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4월 통권 제77호
속 깊은 책 이야기
어린이와 자연
책 세상 나들이
즐거운 책 읽기
열린어린이 서평
주목 받는 새 책
열린어린이가 권하는
이 달의 책

속 깊은 책 이야기

[그림책과 작가 이야기]
호기심과 탐색의 화가 ― 데이비드 디아즈 1

서남희 | 2009년 04월

역사에서 늘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제 중 하나는 과연 기록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지요. 승자의 기록이 거의 대부분이고, 그것도 다 남아 있는 게 아니니까요. 김광규 시인의 「묘비명(墓碑銘)」이 그 문제를 가장 잘 대변하고 있지요.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엇을 남길 것이냐

이 시를 읽은 뒤부터는 비석과 마주치면 ‘너도 그놈이냐?’ 하고 묻는 버릇이 생겼답니다. 비석까진 안 가더라도, 기록이란 게 시각에 따라 제각각이라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답답해서 가슴 칠 일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이번 용산 참사를 보면서, 과연 이것의 ‘공적’ 기록과 ‘사적’ 기록은 얼마나 다를까, 책 동네에서는 이것이 어떻게 기록될까, 잠시 생각했습니다. 이념 때문에 고초를 많이 겪은 우리 나라에서는 이념 그 자체이든, 실은 이념적 문제가 전혀 아닌데도 그런 색깔이 덧입혀진 문제에 대해서든, 돌을 맞을까봐 입을 다무는 경향이 강하지요. 이런 주제가 그림책으로 기록되는 날이 올까요? 촛불 시위에 관한 그림책은 나올까요? 유모차 엄마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림책으로 다루어질 수 있을까요? 자기 검열이 강한 사회 특성상 그런 그림책이 언제쯤 나올지 짐작가지 않는군요.

Image © Gordon Trice
그런 점에서는 미국이 좀 더 자유롭지만, 그것을 어떤 시각에서 다루느냐에 따라 관계된 이들은 불편할 수도 있지요. 오래 전에 이브 번팅의 글에 데이비드 디아즈가 그림을 그린 『연기 자욱한 밤』을 처음 본 순간, ‘아, 이 책은 그림은 참 좋은데, 우리 나라에 번역되지는 않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작가가 배경이 되는 구체적 사건을 명시하진 않았다 해도, 당시의 사회적 이슈였던 LA 폭동을 다룬 데다, 흑인의 입장에서 기록된 듯하면서도 정작 가해자인 백인 경찰관의 구타사건은 쏙 빼놓고, 피해자로 얽혀 있는 한인과 흑인 모두 사이좋게 살자는 내용을 담은 그림책이거든요. 역사 서술이 아닌 다음에야, 그림책이 모든 것을 다 기록할 의무는 없고, 또 다 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우리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는 폭동의 원인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고, 사이좋게 살아야 한다는 원칙만 강조한 마땅찮은 책이었지요. 그런데 나중에 이 책이 우리 나라에서 번역 출간된 것을 보고 꽤 놀랐습니다. (지금은 절판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책을 펼치면 벽지 조각, 마대 조각, 페인트 부스러기, 각종 종이들이 뾰족뾰족 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핀으로 고정되어 있고, 왼쪽에는 까맣게 탄 성냥들이 보이는군요. 폭동의 와중에 누군가 방화를 하고 불길이 일어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죠.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창가에서 다니엘과 엄마는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유리창을 부수거나 가게에서 텔레비전을 들어내고 있는 장면을 봅니다. 이 장면들은 검은 틀 안에 아크릴 물감을 써서 묘사했고, 배경에는 포장 랩, 깨진 유리 조각, 어지러운 문양의 포장지 사진들로 콜라주를 해 놓았습니다. 글은 하얀 네모 칸 안에 들어가 있지만, 그것조차 아래쪽을 뾰족뾰족 오려 놓아 위기감을 드러내지요.

어린 다니엘은 그런 행동을 하며 신이 난 것 같은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신발 가게에서 신발을 던지는 사람들, 다니엘 가족은 가지 않는 김씨 아줌마네 가게에서 시리얼 상자와 쌀부대를 들고 나오는 사람들. 배경 사진에는 온 사방에 시리얼이 흩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이 책이 나왔을 때는 분명히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간 물체(옷 가게의 마네킹)가 나오는 장면을 보고 섬뜩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 번역본을 보니 그 장면이 없네요. 비판 때문에 나중에 원본에서 빠졌거나 번역본 낼 때 알아서 뺐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군요.

아무튼 이 모든 아수라장에 어린 다니엘은 혼란스럽기만 하지요. 사람들은 그런 행동을 하는데 이상한 기쁨마저 느끼는 것 같거든요. 파괴하고 훔치면서 이들은 행복한 듯 보입니다. 다니엘은 그 모습이 더욱 혼란스럽지요.

