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2월 통권 제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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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어린이가 있는 풍경]
아이들이 스스로 빛날 때

강승숙 | 2007년 02월

겨울 방학이 가까워질 즈음, 들뜬 아이들이 하루 날 잡아서 신나게 놀자며 졸라댔다. 나도 마음속으로 계획하던 일이라 얼른 그러자고 했다. 아이들은 놀 시간을 얼마나 줄지에 관심이 컸다. 선심을 쓰듯 준비만 잘 하면 5교시 내내 놀 수도 있다고 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아이들이 소리를 치며 책상을 두드리고 야단이다. 하지만 조건을 붙였다. “음, 교실을 꾸미는데 풍선은 열 개 넘지 말 것, 스프레이는 안 돼. 마니또 선물 포장도 신문지로 하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 모두가 공연에 참가해야 한다는 거야. 춤, 연극, 연주 뭐든지 좋아. 코미디나 가수들 춤을 그대로 베끼는 건 안 되고.” 아이들이 묻는다. “조금 비슷하게 하는 건 되지요?” “그 정도는 뭐. 아무튼 이런 조건에 맞지 않거나 내용이 시시하면 노는 시간은 줄어드는 거다.” “예!” 어쨌든 아이들도 나도 신났다. 한참 학기말 성적을 처리할 때라 이렇게 말해 놓고는 아이들이 어떻게 준비를 하는지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어떤 공연을 할 건지, 놀이 프로그램은 누가 짜고 사회자는 누구로 할 건지, 행사장 꾸미기는 어떻게 할 건지 정도만 의논한 뒤 아이들한테 맡겼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춤을 추거나 의논을 한다고 웅성거렸다. 공부가 끝나고 남아서 의논을 하거나 연습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12월 20일, 학급 잔치를 하기 전날이다. 행사장 꾸미기를 맡은 아이들 네 명이 남아서 칠판에 뭔가를 그리고 지우고 야단이다. 나는 역시 성적을 처리하느라 뒤돌아볼 틈도 없이 일에만 열중했다. “와, 좋은데! 근데 오른쪽에 그린 그림은 좀 그렇다.” 나영이는 교실 가운데 서서 친구들이 칠판에 그리는 그림과 색에 대해 도움말을 주고 있었다. 연출자나 감독처럼 꽤 진지하다. 한참이 지나 다 끝났는지 의자를 딛고서 칠판에 그림을 그리던 아이들이 물러났다. 득득 의자 끄는 소리가 날 즈음 뒤돌아보았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정말 감각 있게 꾸며 놓았다. 잘 보려고 교실 가운데로 걸어갔다. 칠판 가운데에는 아이들이 이미 만들어 둔, 금띠를 두른 크리스마스 알파벳 철자가 붙어 있다. 실은 서연이가 그 글자를 만들 때 조금 참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글자가 작아 보이기도 하고 꾸민 게 조금은 허전해 보여서였다. 그런데 칠판에 붙여 놓은 걸 보니 내 걱정과 달리 썩 잘 어울렸다. 글자 둘레에는 크리스마스를 나타내는 갖가지 소품을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써 놓았다. 내가 아끼는 색분필로 분위기 있게 색도 칠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친구들 이름을 정성껏 써 놓은 점이다.

칠판 장식을 마친 아이들은 의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책상을 가장자리로 밀어내고는 의자를 가운데에 둥그렇게 붙여 놓았다. 아침에 아이들이 오면 자리가 넓으니까 씨름하고 난리를 피울 텐데…… 하며 걱정을 하니 자기들이 질서를 책임질 테니 걱정 말란다. 아이들은 그 어떤 때보다 의욕과 아이디어가 넘쳐 보였다. 두어 시간 그렇게 꾸미고, 정리하고, 치우고 난 뒤에야 아이들은 집에 갔다. 다음 날 아침, 복도를 걸어오며 쭉 보니 다른 반도 학급 잔치를 하는지 바쁘다. 슬쩍 창 너머로 칠판 쪽 꾸민 것을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우리 반이 나아 보였다. 어쩐지 기분이 좋다. 교실에 들어오니 아이들이 여기 저기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운다. 들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어떻게 단도리를 한 걸까. 뛰고 수선 피우는 아이들이 별로 없다. 나름대로 뭔가를 한다. 아직도 소품을 만들기에 바쁜 아이들도 있고 한 쪽에 모여 리코더 연주를 하는 아이들도 있다.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이미 실과 시간과 미술 시간에 장식을 해 단 트리에 불을 밝혔다. 반짝반짝 전구에서 빛이 나니 제법 축제 분위기가 난다.

9시다. 진행을 맡은 아이 둘이 앞으로 나오더니 마니또 발표를 먼저 하겠다고 했다. 마니또는 자기가 뽑은 친구를 비밀리에 돕는 놀이이다. 일주일 전부터 한 일이라 비밀이 많이 샜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흥미진진한 얼굴이다. 사회자가 한 아이 이름을 부르니 그 아이는 준비한 선물을 들고 “내가 그 동안 니 마니또였어.” 하며 친구에게 선물을 준다. 선물을 받은 아이도 소감을 말한다. 선물을 펼치거나 마니또가 밝혀질 때마다 웃음이 쏟아져 나왔다. 오백 원 정도의 선물을 준비하기로 했는데 미처 준비하지 못한 아이도 있다. 그 아이들은 선물을 받고는 얼굴이 벌게져서 어쩔 줄 몰라했다. 당당하게 오백 원짜리 동전을 선물로 주고는 한 몸에 야유를 받는 아이들도 있었다. 머리를 긁적이더니 자기가 누구 마니또인지 모른다고 말하는 남자 아이도 있다. 기가 막혀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꾸욱 참는다. 아이들도 용서해 주는 분위기다. 이렇게 한 시간이 훌쩍 갔다.

