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1월 통권 제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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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그림책과 작가 이야기]
뜨개질로 나누고, 그림으로 나누고 ― 엘레나 오드리오솔라 1

서남희 | 2009년 01월

중학교 때 비누로 두상을 만들어 오라는 방학 숙제가 있었어요. 개학해서 숙제 검사를 하던 미술 선생님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지요. 두상들은 저마다 어린 예술가들의 얼굴과 너무나도 닮았거든요. 코가 큼직한 아이가 만든 것은 코가 큼직하고, 인중이 긴 아이가 만든 것은 남달리 인중이 길었답니다.

『이야기 담요』 표지를 봅니다. 색색실로 짠 폭신하고 도타워 보이는 담요 위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네요. 볼이 발그레한 그 동그란 얼굴과 스페인의 그림 작가 엘레나 오드리오솔라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봅니다. 어렸을 때의 작가도 볼이 발그레하고 동그랬을 것만 같군요. 그 얼굴에서 몽글몽글 피어나던 호기심이 자라 이런 그림을 그렸을 것 같은 느낌.

이번엔 앞표지와 뒤표지가 다 보이게 『이야기 담요』를 널찍하게 펴 봅니다. 왼쪽 끝에 있는 멍멍이가 담요와 같은 색, 같은 무늬로 된 목도리를 포근하게 감고 있네요. 털실로 짠 담요, 털실로 짠 목도리. 이 둘의 색깔과 무늬가 같다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게다가 털실과 이야기란 술술 풀린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야기 담요에서는 대체 어떤 이야기가 풀려나올까요?

눈이 소복소복 쌓인 마을에 바바 자라 할머니가 살고 있지요. 아이들은 할머니네 깔려 있는 낡고 포근한 담요에 옹기종기 모여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신발은 나뭇가지에 얹어 놓거나 매달아 놓았네요. 할머니가 되면 눈이 어두울 것 같죠? 니콜라이의 신발에 난 구멍을 금방 알아채는 눈 밝은 할머니도 있답니다.

자, 할머니는 니콜라이에게 따스한 양말을 떠 주고 싶어요. 그런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털실 장수가 마을에 못 들어와서 실은 없고……. 이를 어쩐다? 할머니는 털실 공 굴리듯 요리조리 생각을 굴려 봅니다. 오오~ 담요를 살짝 풀어서 니콜라이에게 양말을 떠 주면 되겠군요! 그런데 영화 「집으로」의 할머니는 숟가락을 비녀 대신 꽂고 있는데, 바바 자라 할머니는 뜨개바늘을 꽂고 있네요. 「집으로」의 할머니는 아이가 ‘치킨’을 먹고 싶다니까 닭백숙을 해다 바치지요. 우리 문화란 애정이 ‘먹을 것’으로 표현되니, 숟가락을 꽂았고, 이 책에서는 애정이 ‘뜨개질’로 표현되니 바늘이 비녀자리를 차지하는군요.

할머니는 담요를 풀어 양말을 뜨고, 모두가 새근새근 잠든 깊은 밤에 눈길을 더듬더듬 헤치고 가서 니콜라이네 집 앞에 양말을 살그머니 놓고 오지요. 종종걸음으로 돌아가는 뜨개할머니의 머리에는 딸려간 빨간 털실이 흩날리고, 아무도 안 봤을 것 같지만, 슬그머니 바라보는 건 밤눈 밝은 부엉이.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면 너무 심심하죠. 어느 날, 우체부 아저씨의 가방에 남몰래 누가 목도리를 놓고 갑니다. 선생님에게는 따스한 장갑이, 좀먹은 낡은 숄을 두르고 다니던 반찬가게 아줌마는 새 숄을 두르고 나타나지요. 그런데, 보세요. 동네 사람들이 깜짝 선물을 받으면 받을수록 이야기 담요가 점점 좁아져서 아이들은 이제 서로 몸을 붙이고 앉아 있군요.

아기에겐 포근한 새 담요가 생겼고, 털이 드문드문 난 고양이는 폭신한 새 외투를 입고 한껏 몸을 부풀리며 가르랑댔답니다. 그리고 이야기 담요는 이제 한 올도 안 남았지요. 자, 여기서 아기가 두르고 있는 새 담요를 보세요. 새 한 마리가 빨간 털실을 풀어내고 있지요? 이렇게 엘레나는 깜짝 선물이 어디서 왔는지 독자들에게 실마리를 살짝 보여 주고 있어요.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실마리를 보고도 못 깨달으니, 누가 이 선물을 가져다주는지 그저 궁금한 마음만 모락모락 일어날 뿐이에요. 그래도 아이들은 눈썰미가 있네요. 한 자리에 모인 양말과 목도리와, 숄과 담요 등등을 보더니 그게 할머니네 낡은 이야기 담요 같다고 소리쳤으니까요.

아~ 그러니까 할머니는 이야기 담요를 솔솔 풀어내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떠 준 거예요. 이젠 사람들이 보답할 차례. 저마다 자기네 담요에서 털실을 풀어내 색색가지 털실을 할머니네 문 앞에 쌓아 놓았어요. “할머니, 이야기 담요를 새로 짜 주세요.”라는 글귀와 함께.

