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1월 통권 제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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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서평]
지혜를 먹다, 달디 단 장맛일세

최선숙 | 2009년 01월

맛난 거 만들어서 좋은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 일은 즐겁습니다. 그런데 점점 게을러지고, 할머니 맛 따라가려면 턱도 없다는 딸아이의 타박은 여전합니다. 우리 음식 맛은 장맛인데, 그 가장 기본인 장을 한 번도 담가 본 적이 없는 제가 만드는 음식들은 다 제 솜씨가 아닌 겁니다. 친정에서 얻어 온 장맛을 보며 그걸로 그 해 친정엄마의 컨디션을 가늠하는 척도로 삼지요. “올해는 된장 맛이 뭐 이래, 어디 아프신가?” 하고 말이지요. 뻔뻔하기 이를 데 없다는 거 잘 알고, 제대로 배워 보고 싶은 기특한 마음도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서 꼭 장을 담가 보려 합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제대로 장맛을 내는 그림책이 나왔습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그림책을 펴 놓고 우리 함께 장을 담가 볼까요? 책을 열면, 콩꼬투리 누렇게 여문 들판이 노랗게 시원스레 펼쳐지고, 지팡이 짚은 할머니 따라 가을이네가 콩 베러 갑니다. 눈앞에 바로 보듯 양면 앞쪽에 기다랗게 잘 익은 콩대를 배치해 손 대면 짝 하고 콩꼬투리가 그대로 터질 듯 보여줍니다. 수채화로 둥글둥글 쓱쓱 재미나고 흐뭇하게 그려 낸 풍경들입니다. 인물의 표정들도 정겹게 살아 있어요.

늦가을에 추수하여 철썩철썩 도리깨로 내려치고, 차락차락 키로 까불어 낸 노란 햇콩이 멍석 위에 수북합니다. 반들반들 잘 여문 콩만 쏙쏙 골라 가을볕에 잘 말려 보관도 잘해야 합니다. 초겨울로 접어든 쌀쌀한 날에 메주를 쑵니다. 불린 콩을 가마솥에 넣고 비린내 나지 않게 잘 삶아요. 이 콩, 탱글탱글 삶은 콩 먹어 보셨지요. 아, 참으로 잊을 수 없는 맛입니다. 배탈이 나도록 날름날름 먹었었지요. 이제 이 잘 삶은 콩을 매우 찧어 띄워서 재울 차례예요. 절구에 찧은 콩을 메주 틀에 꾹꾹 눌러 담으면 반듯반듯 네모난 메주가 되지요. 대청마루에 줄줄이 늘어세워 해바라기를 시킨 다음, 꾸덕꾸덕 마르면 방으로 옮겨 뜨끈뜨끈 군불 지펴 속속들이 띄우지요.

메주 뜨는 구수한 냄새 기억나시나요? 제 기억 속의 그 방은 오래 된 반닫이 옆에 고구마 푸대와 콩나물 시루 놓여 있었지요. 그림 속의 메주들처럼 곰팡이 꽃을 피우던 메주들과 함께 겨울이 깊어 갔습니다. 이제 요녀석들을 볏짚으로 잘 묶어서 방에다 조롱조롱 매달아 놓았다가 날이 풀리면 꺼내다 처마 끝에 매달고 햇볕이랑 바람을 쐬어 주어요. 거죽은 딱딱하고 속은 말랑말랑한 메주들이 점점 노르스름 불그스름 낯빛을 바꾸며 떠 갑니다.

정월 말날, 드디어 장 담그는 날입니다. 이 날은 온 식구가 몸가짐도 바르게 하고 키우는 짐승들도 함부로 나무라지 않았지요. 메주는 솔로 박박 씻어 햇볕에 말려 놓고, 함지박 가득 소금물도 만들어 놓아요. 볏짚에 불을 붙여 항아리를 엎어 소독하고, 실금이 갔는지도 알아본 뒤 항아리 바닥에 숯불을 피우고 꿀 한 종지 부어 태워 고약한 냄새를 잡습니다. 천지신명께 달고 구수한 장맛을 기원 드리며 빌기도 했지요. 메주를 차곡차곡 항아리에 담고 소금물을 부어요. 잘 마른 고추랑 대추도 넣고 참숯도 함께 넣어요. 그러면 나쁜 균과 잡냄새를 없앨 수 있어요. 또 항아리에는 새끼줄로 금줄을 치고 하얀 버선본을 거꾸로 붙였어요. 오는 귀신 금줄로 막고 가는 귀신은 버선발로 차 버리라고요.

봄이 와 날이 점점 따뜻해지면 항아리 뚜껑을 열고 햇볕을 자주 쬐어 주어야 장이 맛있게 익어요. 매화처럼 하얀 꽃을 피우며, 뽀글뽀글 공기 방울 터지는 소리를 내며 장이 익어 갑니다. 이렇게 한 달쯤 지난 뒤, 모란이 필 때쯤에 장을 뜹니다. 항아리에서 메주를 건져 내고 베 보자기에 받쳐서 걸러 주면 까만 물이 줄줄 나오지요. 이게 바로 짭짤하고 달큰한 간장이지요. 걸러 낸 간장은 뭉근한 불에다 오래오래 달여야 해요. 건져 낸 메주는 잘 치대서 하얀 소금 술술 뿌려 다시 항아리에 꾹꾹 눌러 담아요. 이대로 더 익히면 구수한 된장이 됩니다.

이제 이 지혜로운 발효의 예술을 한 번 맛볼까요. 달고 구수한 맛이 제대로네요. 리듬을 타며 잘도 넘어가는 정겹고 맛난 글에, 구수한 그림이 어우러진 장맛이 일품입니다.
최선숙│오픈키드 컨텐츠 팀장. 시 읽기와 그림 보기를 좋아합니다. 재미나는 일들이 더 많아지는 세상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