둘째 시간, 이번에는 공연을 할 차례다. 사회자가 바뀌었다.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준비 팀이 차례로 나와 재주를 선보였다. 우리 반 춤꾼이 대거 참여한 춤 공연은 신선하고 좋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눈길을 끈 점은 부반장 경호가 새롭게 참여한 점이다. 점잖아서 형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경호가 춤을 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공연을 하기 전부터 여기저기서 “경호야, 너 정말 춤추냐?”하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경호는 자연스럽게 다른 아이들과 섞여서 춤을 잘 추었다. 춤 공연이 잘 끝나고 리코더 연주가 이어졌다. 여자 아이들 여섯 명이 리코더로 크리스마스 캐롤을 능숙하게 연주했다. 마음에 드는 풍경이다. 강한 비트가 섞인 음악에 맞춰 추는 춤보다 이런 쪽에 정감이 간다.

다음으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베낀 듯한 극이 시작되었다. 책상 두 개를 붙이더니 아이들 넷이 책상에 둘러앉아 밥상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사투리를 섞어가며 코미디로 표현했다. 아이들이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아내, 남편, 자식들 역할을 해 내는 바람에 교실은 몇 번씩이나 웃음으로 뒤집어졌다. 뒤에 우연히 이 프로그램을 텔레비전에서 보았는데 우리 반 아이들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았다. 그밖에도 몇 가지 더 있었는데 아무래도 준비가 충분하지 않아서 교실이 어수선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이 날의 잔치를 빛나게 할 인형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형극 팀은 교실에서 연습한 적이 없는 팀이라 어떻게 준비를 했는지 무얼 할 건지 나조차 아는 바가 없었다.

여자 아이 넷이 나왔다. 도은이와 수진이가 마이크를 잡고 교탁 옆에 앉더니 그림책 『조그만 광대 인형』을 펴 들었다. 희선이와 한솔이는 책상 두 개를 붙인 뒤 천을 늘여뜨린 뒤쪽에 앉아 인형을 고르고 있었다. 교실 바닥에는 등장할 인형으로 수북했다. “옛날에 조그만 광대 인형이 살았대…….” 낭랑한 수진이 목소리가 나오자 책상 밑에서 광대 인형이 올라왔다. “와, 잘 그렸다!” 탄성 섞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그림을 색연필로 은은하면서도 섬세하게 잘 그렸다. 공연을 잘 보기 위해 나는 아이들 사이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두 아이가 물 흐르듯 이야기와 대사를 읊을 때마다 호흡을 잘 맞추어 가며 인형이 책상 밑에서 올라오고 내려갔다. 교실 안은 점점 조용해졌다. 나 역시 아이들하고 똑같이 웃으며 즐거워했다. 저걸 어떻게 다 그렸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장면이 바뀔 때마다 인형과 배경, 소품들이 모습을 바꾸어 등장했다. 관객들은 조금도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극에 열중했다. 다 마치자 힘찬 박수가 쏟아졌다. 인형극 팀은 스물도 넘는 인형과 소품들을 정리하더니 들어갔다. 뒤로 조용히 가서 언제 이걸 다 만들었는지 물었다. 그림책은 누가 골랐는지도. 나는 흥분이 되었다. 이렇게 이쁜 짓을 나 몰래 하다니!

놀이 시간이 되었다. 진행 팀은 다른 놀이도 준비했지만 아이들이 우리 반 인기 최고 놀이인 ‘당신은 친구를 사랑하십니까?’만 자꾸 하자는 바람에 이 놀이만으로 한 시간을 보냈다. 학부모님이 보내 주신 떡과 귤도 먹었다. 남은 시간은 영화를 한 편 보고 행사 소감 나누기로 마무리했다. 나는 5교시가 끝날 때까지 내내 몇 마디 하지 않고 관객이 되어 구경만 했다. 아이들은 잘 놀기 위해 열심히 준비했다. 행사를 마치고 소감을 들어보니 모두 오늘 행사에 만족하고 있었다. 대충 과자 먹고 춤 정도 추거나 가요를 부르면서 치르기 쉬운 학급 잔치를 아이들은 스스로 잘 준비해서 보람 있고 즐거운 시간으로 만든 것이다.

해마다 아이들과 학급 마무리 잔치를 하는데, 대부분 내가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에 적극 관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원칙만 정해 주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아이들이 행사 준비를 잘 했고 만족해 했다. 학급 마무리 잔치를 보면서 그 동안 내가 아이들 스스로 할 일을 너무 알뜰하게 챙기며 참견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준비하고 풀어 내는 과정을 보면서 다시금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연습이 덜 되어서 공연을 못한 모둠도 있다. 그 아이들한테는 개학하고 한 번 더 행사를 할 테니 그 때는 제대로 하자고 했다. 2월에 개학을 하면 졸업 전에 열흘 가까이 시간이 있다. 그 때는 연극 잔치를 해 볼 생각이다. 인형극도 좋고 몸으로 하는 연극도 좋다. 졸업 전에 다시금 아이들이 자신을 빛낼 시간을 가져 볼 생각이다.

※ 이 글에 실린 그림은 『조그만 광대 인형』(로스비차 크바드플리그 그림, 미하엘 엔데 글, 김서정 옮김, 시공주니어, 2000)에서 가져왔습니다 ━ 편집부.
강승숙│20여 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지금은 인천 주안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지냅니다. 아이들하고 동시 낭송하기, 시 쓰기, 그림 그리기와 노래 부르기를 즐겨 하며 틈틈이 동화책을 읽어 주거나 옛이야기를 들려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