할머니네 모여 있는 털실 뭉치들을 보세요. 아직은 겨울이지만, 봄이 곧 올 거라고 살그머니 알려주듯이 저마다 예쁜 꽃 모양으로 환하게 피어나 있지요? 다음 장에 보면 마을 사람들이 갖다 준 털실로 할머니는 알록달록한 새 이야기 담요를 짜 놓았어요. 아이들은 그 위에 옹기종기 앉아 있기도 하고 뒹굴거리기도 하며,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지요. 뭐든 서로 나누며 사는 어느 동네 사람들 이야기였어요.

여기서 끝나면 심심하죠. 이번에도 할머니는 알렉산드라의 스웨터에 구멍이 뽕~ 난 것을 알아봤지 뭐예요. 물론 할머니는 깜짝 선물을 해 주고 싶었지만, 이야기 담요를 짜는 데 어느새 일 년이 흘렀나 봐요. 언덕에 쌓인 눈이 아직도 안 녹아 동네에서 털실을 구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나니, 할머니는 빙그레 미소를 짓지요.

마지막 페이지 그림을 보면 마루 어디선가에서 올올이 풀려나온 실로 할머니가 뜨개질을 하고 있어요. 할머니 머리에 꽂혀 있던 뜨개바늘은 어디 있을까요? 당연히 손에서 열심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지요. 창밖의 풍경은 나뭇잎 다 떨어지고, 눈 쌓인 겨울. 그래도 안락의자에서 동그란 얼굴로 뜨개질을 하는 할머니를 보면 마음이 다사로워진답니다.

거울을 보고 몇 십 년 후를 상상해 그렸나 싶을 정도로 이 할머니와 닮은 엘레나 오드리오솔라는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산 세바스찬에서 태어났어요. 바스크, 하면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분리 독립 운동이 떠오르는 곳이지요. 하지만 남의 나라 역사와 문화에 대해 그 나라 사람한테 섣불리 아는 척하면 안 된다는 것을 엘레나와의 이메일을 통해 깨달았답니다. 작가 인터뷰를 하느라고 몇 가지 질문을 보냈다가, 바스크 얘기가 나와서 “바스크의 분리 독립 운동을 이해해요. 우리 나라도 일본의 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어쩌고 저쩌고 몇 줄 써 보냈더니, 바스크 지방에 사는 사람은 어떨 것이다, 라는 제 선입견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답장이 왔더군요. “영어로 설명하자니 너무 어려운데 (중략) 바스크 해방운동 같은 건 없어요. 극소수만을 대표하는 바스크라는 이름을 달고 사람들을 죽이는 ETA라는 테러리스트 집단이 있을 뿐이지요. 그들은 극소수만을 대표해요. 적어도 날 대표하진 않지요. (중략) 지금은 그 운동은 불가능하고, 난 이것을 이해하지 못해요. 어쨌든, 살해는 내게는 전혀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에요.”라고 그녀는 썼어요.

전 순간 좀 창피해졌어요. 병아리 눈물만큼도 모르는 주제에 틀을 딱 만들어 놓고 아는 척했으니……. 어쩌면 바스크 지방 중에서도 프랑스와 가까운 해변 지역에 있고, 영화제가 열리는 산 세바스찬이 고향인 엘레나로서는 스페인의 햇빛과 문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또 그것들을 향유하며 자란 세대였는지도 모르지요. 어느 사이트를 보니 엘레나가 ‘손에 연필을 들고 태어났다.’는 표현이 있는데, 입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면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이건 무슨 소리? 아, 알고 보니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화가였다네요.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 그림 재주를 갈고 닦아 엘레나는 순수미술과 디자인을 공부하고 광고회사에서 8년 동안 일했어요. 그러다가 삽화가의 길로 접어들었지요. 원래부터 그렇게 할 생각은 아니었고, 그저 물 흐르는 대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고 해요.

광고 일러스트레이터들이 그림책의 세계로 방향을 바꾸거나, 아예 겸업하는 일은 자주 있지요. 『바다가 보고 싶었던 개구리』를 그린 기 빌루는 오랫동안 『애틀랜틱 먼슬리』에 촌철살인적인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렸고 『잠잠이』, 『으뜸 헤엄이』의 작가 레오 리오니는 경제학자 → 광고회사의 아트 디렉터 → 그림책 작가로 여정을 바꾸어 갔지요.

무슨 경험이든, 일단 쌓아 두는 것이 앞날에 도움이 되지만, 엘레나는 특히 광고나 그림책 삽화를 그리는 일은 ‘텍스트를 해석’해서 그려내는 것이므로 오랫동안 광고 일을 한 것이 그림책 일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다음호에 계속)

인용된 책과 사이트
『이야기 담요』 페리다 울프·해리엇 메이 사비츠 글, 엘레나 오드리오솔라 그림, 서남희 옮김, 국민서관, 2008
http://www.loscuatroazules.com/index2.php?seccion=autores&idioma=en&id=6
http://www.alhondigabilbao.com/ingl/ilustradores_odriozola.htm
http://www.euskonews.com/0389zbk/elkar_es.html
http://elblogdepencil.wordpress.com/2006/11/02/cuando-sale-la-luna-elena-odriozola
서남희 | 대학에서 역사와 영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지금은 세상살이 자체가 공부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볕 드는 마루에서 만난 그림책과 작가 이야기』 『아이와 함께 만드는 꼬마 영어그림책』을 썼고, 『페페 가로등을 켜는 아이』 『마녀에게 가족이 생겼어요』 『꿀벌 나무』 『작은 새의 노래』 『꼬꼬닭 빨강이를 누가 도와줄래?』 등 많은 책을 우리 말로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