지나가는 배경으로 선택된 도시의 실루엣은 뾰족뾰족 날카롭습니다. 그러나 간결하고 명확한 것은 그림 선만이 아니지요. 도널드 크루즈는 글 또한 더 이상 가지 칠 수 없을 정도로 최소한으로 썼습니다. 그림책은 대개 번역을 존대어로 하기에 글이 길어질 수밖에 없고, 우리 정서에 맞게 설명까지 덧붙일 경우엔 더 길어지지요. 책을 더 잘 만들기 위해 편집자와 번역자가 고심한 것일 테니 그건 전폭적으로 이해하지만, 어쨌든 원문은 매우 짧답니다. (괄호 안은 번역본임)

A train runs across this track.  (기차가 철길을 따라 달리고 있습니다.)
Red caboose at the back   (승무원이 타는 빨간색 화차 앞에)
Orange tank car next    (기름을 실어 나르는 주황색 화차 앞에)
Purple box car    (비료를 실어 나르는 보라색 유개 화차 앞에)

마지막 부분도 간결 그 자체입니다. 

going, going…… gone.   (달리고, 달리고……달려갔습니다.) 

참 깔끔한 글이지요? 작가의 말에 따르면 『화물 열차』는 디자인 일을 주로 할 때 만든 작품이라고 해요. 그리고 그 시기는 추상, 간결, 상징이 중요하게 느껴졌던 때이고요. 그래서 그림도 간결하게 그렸지만 글도 55자 남짓으로 간결하게 썼어요. 그러나 글은 줄여도 자식에 대한 사랑만큼은 줄이지 못하는 게 부모지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까만색 증기 기관차에 ‘N&A’라는 글자가 보이지요? 바로, 딸들인 니나(Nina)와 에이미(Amy)의 첫 자랍니다. 사랑스런 딸들을 책에 기념해놓고 싶은 아빠는 그렇게 마음을 표현했답니다. 그 옆의 까만색 탄수차에 쓰인 ‘1978’이라는 숫자는 바로 이 책이 발간된 해를 나타낸 거랍니다.

도널드 크루즈 자신도 어렸을 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들이었어요. 그는 1938년, 뉴저지 뉴어크의 흑인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철도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재봉사였지요. 어머니가 남부 먼 시골 농가 출신이라, 아이들은 여름방학 때마다 기차를 타고 북부인 뉴저지에서 남부인 플로리다까지 외가에 가서 조부모님의 사랑을 흠뻑 받고 오곤 했지요. 명절이나 방학 때면 도시의 자녀들이 시골의 부모를 찾아가는 식의 귀향은 어디서나 볼 수 있지요. 미국에서도 북부의 도시로 간 흑인들이 남부의 시골 고향을 찾는 것이 전형적인 귀향 유형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땅덩어리가 워낙 넓어  2박 3일 꼬박 기차를 타야 했다니 걸린 시간이 짐작을 뛰어넘는군요. 생활을 완전히 접고 갈 수는 없으니 아버지는 나중에 오고, 어머니, 형과 누나, 여동생과 먼저 가곤 했다는데, 이 기차 여행은 후에 그가 그림책을 만드는데 중요한 불씨가 됩니다. 『화물 열차』를 시작으로 『트럭 Truck』, 『비행 Flying』 등 교통에 관한 책들을 (사실은 교통수단 자체보다는 그것으로 얻는 경험들에 관한) 줄지어 내고 나중에는 플로리다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할머니 댁 Bigmama’s』까지 만들거든요.

작가의 부모는 손재주가 많고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났다고 해요. 그 피를 물려받은 도널드도 미술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여 덕분에 학교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고 하네요. 칠판에 지도를 그린다거나 예술적 감각이 필요한 일을 맡아 하곤 했다는데, 얼마나 어깨가 으쓱했겠어요? 하지만 그 당시에 도시의 변두리에 사는 흑인 아이들이 미술 쪽으로 길을 잡기란 쉽지 않았을 터. 고등학교 때 선생님 한 분이 그에게 스승이 되어 그쪽으로 방향을 잡아주고 대학 입학시험 준비를 하게끔 이끌어주었지요. 
그가 들어간 쿠퍼 유니언 대학은 지금도 작지만 강한 대학, 학생 전원에게 장학금을 주는 대학으로 유명해요. 설립자인 피터 쿠퍼가 미국의 증기 기관차 엔진을 발명했다는데, 이 대학에서 공부한 도널드가 『화물 열차』로 인정을 받았으니 묘한 인연이지요? 졸업 후에 그는 동창인 앤 조나스와 결혼해서 뉴욕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해요. 그러다가 징집영장을 받고 입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파병되었다가 제대한 후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지요.

