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6월 통권 제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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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작가 이야기]
붓과 종이를 들고 자맥질한다

박철민 | 2007년 06월

습작 산수화를 그리던 중학생 때부터 먹과의 인연이 시작된 듯하다. 서예가이신 아버님의 지도를 받으며 그…… 근본을 알지 못하는 유형의 산수화를 그렸었다. 주입식으로 배우던 산과 나무의 형태와 묘법이 떠오른다. 아버님이 주문하시는 형태와 채색 방법에서 벗어날수록, 나는 호된 질타와 뭇매를 감수해야 했다.

매서운 바람이 가슴을 저미게 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학교에서 돌아와 붓을 들고 화선지 앞에 앉았다. 조심성이 부족한 나는 접시에서 까만 먹을 덜어내다 기어이 새하얀 화선지에 먹을 떨구고 말았다. 물에 희석된 먹물은 한 없이 번져 갔고, 나의 얼굴도 바알갛게 번져 갔다. 한 점 작품의 시작일 뿐인데, 습작일 뿐이었는데……. 나는, 아주 오랫동안 작업한 결과물을 망쳐 놓은 죄인의 모습으로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디서 용기가 생긴 것인지, 쌓여 있던 분노가 고개를 든 것인지, 나는 붓을 던져 버리고 소리를 지르며 집을 뛰쳐나갔다. 불량스럽게 까만 교복을 풀어 헤치고서. 혹한의 개울가에 웅크리고 앉아 빙판에 주먹질을 해 대던 중학생의 모습…….

되돌아보면 그 때의 나는 그린다는 것에 작은 소질과 커다란 재미를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왜 얇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새하얀 화선지와, 가슴까지 암울하게 하는 까만 먹과의 사투를 벌여야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또래로부터 공감을 얻어 내기 어려운 나만의 쓸쓸한 공간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육촌형』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오랫동안 경험해 본 듯한 편안함과 이미 그려 본 듯한 익숙함이 내게 다가왔다. 이를 악물고 감내하며 이겨 내야 하는 근태의 하얀 미소와 살짝만 건드려도 폭발해 버릴 듯한 성태의 까만 분노만 생각했으리라.

새하얀 화면을 얼룩지게 만들었던, 먹의 번짐을 차용하여 바탕을 만들어 냈고, 중봉을 유지하여 탄력을 유지하라시던 붓을 굳혀, 거친 터치로 그려 나갔다. 하얀 화면에 검은 먹을 칠해 가는 것이 아니라, 검은 먹으로부터 하얀 선과 면들을 찾아 나갔다고 할 수 있겠다. 거칠고 강력한 터치를 감당하기 위해 종이를 두툼한 이합장지로 교체하였고, 동양화 물감에서 발색이 좋은 수채화 물감으로도 바꿔 가며 작업하였다. 쉽게 구체화되지는 않지만 뭔가 내 속에서 용솟음치는 갈망을 표현하기 위하여 때로는 이합장지에 지우개, 제도용 칼을 이용해 긁어 대기도 하였다.

『육촌형』의 원고 내용은 수없이 소리 내어 되뇌었고, 원화 또한 몇 번을 다시 그리게 되었지만, 스케치는 하지 않았다. 먹이 번져 가면, 그 번짐을 따라 원하는 상을 그려 갔기 때문이다. 스케치를 하지 않은 이유를 댄다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어떤 형태보다 알지 못하는 형태에 대한 표현과 기대 때문이었다.

연필이라는 재료는 느낌과 더불어 손과 머리를 사용하여 의도된 상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먹은, 물에 의한 표현이고 보니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를 때가 많다. 때문에, 익숙함도 병이라 딱딱해져 가던 가슴에 촉촉한 단비를 만난 듯 의욕이 일고 재미가 붙었다. 여러 시행 착오와 많은 실수를 거듭하였다. 하지만 계획되거나 의도되지 않은 화면은 푸른 의욕을 불러 주었고 먹의 번짐 같은 구체적이지 않은 일렁임 속에서 시나브로 심화되어 갔다. 그리고 나는 형태를 찾고 만들어 갈 수 있는 힘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친 숨소리로 그려 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한산계가 있는 양짓담과 음실의 배경을 중심으로 하는 풍경 컷 그리고 성태, 근태, 탱크, 오토바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심리 묘사 컷과의 충돌이 왔다. 이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고리를 찾기 위하여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캐릭터에서 오는 느낌과 배경과의 조화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중요하게 부각되었고, 때문에 자연스럽지 못한 장면과 다소 어색하다 느껴지는 부분이 삭제되었다. 부연 설명같이 느껴지는 장면 또한 제외되었다.

그리하여 배경과 어우러진 많은 장면이 제외되었고 인물을 클로즈업하여, 인물 캐릭터의 성격 강조와 심리적인 표현을 중심으로 재구성하게 되었다. 결국 출판 관계자와 여러 차례 의견을 조율하면서 의욕만 앞서던 30여 컷에 달하는 원화를 16컷으로 압축하였고, 이야기를 매끄럽게 만들어줄 수 있는 원화를 추가로 작업하게 된 셈이다.

어렵사리 책이 출간되었지만 역시나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다른 그림책과의 성격이 다소 차이가 있고 보니, 원문과의 호흡이 잘 이루어졌는지 스스로 자신이 없다. 사춘기 시절 이현주 선생님의 책을 자주 접하며 감동 받곤 했었는데, 나름의 세밀한 표현이 좋은 동화에 대한 예의가 되었는지, 어느 어느 장면들의 거친 붓질이 이현주 선생님의 아픈 마음을 과연 잘 표현해 낸 것인지……의아스럽고 아쉽기만 했기 때문이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수시로 가슴에 빗질을 하며, 환기가 안 되는 작업실 한켠에서 깊은 한숨을 쉬면서, 사랑하는 후배와 제자들 그리고 스스로에게 던지는 다짐만 외쳐 대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상상하는 만큼, 보잘것없는 나의 공간은 확장되리라, 아파하는 만큼 나의 가슴은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붓과 종이를 들고, 혹한의 개울가가 아닌, 상상의 동화 속에서 자맥질하며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박철민│1966년 서울에서 태어나 추계예대 동양화과를 졸업하였습니다. 1999년 한국 어린이 도서상을 수상하였고, 2002년 일본 노마국제그림책콩쿠르에서 차석을 수상하였습니다. 2005년에는 이태리볼로냐도서전 애뉴얼 작가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림책으로 『호랑이 잡은 아들』(웅진), 『육촌형』(보림), 『벼이삭 줍는 아이』(여원미디어), 『선녀와 나무꾼』(시공주니어), 『논고랑 기어가기』(언어세상), 『괴물 잡으러 갈 거야!』(도깨비) 등이 있으며, 『보길도에서』(초방)를 준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