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2월 통권 제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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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세상의 진짜 역사를 쓴 할머니와 할아버지

윤석연 | 2007년 02월

“역사책은 세계사를 피가 흐르는 붉은 강으로 묘사한다. …… 전쟁과 혁명을 일으키고 영토와 권리를 침략한다. 그러나 세상의 진짜 역사는 보통 사람들이 사는 강가에서 벌어진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아이를 낳고, 집을 짓고 산다. 쏜살같이 흘러가는 강물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역사학자 윌 듀란트의 말이다. 그러니까 역사책에는 보통 사람들이 사는 강가의 모습, 서로 사랑하며, 아이를 낳고, 집을 짓고 사는, 세상의 진짜 역사는 없다. 쏜살같이 흘러가는, 피가 흐르는 붉은 강물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없다.

우리교육에서 펴낸 ‘우리 인물 이야기’는 역사책에는 등장하지 않는 ‘평생을 한 가지 일과 뜻에 매달린 우리 시대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보통 사람들이 사는 강가 모습이 저절로 손에 잡힌다. 강은 쉴 새 없이 흘러가지만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강가 모습은 여전하다. 강가에는 서로 사랑하며, 아이를 낳고, 집을 짓고 산 이야기들이 흘러넘친다.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나고, 다 자란 아이들은 또 다른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상의 진짜 역사는 강가의 수많은 아이들의 귀로 들어가 마음속에서 영글고 다시 아이들의 입을 통해 이어진다.

보통 사람들이 사는 강가에서 이야기를 듣고 자라난 아이(백승남)는 광대 공옥진 할머니의 내력을 『춤은 몸으로 추는 게 아니랑께』라는 이야기로 엮으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할머니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산에 자주 갔어요. 사람 발길이 많이 지나는 곳마다 나무뿌리들이 땅 위로 다 드러난 걸 보며 공옥진 할머니를 떠올렸어요. 사람들 발에 짓밟혀 맨살을 드러내고도 억세게 땅을 움켜쥐고 있는 나무뿌리들이 할머니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답니다.”(11쪽)

나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남의 몸종으로 일본에까지 팔려 갔고 일본에서는 태평양 전쟁, 돌아와서는 한국 전쟁을 고스란히 겪었어. 어머니, 벙어리 동생, 꼽추 조카딸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고, 나 또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기도 했지. 천한 소리꾼이라고 구박받고, 병신춤 춘다고 수모당하고 비난도 많이 받았고……. 내가 살아온 우리 역사는 또 얼마나 기구했게. …… 그 아프고 괴롭던 세월을 지나 오며 숱한 사람들이 가난과 굶주림, 또 시대의 혼란 때문에 신음해야 했지.(『춤은 몸으로…』 162~163쪽)

정말이다. 피가 흐르는 붉은 강, 그 강은 유혈참사를 일으키는 왕과 정치인, 외교관 남자들과 그들의 사건을 담고 빠르게 흘러간다. 이 사람들은 전쟁과 혁명을 일으키고 영토와 권리를 침략한다. 그 붉은 강가에서 공옥진 할머니는 ‘가난과 굶주림, 또 시대의 혼란 때문에 신음하며’ 살아왔다. 보통 사람들이 사는 강가의 또 다른 아이(강무지)는 사진 작가 최민식 할아버지의 이야기, 『뭘 그렇게 찍으세요』를 엮어 내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얼마나 많은 괴로움을 딛고, 또 딛고 일어섰을까요. 나는 한 예술가의 고뇌를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었습니다. 선생님이 무엇을 그토록 찾아 헤매며 사진에 담으려고 했는지 그 까닭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이 책을 읽은 여러분들이 엉성한 내 이야기 속에서 선생의 뜻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선생님의 사진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품어야 할 조그마한 씨앗 하나를 찾을 수 있다면 최 선생님도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9쪽)

최민식 할아버지의 이야기에도 유혈 참사를 일으키는, 전쟁과 혁명을 일으키고 영토와 권리를 침략하는 왕과 정치인이 등장한다.

1972년 …… 여태 있던 헌법보다 더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것이 이 유신헌법이었고, 이 법을 어기는 사람은 무작정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다. 독재자는 누구나 귀한 생명으로 태어나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마저 빼앗아 버렸습니다. 말하고, 생각하고, 함께 모이고 토론할 그런 자유를 말입니다.(『뭘 그렇게…』 89~90쪽)

공옥진 할머니는 ‘쏜살같이 흘러가는 강물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춤을 추었고, 최민식 할아버지는 사진을 찍었다.

