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4월 통권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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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만드는 이야기]
그림과 클래식 음악의 만남

이세은 | 2006년 04월

몇 년 전에 클래식 음악 공연 기획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분께 ‘아이들은 클래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지루해 하고…….’라는 말을 꺼냈었다. 그러자 그 분은 내 무식을 탓하지 않고 너그러이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아니에요. 좋은 곡은 아이들도 좋아합니다. 「피터와 늑대」는 아이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공연이에요.”

‘피터와 늑대라…….’ 그러고 보니 그림책으로도 나와 있고, CD도 흔했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 극으로 공연도 많이 한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무지한 건 죄’라고, 몰라서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이후 「피터와 늑대」라는 타이틀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미 나와 있는 책의 평판이 워낙 좋은 터라 좋은 책을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긴 했지만 찾아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블라디미르 바긴이라는 러시아 출신 미국 작가가 만든 『피터와 늑대』를 찾을 수 있었다. 피터를 비롯해, 늑대, 고양이, 새, 오리 등의 캐릭터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지게 하는 책이었다. 게다가 음악의 배경이 되는 러시아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서 더욱 좋았다.

‘토토 키즈 클래식’ 표지
신생 출판사로서는 어찌 보면 모험이랄 수 있는 기획이었지만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아이들이야말로 클래식 음악의 매력에 빠져 봐야 하니까.’였다. 만약 이 시기에 클래식 음악을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점점 더 가까이 하기엔 먼 장르처럼 느껴질 테니 말이다. 또 시간과 공간의 벽을 넘어서서 아주 오랫동안,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것이 ‘클래식’이므로 책으로 출판하면 독자들이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찾는 책이 될 것 같았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 막연한 동경만 가졌을 뿐 구체적으로 내 아이들에게 뭘 해 준 기억이 없던 나에게도 꼭 필요한 기획이었다. ‘그림책과 클래식 음악을 아이들에게 같이 전하자.’라는 기획은 이렇게 생겨났다.

여느 책과 마찬가지로 판권 계약을 하고 책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문제는 클래식 음악 CD를 만드는 일이었다. 원서에는 음악 CD가 없었기 때문이다. 음반 제작을 해 본 경험이 없던 나로서는 무조건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우리 사장님이 직접 녹음실과 CD 제작사를 섭외해 주셔서 일의 절반은 순조롭게 진행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녹음 진행 준비만 잘하면 되었다.

그런데, 막상 일을 진행하려고 보니 클래식과 적당히 담을 쌓고 살아 온 나에겐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녹음에 들어가기 전에 스무 번쯤 「피터와 늑대」라는 곡을 들은 것 같다. 처음엔 여기가 피터가 나오는 장면이 맞나? 이 소리가 오보에인가? 할아버지를 표현하는 소리는 뭐지? 등등 내레이션이 들어갈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어야 했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여유가 생기자 음악을 즐기면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림책을 보면서 듣다 보니 장면 장면이 더 생생하게 느껴져 그냥 음악만 들었을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피터와 늑대」는 서정과 서사가 절묘하게 조화된 음악이었다. 음악 안에 얼마나 많은 재미난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지, 그 이전엔 머리로만 이해했던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젠 내가 느낀 것 모두를 고스란히 아이들이 느낄 수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실험 대상은 바로 우리 집에 있었다. 책과 함께 이제 막 완성된 따끈따끈한 CD를 들고 집으로 들어섰다. 두 아이를 양 옆에 앉혀 놓고, 책을 펴고, CD를 올리고.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제 나온다.”
CD 리모콘을 누르자 성우의 목소리가 나왔다.
“옛날에, 풀밭과 숲으로 둘러싸인 작은 오두막에서 할아버지와 피터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엄마, 얘가 피터야?”
“응.”
“근데 왜 할아버지가 얘기하는데 딴 데 보고 있어?
“밖에 새가 있잖아.”
“근데 새가 왜 입 벌리고 있어?”
“…….”

딴 길로 얘기가 새 나가는 사이에 CD는 훌쩍 다음 트랙으로 넘어가 버렸다. 그림책을 읽다보면 늘 있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이번엔 음악을 들으면서 봐야 하는데 자꾸 음악을 놓치니 내심 마음이 바빠졌다. 얌전히 앉아서 귀를 쫑긋하고 앉아 있길 기대했더니만 뭐가 그리 급한지 책장을 넘기고 자기들끼리 까불기 바빴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얼굴이 부끄러워졌다. ‘그냥 편히 들으면 되는 것을 트랙 순서에 맞춰 책을 보려고 기를 쓰다니!’ 그 다음부터 마음이 편해졌다. 책을 넘기던 말던, 듣던 말던 그냥 내버려 두었다. 책을 읽어 달라고 하면 몇 번이고 읽어 주었다. 그러다 며칠 후, 여느 때처럼 「피터와 늑대」를 틀어 놓고 제각기 할 일(두 아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노는 거다)을 하고 있는데, 딸아이가 갑자기 ‘엄마, 새 나왔어.’ 이러는 거다.

