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6월 통권 제55호
속 깊은 책 이야기
사진과 시
책 세상 나들이
특별 원고
즐거운 책 읽기
열린어린이 서평
주목 받는 새 책
열린어린이가 권하는
이 달의 책

열린어린이 서평

[이 달의 서평]
숨겨져 있던 우리 선조를 만나요

정순심 | 2007년 06월

책을 펼쳐 들고 부끄러움이 먼저 앞섰습니다. 중국에 관한 3대 기행문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는  『표해록』과 최부라는 인물을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짧은 지식을 탓해 보다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하멜 표류기』라는 이름에만 익숙해져 있도록 한, 지난 세월 역사 교육의 탓도 있지 않을까 하고 슬쩍 책임을 돌려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묻혀 있던 우리 역사 속 인물을 어린이들에게 꺼내어 보여 준 이 책에 후한 점수를 주게 됩니다. 『표해록』을 쉽게 풀어낸 책은 당시의 급박하고도 험난한 여정을 바로 눈앞에 두고 바라보듯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모험 이야기 속에 빠져 있다 보니 최부라는 인물의 됨됨이까지 자연스레 전해지네요.

1454년에 나고 1504년에 생을 마감한 최부는 조선 성종 때 문신입니다. 29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제주에서 관직을 수행하던 중,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비보에 고향으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 중국 태주에 표착, 136일 만에 귀국하게 됩니다. 귀국 후, 그간의 상황을 일기 형식으로 적은  『표해록』을 펴냅니다. 1504년 연산군 갑자사화 때, 당대의 유학 거물인 김종직의 문하생이라는 이유로 51세의 나이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게 됩니다.

제주에서 추쇄경차관 직을 맡고 있던 최부는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고향으로 향하는 배에 오르지만 거센 물살, 심한 바람에 배가 가라앉을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한 최부는 상복을 갖춘 채로 하늘을 우러러 빌기 시작합니다. “저는 오직 충효와 우애만을 근본으로 삼고 남을 속인 일이 없습니다. 혹시라도 제게 벌을 내리시는 거라면 얼마든지 감수하겠으나 같이 배에 탄 40여명은 아무 죄가 없는데도 죽을 지경입니다. 불쌍히 여기신다면 바람과 파도를 잠자게 하여 주소서.” 극한 상황에서도 일행을 걱정하고 다독이는 최부의 마음 됨됨이가 43명 전원을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도적을 만나기도 하고, 풍랑이 치는 대로 바다를 떠돌던 험난한 여정 끝에 명나라 땅에 도착한 최부 일행은 왜적으로 의심받으며 심한 고통을 겪습니다. 최부는 이곳에서 당당하고도 적절한 답변으로 명나라 관리들을 감동시키게 됩니다. 임금의 성과 이름을 묻자 “신하된 자가 국왕의 이름을 어찌 경솔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소? 나라 밖에 있다 해서 어찌 행동을 달리하며 말에 변함이 있을 수 있겠소? 그 같은 짓은 못하오.”라고 답을 합니다.

북경으로 가는 길, 운하를 지나면서 최부는 그곳의 수차를 유심히 살피게 됩니다. 가뭄으로 고생하는 조선 농촌의 실정이 그 상황에서도 떠올랐던 것이지요. 귀국 후에 수차를 직접 만들어 전라도 지역의 가뭄 해소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하니 글만 읽는 선비로서가 아닌, 실천가로서의 면모도 살필 수 있습니다.

북경에 다다른 후, 황궁에 들어갈 때 예복으로 갈아입고 사은을 하라는 관리의 말에 상중인 자식이 상복을 벗는다는 것은 엄청난 불효임을 강조하고 궁 안에 들어갈 때만 예복을 입고 밖으로 나와서는 다시 상복으로 갈아입습니다. 이처럼 원칙을 고수했기에 후에 김종직의 문하생이라는 것을 부인하고 목숨을 이으라는 회유에 굴하지 않고 떳떳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겠지요.
큰 단락이 시작될 때마다 펼쳐지는 삽화는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 주며 눈길을 머물게 합니다. 종이 판화를 이용한 독특한 분위기의 그림들은 몇 가지의 색만으로도 바다 한 가운데서의 막막함과 위급한 순간들, 낯설고 거대해 보였을 중국 땅과 소용돌이치는 운하 모습 등을 대담하게 그려 내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번의 작업을 통해 완성했음 직한 세심함도 엿보입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8,800여 리에 이르는 길을 돌아 무사히 귀국하게 된 이면에는 원칙을 지키며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최부의 인물됨이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부디 숨겨진 또 다른 선조들이 어린이들 앞에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어 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정순심│오픈키드 도서 컨텐츠 팀장. 아이들 책을 보며 자라고 있습니다. 세상이 환한 미소로 가득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