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2월 통권 제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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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만드는 이야기]
우리 조상의 놀라운 상상력과 재치 속에 빠지다

김민경 | 2006년 02월



우리 고전을 축약본이 아닌 원전에 충실히 맞춰 새롭게 해서 내 보자는 이야기는 2000년 초 현재 어린이 책 출판부 이사로 재직 중인 김이구 선생이 조심스럽게 꺼낸 것이었다. 우리 고전이든 서양 고전이든 ‘고전’은 끊이지 않고 여기저기서 심심치 않게 내는 레퍼토리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이들이 읽던 우리 고전은 지나치게 줄이거나 재미만을 위해 너무 꾸며 내거나 혹은 원전에 너무 충실하다 보니 아이들이 읽기에는 어려운 책들이 많았다. 또한 텍스트 구성의 신뢰도를 보증할 집필 과정에 대한 소개나 부모나 교사, 독자 들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해설도 없었으며, 여러 종의 같은 책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기준을 가질 수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결정한 것이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우리 고전이 지닌 참모습과 의미를 전달해 보자는 것이었다. 김이구 선생과 장철문 선생이 기획위원으로 꾸려지고, 기획의 주안점을 정리하면서 고전문학을 전공하신 여러 선생님들(서울대 박희병 교수, 성균관대 임형택 교수 등)께 자문을 받아 기획의 초안을 잡았다. 지금은 다른 출판사에서 어린이 책을 열심히 만들고 있는 김태희 선배가 초기 작업에 참여를 했다.

『토끼전』 본문 중에서
정작 나는 ‘재미있다! 우리 고전’ 시리즈의 앞 세 권, 『토끼전』 『심청전』 『홍길동전』의 초고가 완성된 뒤에 이 작업에 참여했다. 외국문학 전공자인 나로서는, 그리고 고등학교 때 배운 ‘고전문학’ 수업이 ‘우리 고전’에 대한 ‘아는 것’의 전부인 나로서는, 따로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그렇게 나를 졸리게 만든 ‘우리 고전’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고전’의 엄청난 깊이와 재미에 스며들기 시작했고 (왜 ‘고전의 바다’라고 하는지 진정 실감할 수 있었다.) 첫 권이 나온 이후로 지금까지 여전히 ‘고전’의 매력에 빠져 있다.

디자인은 당시 어린이 책 출판부 디자이너로 있던 강문정 씨가 맡았다. 지금까지 나온 어린이를 위한 고전 책을 구해서 보고, 다른 나라에서 출간된 어린이를 위한 고전 책을 보기도 하고, 우리 옛 그림들, 일본의 옛 그림들 등 여러 책들을 보았는데(출판사 내에 화집들이 좀 있기도 했고, 시안 잡아야 한다며 한 권에 십만 원도 넘는 화집들을 덥석덥석 구매해 즐거이, 공짜로 볼 수 있었다), 지금 그 때를 떠올려 보면 어떻게 모양이 잡힐까 염려하면서도 마음 한켠은 가장 설褸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판형과 본문 레이아웃 등을 구체적으로 잡기 위한 시안 작업을 하는 동시에 ‘어떤 그림이 들어가야 하는가’(그림이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가가 아니라)에 대한 고민도 같이 시작되었다. 흔히 고전 텍스트에 들어가는 그림이라면 당시 시대의 모습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표현했는지에 중점을 둬서 ‘고증’이라는 절차를 거쳐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서는 텍스트의 주요 내용을 압축적으로 잡아 표현하는 그림, 다른 요소들보다 인물에 중심을 둔 그림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닮을 수밖에 없는 우리 조상들, 다시 말해 ‘우리 고전의 주인공들’이라는 생각을 했고 이런 그림이 아이들에게 이 시리즈가 다가가고자 하는 목적(우리 조상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우리 고전’을 제대로 펴내 보자! 하는)과도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잘 알려져 있듯 우리 고전 작품들 중 특히 한글로 기록된 작품이나 판소리로 전승된 작품은 어느 하나를 작품의 정본으로 삼기 어렵다. 또한 무수하게 생산된 필사본이나 활자본의 존재는 다양한 해석의 향방을 보여 주는 것이기에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따라서 작품의 주제를 일률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결국 고전 작품을 새롭게 쓴다는 행위 역시 궁극적으로는 어떤 ‘해석 행위’를 드러내는 ‘이본’을 하나 더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

‘재미있다! 우리 고전’은 고전 원전의 맛과 뜻을 충실히 살리는 것이 기본 취지다. 그러니만큼 익히 알려져 있는 내용이 누락되지 않으면서도 원전의 많은 이본들 가운데 이야기가 상충되지 않고 흥미로운 내용은 수용하여 스토리를 풍부하게 하는 글 작업이 이 책의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뼈대를 이룬다.

