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4월 통권 제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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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와 자연

[어린이가 있는 풍경]
너댓 살 적 쌍둥이, 그 어느 날들의 기록 1

이지호 | 2009년 04월

컴퓨터 속을 뒤지다가 쌍둥이에 대해 썼던 글들을 발견했다. 하나하나 읽는데, 기분이 참……. 나는 그 글들을 쌍둥이의 결혼 선물이자 혼수품으로 써 먹을 작정으로 썼다. 늦둥이가 시집 장가갈 때쯤이면 나도 허리가 꼬부라진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 터.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 줄 능력이 지금도 없는데 하물며 그 나이에 있을 리 없고, 설사 있더라도 그리 하는 걸 분명 품위 없는 짓거리로 여겨 입 싹 닦고 돌아앉아 있을 게 뻔하다. 그러나 애비로서 뭔가 쥐어줄 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아이들의 어린 시절에 대한 스케치였다.

정작 살펴보니 글의 편수로는 10여 편, 글을 쓴 햇수로는 2년이 다다. 참 아쉽다. 결혼 선물과 혼수품을 따로 준비할 수밖에 없게 된 것도 아쉽다면 아쉬우나 다른 아쉬움에 비하면 그것은 축에도 못 낀다. 글들 속 쌍둥이는 겨우 4년 전의 쌍둥이인데 그 4년 전 모습을 지금 나는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내가 쌍둥이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또 그렇게 잊어버릴 테지. 내 아이는 내가 잘 안다, 이런 말도 앞으로는 아껴야 할 것 같다. 그러한 글들을 계속 썼더라면, 쓰고 있다면, 쓸 것이라면, 조금은 헤프게 해도 될 말인데.

아쉬움에 대해 주절거리는 것은 이쯤 하고, 대신에 그 글들을 소개한다. 그 글들을 읽으면 내가 느끼는 아쉬움을 쉽게 짐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잉? 당신의 아쉬움이 뭔지 알아보라고 그 알량한 글들을 읽으라고 하는 것이여? 시방? 에이, 급하시긴. 그럴 리가. 내가 글들을 소개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그 글들을 읽으면 누구든지 ‘나도 저 정도는 쓸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 것인데, 그런 생각이 들거들랑 바로 연필을 잡든지 컴퓨터 앞에 앉으라는 것이다. 내 아이에 대해 글을 쓰는 것, 그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은 내 아이를 위하는 일이고 나아가서 나 자신을 위하는 일이다. 나처럼 10여 편만 써도 한 가지는 얻는다. 내 아이는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아주 많이 예쁜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참,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읽어도 괜찮겠다 싶은 글이 있으면 『열린어린이』에 보내 줘도 좋겠다. 『열린어린이』의 양해를 얻어 지면을 늘려 그 글들을 싣기로 한다.

1. 우유가 맛이 없어

8시면 아내는 출근을 한다.
9시 15분이면 쌍둥이는 어린이집 버스를 타러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야 한다.
8시에서 9시 15분까지 쌍둥이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뿐이다. 밥 먹는 일.
그것은 내가 해야 할 일과도 관련된다. 쌍둥이에게 아침밥 먹이기가 내 일이니까.
그런데 이것이 참 어렵다.
쌍둥이가 밥을 잘 안 먹어서라기보다 내가 잘 일어나지 못하기에.

오늘 내가 일어난 시각이 8시 30분이었다.
단디가 나를 깨운 시각이 8시 30분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다.
어쨌든 다행이다. 오늘은 잘 하면 밥을 먹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요놈들이 밥을 안 먹겠단다.

“밥은 맛이 없어.”
이것은 단디의 말이다. 단디는 밥 대신 우유를 먹고 있었다.
우유팩에 빨대를 꽂아 빨아먹고 있는 것을 보니 아내가 꺼내 주고 간 모양이다.
쌍둥이는 아직 혼자서는 종이팩에 빨대를 꽂지 못한다.

“밥은 맛이 없어.”
요것은 서이가 한 말이다.
쌍둥이는 무엇이든 똑같이 하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한다.
오늘 아침에는 서이는 단디와 같은 쪽을 택했다.

서이도 우유를 달랜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200ml짜리 우유가 있었다.
그것을 꺼내 빨대를 꽂아 주었다.
다른 날 같으면, 멍멍이컵에 따라줄까, 하고 물어 보았을 테지만,
쌍둥이가 쌍으로 밥 안 먹겠다고 하는 바람에 나는 이미 심통이 나 있었다.

서이가 우유를 한 모금 빠는 듯했는데, 맛없어서 못 먹겠다고 한다.
“야, 임마 그것도 따라하냐?”
단디는 밥만 맛없다고 했는데, 서이 너는 우유까지 맛없다고 하느냐는 나의 이죽거림이었다.
“그래도 맛없어.”
서이는 그렇게 말하고, 우유팩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장난감 자동차를 집어들었다.