그런데 바로 그날 밤, 엄마는 다니엘을 깨웁니다. 아파트에 불이 나서 대피를 해야 했던 거지요. 그런데 다니엘의 고양이인 재스민을 찾을 길이 없었어요. 공포에 사로잡힌 다니엘은 엄마와 대피소로 가서 하룻밤을 지내야 했는데, 거기서 이웃인 김씨 아줌마도 자기 고양이를 잃은 채 와 있었어요. 평소에 두 집은 사이가 좋지 않고, 고양이들 역시 주인 닮아 사이가 나빠 보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대곤 했지요. 다니엘의 엄마도 김씨 아줌마의 가게에서 물건을 사지 않았어요. 대피소에서 둘은 고양이 걱정에 슬퍼하고 서로 위로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소방대원이 고양이들을 안고 들어왔어요. 늘 싸우기만 했던 고양이들은 소방대원의 품속에서 사이가 좋아져 있었어요. 김씨 아줌마와 다니엘네도 이런 상황을 겪으면서 서로 사이가 좋아지게 되고요. 결국 고양이들이 인간들에게 사이좋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준 셈이지요.

책은 그렇게 끝나지만, 글쎄요. 한인 교포들의 가게를 흑인들이 방화하고 약탈하는 바람에 한인들이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총까지 들고 스스로 경비에 나서야 했던 그 상황을 우리가 알고 있는데, 그런 결말은 대단히 황당하지요. 다니엘이 보았던 약탈 당한 가게는 사실상 김씨 아줌마의 가게니까요.

이브 번팅은 시각에 따라 논쟁적일 수밖에 없는 글을 썼지만, 그림을 담당한 데이비드 디아즈는 이 책으로 칼데콧 메달을 받아 이름을 날리게 되었어요. 그는 브라질 여행 때 했던 스케치에서 영감을 얻어 그림을 구상하고, 검은색 틀 안에 그림을 넣고, 배경에는 정교한 사진을 콜라주하는 스타일을 넣었는데, 이 그림들은 사건이 고조되면서 더욱 생생하고 격해졌다가 고양이들이 화해하고, 인간들도 화해하는 결말 부분에는 상당히 부드럽지요. 이 그림들 덕분에 그는 샤갈이나 조르주 루오와 비교할 만하다는 평단의 평가를 받았지요. 그러나 위대한 화가들과 견주어지는 기분은 어떨까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위대한 이름들이 제게 영감을 주긴 하지만 그들과 경쟁할 마음은 없습니다. 어떤 속박도 떨쳐 내고,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해 이야기하는 제 나름의 방식을 발전시키는 게 제 목표입니다.”

나름대로의 방식을 발전시켜 그림을 그리겠다는 그의 소망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간직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단어 빈 칸 채워 넣기를 시켰는데, 코 그림 밑의 ‘n___se’의 빈 칸에 어린 데이비드는 착실하게 ‘O’를 채워 넣었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 O가 사람 얼굴처럼 생긴 거예요. 그래서 빨간 연필로 O에 눈 코 입을 다 그려 넣었지요. 그때부터 그는 계속 사람 얼굴을 그리며 살고 있답니다. 당시에는 ‘일러스트레이터’라는 단어를 몰랐던 그는 그때부터 자기는 ‘drawer’이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네요. ‘그리다’라는 뜻의 ‘draw’에 ‘er’만 갖다 붙이면 사람이 되는 줄 알고 어린 데이비드는 “I will become a drawer.”이라고 했겠지만, 선생님은 깔깔거리지 않았을까요? ‘drawer’은 서랍이란 뜻이니까요.

예술적 재능이 있으면 자식이 나중에 배를 주릴까봐 걱정스러운 게 부모의 마음이죠. 데이비드의 부모도 그림을 그만두고 ‘덜 위험한’ 직업을 갖는 게 어떠냐고 제안할 정도였어요. 그러다 데이비드가 16살 때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림은 그의 슬픔을 위로해 주었고, 학교 선생님 한 분이 예술적 재능이 있는 학생들에게 그림대회에 참석하게 해 주자 그는 나가는 대회마다 상을 받으면서 자신의 재능을 확인하게 되지요.

초현실주의 조각가인 두안 핸슨 밑에서 도제로 7년간 일하기도 했던 그는 후에 포트 로더데일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남부 캘리포니아로 터를 옮겨 그래픽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다가 아예 ‘디아즈 아이콘’이라는 디자인 및 일러스트레이션 회사를 세웁니다. 그런데, 일러스트레이션의 세계란 게 자꾸만 빠져드는 묘한 매력이 있어, 나중에는 디자인 프로젝트가 들어와도 거절했다고 하네요. 이유는 단 하나, 진정한 열망인 일러스트레이션에 지금 몰두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후회할까 봐서였다네요. 『아틀랜틱 먼슬리』 등 여러 잡지에 일러스트레이션을 싣고, 하코트 출판사의 의뢰로 책 표지 작업도 많이 했는데, 그 중 하나가 그림책 편집자 눈에 들어 이브 번팅의 글에 그림을 그려 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받게 되지요. 그래서 나온 『연기 자욱한 밤』으로 홈런을 친 거고요.

참고 사이트
http://www.nccil.org/experience/artists/diazd/index.htm
http://www.papertigers.org/gallery/David_Diaz/index.html
http://patriciamnewman.com/diaz.html
http://www.bookpage.com/9605bp/childrens/daviddiaz.html
서남희 | 대학에서 역사와 영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지금은 세상살이 자체가 공부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볕 드는 마루에서 만난 그림책과 작가 이야기』 『아이와 함께 만드는 꼬마 영어그림책』을 썼고, 『페페 가로등을 켜는 아이』 『마녀에게 가족이 생겼어요』 『꿀벌 나무』 『작은 새의 노래』 『꼬꼬닭 빨강이를 누가 도와줄래?』 등 많은 책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