“새가 어디?”
“『피터와 늑대』에 나오잖아.”

어느새 음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소리가 귀에 닿았나 보다. 기특하고 예뻐서 아이를 꼭 안아 주었다. 내 아이를 위해서도 이 책을 만들기 잘했구나 싶어 그 날의 기쁨이 참 컸다.

『피터와 늑대』가 나온 뒤, ‘토토 키즈 클래식’ 시리즈의 구성을 어떻게 할지 다시 회의에 들어갔다. 당연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좋은 그림, 좋은 곡’을 찾자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기준에 의해 찾게 된 책이 ‘토토 키즈 클래식’의 두번째 책인 『호두까기 인형』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블라디미르 바긴이 그린 이 책은, 발레 음악을 표현하는 그림책답게 섬세하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살아 있어서 여자 아이들에게 특히 인기를 끌었다. 또한, 크리스마스 시즌 가까이에 나와서인지 빠르게 반응을 얻었다.

『동물의 사육제』 본문 중에서

세번째로 준비한 책은 생상스의 관현악 모음곡인 『동물의 사육제』다. 이 책은 전작들이 옛날부터 있었던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든 것과는 달리, 뉴욕시티 발레단의 발레 대본을 토대로 만든 그림책이었다.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박물관 견학 도중 한 반 친구들과 떨어진 꼬마 남자 아이가 박물관에서 잠이 들고, 꿈 속에서 꼬마는 친구들과 선생님, 가족들을 만난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사자, 닭, 캥거루, 코끼리 공작, 새 등으로 변해 버린다!

꿈 속의 일이긴 해도 아이들에겐 사람이 동물로 변한다는 사실이 재미있나 보다. 우리 집 사내아이도 이 책은 두고두고 심심할 때마다 꺼내 보곤 한다. 「동물의 사육제」 음반에는 남자 성우의 힘찬 목소리와 신나는 곡이 많이 들어 있어서 처진 기분을 바꾸고 싶을 때 나도 종종 듣곤 한다.

『모차르트 멜로디』 본문 중에서

시리즈의 네번째 책은 『모차르트 멜로디』이다. 처음 이 책은 나에게 ‘예쁜 그림책’, ‘토토 키즈 클래식에 넣으면 좋은 책’ 정도의 의미였다. 그런데 책을 진행하면서, CD에 넣을 모차르트 곡을 고르면서 마음이 확 변해 버렸다. 점점 모차르트를 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모차르트 음악을 표현하는 ‘투명한 슬픔’의 의미가 뭘 말하는지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고, 그의 천재성에 감탄과 존경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책에 실린 CD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반이 되고 말았다.

특히 모차르트가 여섯 살 무렵 작곡했다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이중주」를 듣고 있노라면 아이답다는 게 얼마나 큰 아름다움인지 절로 알게 된다. 혹 이 CD를 들어 본 분이라면 8번 트랙에 있는 「피아노 소나타 C장조 K.330 1악장」을 들어 보시길 바란다. 모차르트가 생의 후반에 작곡한 이 곡(아인슈타인은 이 곡을 ‘모차르트가 쓴 가장 사랑스러운 곡의 하나’라고 말했다고 한다.)과 앞의 곡의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 느껴 보시길. 또한 이 책의 배경이 되는 「피아노 협주곡 17번 G장조 K.453」과 「아름다운 프랑소와즈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도 꼭 들으면 좋겠다. 올해는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이다. 모차르트와 사랑에 빠지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렇게 해서 ‘토토 키즈 클래식’ 시리즈 네 권이 완성되었다. 만들면서 느끼는 부족한 부분들을 다음 권에 채워 넣어야지 하다 보니 네 권이 되었다. 지금도 느끼게 되는 부족한 부분은 다시 다음 권에서 채워 나갈 것이다.
이세은/애독자 두 명을 확보하고 있는 편집자입니다. 그 동안 토토북에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만의 명화집』 『그런데요, 생태계가 뭐예요?』 『시가 말을 걸어요』 『호랑이굴로 장가들러 간 노총각』 등을 기획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