이왕 따 놓은 우유, 나라도 마셔야겠다 싶었다.
한 모금 넘기는데, 정말 맛이 없었다. 아니, 맛이 이상했다.
요구르트처럼 걸쭉한 것이 목을 타고 넘어간다.
부리나케 싱크대로 가서 입안에 남아 있는 우유를 뱉어냈다.
그리고 팩에 든 우유는 싱크대에 버렸다.
상해도 제대로 팍 상한 우유였다.

어찌나 놀랐던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많이 마셨냐?”
서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다.
“맛없어서 안 먹었어.”

아이가 제 입맛에 따랐기 망정이지,
내 눈치 주는 말에 따랐다면 자칫 큰일 날 뻔했다.
조선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고 했던가?
아이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할 뿐 아니라 헤아려 들어야 하는가 보다.
(2004. 10. 13. 화)

2. 엄마처럼 쎄게, 엄마처럼 쎄게

나도 가끔은 쌍둥이를 놀이터로 데려간다.
아파트에 딸린 놀이터라 그네, 미끄럼틀, 시소 등이 다다.
놀이터에 가면 쌍둥이는 그네부터 달라붙는다.
놀이터에는 그네가 두 개 있는데,
그 두 개가 모두 임자 없이 혼자 흔들거리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도 쌍둥이는 아주 쉽게 그네타기를 즐길 수 있다.

그네가 하나만 비어 있어도 쌍둥이는 같이 달려든다.
그네만큼은 어느 누구도 양보하지 않는다.
쌍둥이는 차례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도 알고,
차례를 지켜도 소용없는 것이 있다는 것도 안다.
엄마가 동시에 두 놈을 업어 줄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고,
엘리베이터 단추는 한 놈만이 누를 수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렇게 똘똘한 쌍둥이가 차례가 지켜야 할 그네에서 차례를 지키려 하지 않는다.

두 놈의 작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봤다.
둘이서 그넷줄 하나씩 잡고 밀고 당기며 징징거리면
옆 자리에서 그네를 타는 놈이 슬그머니 일어선다는 것을
경험으로 터득한 것이 아닌지.

쌍둥이는 그날도 그런 방법으로 그네 두 개를 금방 차지했다.
그네 두 개를 동시에 밀어 주는 것도 요령이 필요하다.
한 놈이 앞으로 나가면 한 놈이 뒤로 처지도록 해야 한다.
두 팔을 엇갈리게 하여 하나씩 밀어야 그렇게 될 수 있다.
그것도 제법 힘이 든다.

“아빠, 쎄게!”
쌍둥이는 그네에 올라타면 이 말부터 한다.
시동을 걸고 가속을 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것이다.
엇박으로 밀어야 할 때는 그 시간이 더 길어진다는 것도 아직은 모르는 것이다.
참말로, 아이들은 겁이 없는 것 같다.
높이높이 날고 싶고, 빨리빨리 왔다갔다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그래서 그네에서 내릴 때까지, ‘아빠, 쎄게!’만 연발한다.

그날은 달랐다.
쌍둥이 입에서 나온 말은 나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아빠, 엄마처럼 쎄게!”
서이가 그러니까 단디도 그런다.
“엄마처럼 쎄게!”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쌍둥이를 키우면서 팔뚝이 굵어졌다고 아내가 투덜거리는 말을 여러 번 했다.
팔목의 인대가 늘어나서 두 번이나 깁스를 했을 정도니,
팔뚝이 굵어질만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힘까지 세졌단 말이던가.
아니, 힘이 세져도 그렇지, 얼마나 세게 그네를 밀었으면 쌍둥이가 저런 말까지 할까.
나도 그네가 꽤 높이 올라가게 밀고 있는데 그보다 더 높이 올라가게 밀었다는 것 아닌가.
쌍둥이만큼이나 겁이 없는 여편네라니까. 애들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날은 ‘엄마처럼 쎄게!’라는 말만 들으면서 쌍둥이의 그네를 밀었다.
집에 돌아가면 아내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물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작 집에 와서는 깜빡했다.
며칠 후였다.
그날은 일찍 집에 들어갔다.
아내가 퇴근하여 쌍둥이랑 같이 집에 있을 시간인데도,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문 밖이 왁자지껄했다.
아내와 쌍둥이였다.
아내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내게 물었다.
쌍둥이를 그네 태워줄 때 어떻게 밀어 주느냐는 것이었다.
놀이터에서 그네를 밀어 주는데, 쌍둥이가 이러더란다.

