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1월 통권 제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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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작품 읽기, 작가 읽기]
나의 삶, 나의 성장이 동화 속에 있다 - 황선미론 1

김서정 | 2009년 01월

한 해 동안 작가론을 연재하기로 한다. 중견에서 신인까지, 나의 한국 동화 읽기에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지는 작가와 그 작품을 찾아 짧게나마 요모조모 뜯어보는 작업이다. 한 작품 꼼꼼히 읽기, 테마 별로 작품들 읽기, 작품에 연관된 작가론 쓰기는 해 본 적이 있는지라 조금 다른 방식을 찾다가 작가 인터뷰를 곁들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작가가 한 말을 그대로 풀어내면 글을 좀 더 쉽게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속셈이 거든 생각이다.

그러나 첫 글을 쓰면서 그게 얼마나 큰 오산이었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어렵게 만든 인터뷰 자리를 어영부영 끝내고 나서야 물었어야 했던 말, 들었어야 했던 이야깃거리가 뒤늦게 쏟아져 나오는 거다. 작가의 말이 튕겨져 나가거나, 반대로 심하게 감정이입이 되는 부분들도 골칫거리였다. 아무래도 작가의 심경과 의도를 선선히 전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할 수 없다, 평론은 평론가의 창작이니, 그 안에 나를 집어넣는 일을 아무래도 피할 수가 없을 듯하다. 하여 아래에서 인용문 형식으로 표기된 대목들은 작가의 말을 토대로 했지만 그 말을 고스란히 옮긴 것이 아니라 나의 해석과 정서가 합해진 공동창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독자들이 작가를 오해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 그것도 아니다. 나온 글을 읽고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것은 독자의 권리이자 의무이니, 이 작가론이 읽힌 뒤 나오는 이해 혹은 오해, 공감 혹은 반감은 작가와 평론가와 독자의 공동창작일 것이다.

한국 동화문학의 21세기는 2000년 나온 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과 함께 새롭게 열렸다고 해도 큰 과언은 아닐 것이다.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을 지킨다는 멀건 서정과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역사와 현실을 알려준다는 빡센 신념 사이에서 “동화는 삶을 표현하는 한 방식이며, 아이들과 더불어 나 또한 성장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하나의 행위”임을 선언하고, 그 명제를 치열하고 생생하게 형상화해 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로써 21세기 한국의 동화는 인디언 보호구역처럼 애처롭게 설정된 변방의 영토를 벗어나 문학적 자기주장의 발걸음을 성큼 떼어놓기 시작한 셈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마당을 나온 암탉과 함께, 마리아 니콜라예바의 표현을 빌자면, ‘게토’를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마당을 나온 암탉』은 그 이전까지 ‘동화’라는 영역에 둘러쳐져 있던 경계선을 여러 모로 허물고 있다. 주인공이 어린 아이가 아니라 모성을 실현하고 싶어 하는 성숙한 여성이라는 점, 주어진 자연적 ·사회적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정체성을 스스로 세워 자신을 실현하는 독립적 존재라는 점, 동화에서 금기로 여겨지던 실존적 죽음의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했을 뿐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문제에까지 촉수를 뻗쳤다는 점 들이 그렇다.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엄혹한 삶의 현장은 『약초 할아버지와 골짜기 친구들』, 『과수원을 점령하라』 같은 작품들에서 처연하게, 혹은 유머러스하게 펼쳐진다. 『나쁜 어린이 표』, 『일기 감추는 날』, 『초대받은 아이들』, 『들키고 싶은 비밀』에 현재 아이들이 살아가는 삶의 한 단면을 그려내 폭넓은 공감을 얻기도 했지만, 황선미 문학의 정수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과 동물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엄숙하고 치열한 삶의 과정을 밀도 높게 다룬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 과정 중에 그들이 겪는, 때로는 죽음의 고통에 이를 정도의 성장통을 맞대면하는 일도 황선미 문학을 남달리 각인시키는 이유이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동화작가로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만난 비아트릭스 포터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그의 그림책 “피터 래빗 이야기”를 보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뚜껑이 열리는 것 같았다고 할까. 엄마토끼가 아들 피터에게 맥그리거 씨 정원에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덧붙였던 말, “네 아버지도 거기 들어갔다가 파이 속에 들어가는 신세가 되지 않았니.”가 특히 그랬다. 어떻게 아이들 용 이야기가 그런 엄혹한 삶의 실존에 그런 식으로 정면승부를 걸 수 있단 말인가! 그 대목은 그 이전의 어떤 동화 공부보다 더 통쾌하고 신나는 눈뜸의 순간을 가져다주었다. 동화에 대한 두려움, 눈치 보기, 답답함, 뭔지 떳떳치 못한 기분 같은 것들이 일순 날아가 버렸다. 나는 내 동화에도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비아트릭스 포터의 그 영향은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 황선미의 초기 글에서 주로 확인할 수 있다. 쥐와 고양이의 뒤집어진 관계, 세상 물정 모르고 부엉이에게 덤비는 청설모 같은 캐릭터 들이 그렇다. 그리하여 먹고 먹히고, 잡히고 탈출하고, 낳고 키우고, 받아들이고 내치고, 속고 속이고, 밟히고 다시 일어서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죽이고 살리는 삶의 굴곡이 새겨진 이야기들이 하나씩 태어난다. 그 이야기들 속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는 눈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헤아리는 마음이 롤러코스터의 오르락내리락하는 선로 같은 서사의 선을 따라 때로는 쏜살같이 달려가고, 때로는 맞물리는 톱니바퀴를 하나하나 세듯 또박또박 지나간다. 특히 자연과 동물을 바탕으로 삼는 이야기에서는 그런 삶의 지난한 굴곡들이 독자의 마음을 꽤나 출렁거리게 만든다. 그건 아마도 그가 그렇게 출렁거리는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삶이 곤두박질쳐 내려가고 있다고, 밑바닥에 널브러져 있다고 그가 느꼈던 때는, 이런 때이다.