이본들과 논문들을 검토하고 주요한 줄거리를 잡은 뒤 기본적인 어법과 표현을 현대화하되 원전의 우리말 어휘와 고풍스런 표현들, 특히 각 작품이 가진 고유의 문체와 어휘를 되도록 살리면서 일정한 수준에서 집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글 작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작품을 충분히 이해하고 소화 숙성시킨 뒤 자신의 글로 집필해서 문체가 겉돌지 않고 독자가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대상 독자 연령 등 이런 내용을 골자로 정리한 ‘집필 요령’을 이 책 맨 뒤에 붙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읽는 작품 해설’의 집필 원칙과 함께 매번 글 작가들과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토끼전』 표지
이 시리즈 첫 권인 『토끼전』은 탄탄한 구성을 바탕으로 등장인물에 대한 재치와 해학이 넘치는 묘사가 읽는 맛을 더해 주는 작품이다. 실제로 의인화된 동물 본연의 특징이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고 거기에 인간이 가진 면모가 익살스럽게 풍자되어 있는 매력이 『토끼전』에서 느껴진다. 소설가 이혜숙 선생은 토끼가 가진 민중적인 발랄함과 지혜와 용기를 생동감 있게 나타내는 것에 역점을 두고 수많은 이본들을 검토하였다. 주제를 강하게 살리는 가운데 원전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인물에 생동감을 불어넣어야 하는 점이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시인 장철문 선생이 여러 판본과 판소리 「심청가」를 활용하여 다시 살려 낸 『심청전』은 생생한 사설과 구성진 가락이 잘 살아 있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주요 등장인물들 가운데 심 봉사와 뺑덕이네의 생생한 캐릭터 창조에 좀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아이들로 하여금 기존의‘심청전’ 이야기를 한층 폭넓게, 다각도로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다섯번째 권인 『장화홍련전』은 잘 알려졌듯이 비극적인 이야기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그 사실성이 더욱 극적으로 드러나서 아이들이 처음 접해 읽기에는 끔찍하고 격렬한 내용도 있다. 이러한 점들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어느 정도 전달할 것인가 매우 고민이 되었다. 그동안 타사에서 출간된 어린이를 위한 ‘장화홍련전’은 교육적인 차원을 중요시한 나머지 지나치게 갈등을 밋밋하게 만들어 이야기 자체를 단순화시켜서 이 작품만의 특색과 장점이 빠져 버린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시리즈의 기획 의도대로, 뻔한 교훈을 넘어서 다양한 갈등과 인간의 어두운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원전에 충실하기로 결정했다.

『춘향전』은 원전의 내용과 수준을 충실히 살리자면 우리가 대상 연령을 잡은 아이들에게는 어렵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고민 고민 끝에 목록에 넣지 않은 작품이었다. 그러던 중 일곱번째 권인 『도깨비 손님』이 나오고 나서 중간 점검을 위한 워크숍을 기획하게 되었다. 책이 출간되기 전 교정지 상태에서 아이들 수준을 고려해 원고 감수를 해 주시는 몇몇 초등학교, 중학교 선생님들을 포함해 사서 선생님들,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치고 계시는 젊은 선생님들 등을 모시고 이 시리즈에 대해 솔직 담백하게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학기 중인데도 여러 분들이 참여해 주셨고, 현장에서 아이들이 이 시리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생생하게 들려주시기도 했다. 이 워크숍은 이 시리즈가 나아갈 방향과 수준 등에 여러 모로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이 때 ‘춘향전’ 이야기가 나왔다. 그간 ‘춘향전’에 대한 고민을 말씀드렸더니 예상외로 요즘 아이들의 수준이 예전 같지 않게 높다면서 꼭 내 주면 좋겠다는 의견들을 들었다. 이런 의견을 수렴하여 『춘향전』 출간이 결정되었고 열두번째 권으로 나오게 되었다.