그가 처음 만든 그림책은 『A부터 Z까지 We Read: A to Z』라는 알파벳 책이에요. 제대한 후 일자리를 알아보려면 우선 포트폴리오부터 만들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예전 작업들을 뒤적이다가 조각조각 모아 그림책을 만들겠다고 마음먹지요.  IBM이나 UPS 등의 로고를 만든 폴 랜드도 『외로운 꼬마 1 Little 1』을, 피카소가 ‘현대판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칭송했던 브루노 무나리도 『동물원 Zoo』이란 그림책을 만든 것으로 미루어 보아, 자기도 그림책이라는 도구에 자신의 디자인, 색깔, 타이포그래피 및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담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거지요. 그는 첫 그림책인 알파벳 책을 여느 알파벳 책과는 달리 만들었어요. 보통은 “A is for Apple” 식의 패턴으로 나가는데, 그는 약간 특이하게 “Cc: Corner: 노란색은 어디 있을까?”라는 글을 쓰고, 바탕색은  온통 빨간색으로 처리하고, 한쪽 구석에 노란색 네모를 그려 놓았어요. 알파벳과 위치, 색깔 개념을 결합시킨 거지요. 그 다음 해에 나온 『검은 점 10 개 Ten Black Dots』는 숫자 책으로, 점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것, 점 두 개로 만들 수 있는 것 등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든 책이에요. 이를테면,

1 One dot can make a sun   (점 하나로 해님을 만들거나)
or moon when day is done.   (날 저물면 달님을 만들지.)

이런 식으로 2, 3, 4 나가면서 각 점으로 재미나게 여우의 두 눈이나 뱀 등을 만들어 볼 수 있어요. 단순히 사물의 개수를 세어 보는 게 아니라, 창의성을 가지고 상상력을 발휘해 볼 수 있게 하는 책이지요.

알파벳 책과 숫자 책, 『화물 열차』 모두 그래픽 요소가 강하지만 가장 으뜸은 『트럭』이랍니다. 빨간색 커다란 트럭에 ‘TRUCK’라는 글자가 사선으로 쫘악 좁혀 들며 굉장한 속도감을 주거든요. 도시는 흔히 직선으로 표현되지요. 도널드 크루즈 역시 트럭이 지나가는 교통량 많은 도시를 직선으로 쭉쭉 보여줍니다. 직선으로 그려진 수많은 종류의 다른 차들, 직선 표지판, 직선 화살표 등이 독자의 시선을 유도하는 가운데, 자전거 박스들을 실은 이 트럭은 첫 번째 교차로의 ‘멈춤’ 표지 앞에 서서 신호를 대기하고, 다시 엔진을 부르릉거리며 앞으로 나가지요. 터널을 지나는 차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그곳을 빠져나온 트럭은 큰 도로를 만나 다른 트럭들을 지나치고, 고속도로를 달려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해서 짐을 부리고 이제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요? 처음에는 오른쪽으로 전진하려는 트럭이 마지막 장에서는 왼쪽으로 몸을 틀고 서 있거든요.

단순한 직선들과 빨간색, 파란색, 보라색 등 강렬한 색깔을 사용하던 작가는 중간에 슬쩍 장난을 치고 싶었는지, 곡선으로 얽히고설켜있는 고가도로들을 만들어 놓았어요. 작가의 장난기에 저도 장난감 자동차 하나 슬쩍 그 길 위에 올려놓고 싶은 충동이 드는군요.

이 책은 글자 없는 그림책으로 분류가 되기는 하지만, 본문 글이 없다뿐이지 글자는 많아요. 본문에서 ‘Trucking(운송)’, ‘Moving(이삿짐)’ ‘Highway(고속도로 운행)’, ‘Livestock(가축수송)’이라고 쓰인 트럭도 있고, ‘Speed Limit(제한 속도)’, ‘Tunnel(터널)’ 등을 비롯해서 서쪽, 북쪽, 멈춤 표시 등 도로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은 웬만한 건 다 있답니다.

사실 도널드 크루즈는 팝 아트 뿐 아니라 미래파의 영향도 받았다고 해요.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미래파 운동은 역동성과 혁명성을 기치로 삼았는데, 도널드는 역동적인 기계들, 그 중에서도 기차와 트럭에 관심을 쏟은 거지요. 이미 『화물 열차』로 1979년 칼데콧 영예상을 받은 그는 『트럭』으로도 1981년에 같은 상을 받아요. 그 뒤 그는 『스쿨버스 School Bus』, 『비행 Flying』 등 교통수단에 대한 책들을 이어 냅니다. 그리고 『퍼레이드 Parade』 『박람회 밤 Night at the Fair』에서는 축제의 분위기를 담아내지요.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참고 사이트
http://findarticles.com/p/articles/mi_m2838/is_n1_32/ai_20610477/
http://www.pbs.org/parents/booklights/archives/2009/05/fun-with-books.html
http://www.nccil.org/experience/artists/crewsfam/dcrews.htm
서남희 | 대학에서 역사와 영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지금은 세상살이 자체가 공부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볕 드는 마루에서 만난 그림책과 작가 이야기』 『아이와 함께 만드는 꼬마 영어그림책』을 썼고, 『페페 가로등을 켜는 아이』 『마녀에게 가족이 생겼어요』 『꿀벌 나무』 『작은 새의 노래』 『꼬꼬닭 빨강이를 누가 도와줄래?』 등 많은 책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