“아빠처럼 쎄게!”
“아빠처럼 쎄게!”
쌍둥이가 벌써 심리전을? 설마.
(2004. 10. 15. 목)

3. 여기는 우리 방

며칠 전의 일이다.
그리고 그 며칠 전의 며칠 전에도 있었던 일이다.
밤 아홉 시 또는 열 시, 아니 그 사이의 어떤 시각이었을 것이다.
큰방은 잠자리 준비로 시끌시끌했다.
나도 잠시 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몸이 찌뿌듯한 게, 아무래도 등이 방바닥 덕을 좀 봐야 할 것 같았으니까.

큰방에 들어서려는데 서이가 두 팔을 벌리고 문 앞을 가로막는다.
“여기는 우리 방!”
이불 위에서 뒹굴던 단디도 벌떡 일어서더니 서이 옆에 다가서서 두 팔을 벌린다.
“여기는 우리 방!”
우리라. 우리라면 당연히 그 속에 나도 포함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쌍둥이가 하는 짓을 보면 그게 아닌 것 같다.

뻔히 짐작하면서도 확인차 묻는다.
“우리가 누구야?”
“엄마, 서이, 단디.”
서이의 대답이 거침이 없다.
세상에, 그럼 난?
기분이 좀 구겨지려고 한다.
네 살배기의 말에 이러는 나도 참.

“그럼, 아빠는 어디서 자?”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묻는다.
단디도 주저하지 않았다.
“거실에서 자.”

일단 맥없이 물러난다.
저 어린 것들과 시시비비를 가릴 수도 없는 일이니.
베란다에 서서 담배를 한 대 피워 문다.
어쩌겠는가, 다 내 업보인 것을.
돌이켜보니, 쌍둥이랑 같은 시각에 잠자리에 든 기억이 없다.
아예 집에 늦게 들어오거나 일찍 들어와도 쌍둥이가 다 잔 다음에 잠자리에 들었다.

이것까지는 그래도 참을 만했다.
어느 날인가 단디가 이러는 것이었다.
“서이 오빠! 서이 오빠는 아빠 아들 해. 나는 엄마 딸 할 테니.”
단디는 제 기분에 따라서 서이를 이렇게 불렀다 저렇게 불렀다 한다.
서이라 하기도 하고 오빠라 하기도 하고 서이 오빠라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는 그게 문제가 아니다.
아빠 아들과 엄마 딸로 갈라서야 할 판이니까.

아, 그러나 돌려세워진 건 나 하나뿐이었다.
“싫어. 난 아빠 아들 안 해. 엄마 아들 할 거야.”
쌍둥이가 이렇게 적나라하게 가르쳐 주었건만,
그래서 나도 생생한 깨달음을 얻었건만,
결국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놈의 일이란 게 뭔지.
(2004. 10. 18. 월)

4. 남자와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다

서이와 단디, 드디어 오줌 가리기 훈련에 돌입했다.
서이의 경우. 먼저 유아용 변기 앞에 세운 다음,
바지를 내리고 기저귀를 끌러 고추를 내놓고 오줌을 눌 때까지 ‘쉬이―'.
그리고 무작정 기다린다.

문제는 단디였다.
가스나라서 유아용 변기에 앉힐 수 있어야 훈련이고 뭐고를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요놈이 영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다.
막무가내였다. 자기도 서서 볼 일을 보겠다는 것이다.
단디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하겠다 싶었다.

똑같은 사람인데, 게다가 쌍둥이인데,
누구는 서서 볼 일 보고 누구는 앉아서 볼 일 보냐고.
단디한테 맞장구 칠 수는 없는 일.
그렇다고 서이더러 앉아서 볼 일 보라 하여 성의 차이를 감출 수도 없는 일.
난감한 상황이지만, 이럴 땐 모르는 척하는 것이 상책.
아내와 나는 논의 끝에 ‘시범과 모방’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로 했다.

뭐, 별 거 아니다.
단디가 보도록 화장실 문을 열어 놓고 아내가 볼 일을 보는 것이다.
물론 아내는 변기에 앉아서 볼 일을 본다. 남들 아내처럼 내 아내도 여자다.
결과가 어땠냐고? 아이를 물로 봤다간 큰 코 다치겠더라.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단디의 서서 볼 일 보기는 한동안 계속 됐다.

그러던 단디가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유아용 변기에 앉게 되었다.
단디에게 그것을 가르친 것은 아무래도 단디 자신의 몸이었던 것 같다.
가스나가 서서 볼 일을 보면 어떻게 되겠는가.
오줌이 이리 튀고 저리 튀고. 다리를 타고 흘러내리기까지 한다.
쌍둥이의 평등을 주장하던 단디도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천하의 깔끔쟁이라.

서이와 단디는 어린이집에 갈 때마다 가방을 메고 간다.
그 가방에는 아내가 공식적으로 챙겨주는 것이 있고,
쌍둥이가 비공식적으로 집어넣는 것이 있다.