『토끼전』은 재치와 해학이 가득한 등장인물들의 표정을 잘 살리는 것이 중요했는데, 자칫 표정을 지나치게 과장했다가는 역효과가 나므로 담백하게 표현하기로 했다. 절제된 표현에는 판화 기법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고 김성민 선생은 라인 목판화로 작업하기 시작했다. 주요 등장인물을 잡을 때에도 동물의 특징을 살리면서도 요란하게 옷을 입히거나 치장하지 않고 각각의 지위나 특징을 나타내는 것만 간략히 표현하기로 했다. 캐릭터 잡기까지 시간이 다소 걸렸지만, 밑그림을 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도깨비 손님』 표지
『도깨비 손님』은 『청구야담』 『동야휘집』 등에서 조선 시대 한문 단편을 골라 묶은 작품이다. 이 단편들의 배경이 된 조선 후기는 상품이나 화폐 경제의 발달에 따라 도시와 농촌이 변화하고 양반 계급이 무너지는 등 전통적인 가치관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새로운 역사 현상이 나타나는 시기인데, ‘한문 단편’은 이런 사회 현실을 상당히 사실적으로 그리면서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도깨비 손님』의 그림은 이런 변화를 맞는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정통 동양화 기법으로 아이들에게 보여 주고자 했다. 각 단편의 주인공들의 성격을 잘 살려 정면에서 잡은 그림을 한 컷씩 꼭 넣었는데, 「남대문 안 술집」에 등장하는 후덕하고 성실하게 주막을 꾸려가는 여염집 부부의 모습, 「동전 구멍」에서 재물에 대한 욕심이 지나쳐 크게 화를 당하는 역관의 모습, 「박 포장」에 나오는 너무 선해서 좀 모자란 듯하지만 이런 성품으로 복을 얻게 되는 미련한 군인의 모습 등이 정감 있고 친근하게 그려져 있다.

『춘향전』 본문 중에서
『춘향전』은 지금까지 나온 같은 시리즈의 책들 그림 중 가장 현대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재미있다! 우리 고전’의 『춘향전』은 완판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를 주요 틀로 정했는데, 이 판본의 특징은 이야기가 춘향과 월매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어느 책에서보다 ‘춘향’의 캐릭터가 다각도로 아주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하면서 자신의 사랑을 굽히지 않는 모습이나 ‘이 도령’ 앞에서 애교를 부리는 모습, ‘변 사또’의 수청을 거부하고 옥살이를 하면서 홀로 남게 되는 월매를 걱정하는 모습 등 ‘춘향’을 포함함 주요 인물들의 대화 및 묘사가 판소리의 구성진 가락과 함께 잘 살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정통적인 동양화 선보다는 좀 더 단순하면서 힘 있는 선이 어울리겠다고 판단을 했고, 시대를 초월한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답게 색도 과감하게 사용하였다.



『도깨비 손님』 중에 「산골 사람 고래 잡기」라는, 아주 흥미로운 한문 단편이 있다. 이웃사람이 우연한 횡재로 기러기를 잡은 것을 보고 자기도 큰 돈을 벌어 보겠다고 그물을 짜 바다로 나갔지만, 그물코에 발이 걸린 기러기들이 놀라 일제히 날아오르는 바람에 산골 사람도 덩달아 바다 위를 날다가 결국 바다 속에 빠져 고래 배 속에 들어가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 누구나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1785)이나 『삐노끼오의 모험』(1883)이 생각날 것이다. 언제 어디에 살든지 사람들의 상상력에는 비슷한 구석이 있나보다, 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요즘 아이들도 우리 고전보다 서양의 고전들을 먼저 접할 것이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좀 더 재미나고 친근하면서도 우리 고전의 참맛을 제대로 살린 책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쉼 없이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나아가 우리 조상들의 놀라운 상상력과 재치, 지혜를 보여주는 ‘재미있다! 우리 고전’ 시리즈가 아이들의 마음에 오래오래 남을 책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내어 본다.
김민경 / 대학과 대학원에서 러시아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창비에 몸담은 지 6년이 되어 가지만 새내기도 고참도 아닌 채, 여전히 선후배들한테 부지런히 배워 가며 일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잃어버린, 잊어버린 귀중한 것들을 일깨워 주는 어린이 책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