무슨 얘기냐면 …… 몸짓이나 표정을 흉내 내고 내 것으로 만들면서 인물의 정서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거야. 그때부터 나는 그 인물이 돼 버리지. 그러면 누가 불러도 귀가 먼저 가서 음성을 듣게 돼. 앞 못 보는 장님인데 부른다고 얼굴이 돌아갈 수 없잖아.(『춤은 몸으로…』 133쪽)

나는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늘 관찰하고 촬영하면서 지난 수십 년을 보내왔다. 내 힘이 허락하는 한, 이 시대를 함께하고 호흡하는 민중을 사진에 담으려 한다. …… 나는 인간이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사진으로 고백할 뿐이다.(『뭘 그렇게…』 17쪽)

왜 하필 할머니는 세상의 못난 사람들의 몸짓을 춤으로 표현했을까? 공옥진 할머니는 보통 사람들이 사는 강가에서도 더 대접받지 못하는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의 이야기를 춤으로 들려준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춤이 되고, 춤으로 풀어 놓는 이야기 속에서 할머니는 그 인물이 돼 버린다. ‘누가 불러도 귀가 먼저 가서’ 사랑하며, 아이를 낳고, 집을 짓고 사는 말을 듣는다.

그래서 내 공연은 굿이기도 해. 내 몸 안에 깃들었던 목숨들뿐 아니라, 관객들도 감정의 응어리를 풀고 삶의 활력을 되찾게 하는 신명의 한마당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춤은 몸으로…』 153쪽)

왜 할아버지는 누구 하나 눈길 주지 않는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사진기에 담았을까? 최민식 할아버지는 보통 사람들이 사는 강가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자신의 운명과 싸우고 있는 고독한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내가 전하고 싶은 주제가 아닌가.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이 내게 걸어와 눈물을 흘린다. 나는 허리를 굽혀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고 그들의 서러운 인생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뿐이다. 겨우 한 장일 뿐이지만 그 안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귀중한 인생이 담겨 있다.’(『뭘 그렇게…』 130쪽)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서러운 인생 이야기는 사진이다. 겨우 한 장의 사진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 한 장의 사진 안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사랑하며, 아이 낳고, 집 짓고 사는 이야기가 있다. 공옥진 할머니의 춤에는 최민식 할아버지의 사진 이야기가 있다. 또 최민식 할아버지의 사진에는 공옥진 할머니의 춤 이야기가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만나 춤을 추고 사진을 찍는다면 어떨까? 보통 사람들이 사는 강가에서 떡하니 굿판이 열리고,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사진이 주렁주렁 굿판을 둘러치겠지. 온갖 사람 다 몰려들어, ‘옳거니, 내 얘기다.’ 하며 무릎 치며 웃다가, 눈물 훔치다가, 옆 사람 눈물 닦아 주다 눈 마주치면 또 한 바탕 웃다가 모두 일어서 흥겨운 굿판 벌리겠지. ‘세상의 진짜 역사’를 쓰겠지. 역사책에도 없고, 누구도 대신 써 주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사랑하며, 아이 낳고, 집 짓는 사는 이야기를 춤 바람으로, 사진 바람으로 쓰겠지.

다들 고달프고 살기 힘들던 때라 내 춤을 통해 흥겨움과 통쾌함을 느꼈는지도 모르지. 공연장마다 미어터지게 많던 관객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을 주었다면 나는 그걸로 행복해. 이 세상에 뛰어가는 이나 걸어가는 이들 뒤에 처져, 절룩거리며 가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그걸로 기쁘고.(『춤은 몸으로…』 163쪽)

‘이 세상에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대부분인가 보다. 이것이 삶의 진실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일하며 사는 사람들,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을 찍는 나의 사진에 내 인생을 바치리라.’(『뭘 그렇게…』 84쪽)


세상의 진짜 역사는 역사책에 없다. 세상의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있을 뿐이다. 너무 평범해서 가끔은 지루한, 그래도 끊임없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있다.

“옛날에 옛날에 보통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강가가 있었단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아이를 낳았지. 집을 짓고 살았단다. 그런데 그 중에는 흉내쟁이 할머니가 추는 춤이 일품이었지. 또 뭐든지 찍기만 하면 그대로 인생이 담기는 기가 막히게 사진을 잘 찍는 할아버지도 있었지. 무슨 춤을 추고, 무슨 사진을 찍었을까? 그거야 뭐, 보통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아이를 낳고, 집을 짓고 산 그대로지. 에이 그게 다야? 그럼 그 이상 뭐가 더 있겠니. 만날 만날 우리 그렇게 살고 있는데…….”
윤석연│세상의 많은 작은 것들을 좋아하고, 좋은 이들과 수다 떨기를 좋아하고, 격식이나 예절, 서열, 질서 따위를 싫어합니다. 늘 싫고 좋음을 분명하게 말해 버려 가끔 미움도 받지만, 언제나 씩씩하고 즐겁게 살고자 애씁니다. 그리고……혹시 글 쓰는 걸로 이 세상 선한 일들에 보탬이 된다면 꾸역꾸역 하겠다고 맡고 나서는 사람입니다. 펴낸 어린이 책으로 『개미무사』 『고인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