아주 어렸을 때, 쓰레기장에 버려진 화상 환자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완전히 벌거벗겨져 있었지만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가 몇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온 몸이 시뻘건 사람 하나가 지독한 냄새 나는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사람이 그렇게 쓰레기처럼 버려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더 믿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 눈에 떠오른 표정이었다. 그것은 아픔의 호소도, 구조의 요청도 아니었다.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런 처참한 상황에서, 나 같은 어린 아이를 보고, 자기 자신을 수치스러워하고 있다니! 나는 무서움에 떨며 그 자리를 벗어났고, 가족들이 그를 데려가 치료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 수치심에 가득 찬 눈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버려진 사람을 본 일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집안이 기울어 이사 가야 했던 도시는 미군 부대가 있는 곳이었고,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갓난아기의 주검을 보는 게 드문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작가에게 각인된 냉혹한 실존 조건은, 살쾡이에게 공격당하는 멧토끼, 자기를 키우는 주인의 손에 수염을 뽑히는 데다 쥐에게 잡아먹힐 지경에까지 처하는 고양이, 날카로운 덫에 발이 걸려 피를 쏟으며 눈밭에서 얼어 가는 고라니, 족제비에게 잡아먹히는 닭 같은 캐릭터의 삶의 환경으로 주어진다.

이사한 곳에서 살아 낸 유년기와 청소년기가 얼마나 힘겨웠는지를 작가는 간간이 개인적인 글에서 토로한다. 아들이었던 오빠에 비해 딸로서 받아야 했던 푸대접,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던 가난, 가까운 피붙이들에게 받아야 했던 서러움. 그건 정말 부당한 일이었다, 나는 억울했다, 매사에 자신이 없어졌다, 한없이 위축되면서도 또 한편 고집불통으로 사나움을 부릴 때도 있었다, 하고 작가는 말한다. 왜 안 그랬겠는가. 하지만 그 조건들이 내가 글을 쓰는 데 큰 동력과 재산이 되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아무 것도 겁나는 게 없었다, 나는 겁 없이 글 쓰는 일에 뛰어들었다, 하고 그는 이어 말한다. 그랬을 것이다. 밑바닥에 닿으면 남은 일은 올라가는 것뿐이다. 곤두박질치는 때가 있으면 박차고 날아오르는 때도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당을 나와 불모의 몸으로 청둥오리를 길러 낸 당당한 암탉도, 쥐들의 몸종 노릇을 하다 나중에 그 무리를 물리치고 과수원을 지켜 내는 씩씩한 고양이도, 죽음을 이겨 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의 가슴 설레는 고라니도 없었을 것이다.

혹독한 삶의 조건이 던지는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그토록 풍성한 글밭을 일궈 낸 그가 동화라는 장르를 택한 것이 다행스럽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이라는 명분 이전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내 주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나는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찬찬히 생각하는 자세를 갖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내 평소의 의견이고, 황선미의 동화는 바로 그런 일을 한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끊임없이 소설을 써서 일 년에 한 번씩 태우는 게 일이었다는 이 작가는, 자신은 문학에 대한 환상은 없었다고 잘라 말한다. 글 쓰는 게 생활이었고, 문학은 삶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동화를 택했나? 하고 나는 묻는다. 아, 물론, 동화가 문학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선택하는 장르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그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동화에 대해서는, 현실적이건 비현실적이건 그 특질과 역할에 대한 왜곡된 환상이 지금보다 더 널리 깔려 있었기 때문에 나온 질문이다. 작가도 그건 안다. 왜 동화를 택했냐고?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다음호에 계속)

※ 이 글에 실린 그림은 『마당을 나온 암탉』(김환영 그림, 사계절, 2000)과 『나쁜 어린이 표』(권사우 그림, 웅진주니어, 1999)가져온 것입니다. ━ 편집부
김서정│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독일 뮌헨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지금은 김서정동화아카데미에서 어린이 문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두로크 강을 건너서』 『나의 사직동』 『어린이문학 만세』 『옛날 옛날에, 끝』 등 저서와 역서가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