공식적인 물건은 어린이집에서 밥을 받아먹을 도시락통,
어린이집에서 색칠 놀이할 스케치북,
어린이집에서 이런 저런 알림 사항을 적어 주는 수첩 등이다.

비공식적인 물건은, 가방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너무 다르다.
서이가 꼭 가져가는 것은 꼬마자동차다.
서이는 자동차라면 환장한다. 꼬마자동차 세트를 몇 개 사 줬는지 모른다.
(에공, 그러고 보니, 내가 사 준 것은 하나도 없네.)
서이는 꼬마자동차 중에서도 특히 삐뽀차를 좋아한다.
‘삐뽀 삐뽀’ 하는 소리를 낼 수 있는 차,
경찰차, 소방차, 앰뷸런스 같은 차가 바로 삐뽀차이다.

서이는 한꺼번에 여러 개의 꼬마자동차를 갖고 놀기 때문에
단디와 나는 가끔은 서이한테 하나씩 얻어서 같이 놀 수가 있다.
고집을 부리면 열 개도 스무 개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삐뽀차만큼은 절대로 손을 못 대게 한다. 어림도 없다.
그러나 서이가 가방에 넣는 자동차는 삐뽀차가 아니다.
어린이집에 가져갔다가 잃어버린 쓰라린 기억 때문인지
삐뽀차는 집에 고이 모셔둔다.

서이가 두 번째로 집어넣는 것은 줄 달린 강아지 인형이다.
서이는 그 강아지 인형을 어디든 끌고 다닌다.
비록 인형이지만 불쌍해 보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바로 그 강아지 인형을 어린이집에 가져가는 것이다.
세 번째는 팽이다. 네 번째는 총이고.

단디는 어떠냐고?
단디는 제 몸을 치장하는 물건을 챙긴다.
머리띠가 첫 번째이다. 그것도 두 개가 기본이다.
두 번째는 선글라스다.
오늘 아침에는 까만 선글라스를 직접 쓰고 어린이집으로 갔다.
세 번째는……. 네 번째는……. 아, 생각이 안 난다.
어쨌든, 서이와 단디는 너무 다르다.

쌍둥이가 깨기 전에 아내가 출근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내가 쌍둥이에게 옷을 갈아입혀야 한다.
잠옷이나 내복 차림으로 어린이집에 보낼 수는 없으니까.

서이는 눈 깜빡 할 사이에 갈아입힐 수 있다.
웃옷 입어라 하면 웃옷 입고 바지 입어라 하면 바지 입는다.
입히려면 벗겨야 하는데, 벗기는 것도 간단하다.
벗어라, 말만 하면 그냥 훌러덩이다.

단디는 벗기는 것부터가 장난이 아니다.
벗기는 것을 아예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예컨대, 치마를 입고 있을 때가 그렇다.

단디는 제 맘에 드는 치마를 보면 정신을 못 차린다.
한밤중이라도 입어야 되고, 입었다 하면 벗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잘 때는 어떻게 하느냐고? 그냥 입은 채로 잔다.
그걸 야단치면 단디는 이상한 얼굴로 쳐다본다.
하긴, 잠옷이 따로 있나. 잠 잘 때 입는 옷이면 잠옷이지. 그게 치마라 해도.

다음날 아침에도 치마를 벗지 않는다. 고 모양 고대로 어린이집에 간다.
아내는 쌍둥이가 그날 입을 옷을 거실 위에 올려놓고 출근한다.
그런데 단디는 종종 제 엄마가 내놓은 옷을 거부한다.
이럴 때는, 차라리 단디가 어제 치마를 입고 잤더라면……, 한다.

아내와 함께 하는 일 중에 내가 가장 진저리를 치는 것은
아내가 옷가게에서 옷 고르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런 내가 단디가 옷 고르는 것을 일주일에 두 번은 꼭 지켜봐야 한다.
아내는 내 눈치라도 보지만 단디는 그런 것도 없다.
아이고, 내 팔자야. 이런 소리가 절로 난다.
옷 고르기가 끝나면 옷 입히기.
이것도 장난이 아니다.

정말, 여자는 태어나는 것 같다.
하하하, 그러나 나는 안다.
머지않아 남자와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진다는 내용으로
다시 글을 쓰게 되리라는 것을.
(2004. 10. 29.)

※ 이 글에 실린 그림은 『무서운 도깨비 찾아가요』(이수진 그림, 임정자 글, 우리교육, 2008)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 편집부
이지호│진주교육대학에서 어린이 문학과 국어 교육을 가르치면서 어린이 문학 관련한 논문과 평론을 씁니다. 평론집 『동화의 힘, 비평의 힘』과 『글쓰기와 글쓰기교육』 등을 펴냈고 『너는 커서 뭐 할래?』 등 동시집도 엮어 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