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04월 통권 제29호
속 깊은 책 이야기
책으로 보는 우리 세상
즐거운 책 읽기
열린어린이 서평
주목 받는 새 책
열린어린이가 권하는
이 달의 책

열린어린이 서평

[윤한구의 그림책 읽기]
소통의 문제를 제기하는 그림책

윤한구 | 2005년 04월

우리가 사물을 본다는 것은 선택적이다. 그리고 선택적 행위에 따라 우리가 본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물을 본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고 믿고 있는가에 영향을 받는다. 그림은 사물을 보는 화가의 시각을 구체화한 것이다. 그림이 예술 작품으로 우리에게 제시되었을 때, 우리는 화가의 상상력이나 표현력을 예술에 대해 배운 갖가지 선입관(미, 진리, 재능, 문화, 양식, 지위, 기호, 상징 등)을 가지고 본다. 그리고 화가의 상상력이나 표현력이 풍부할수록 우리는 보다 깊이 화가의 시각적 체험을 경험하게 된다. 그림책 또한 마찬가지다.

그림책의 그림들은 의미심장한 요소가 되기를 지향한다. 그것은 그림책 고유의 특성이자 목적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를 위해 자신이 의도한 것을 독자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글과 그림, 플롯과 줄거리 등의 세부 사항들을 배열하고, 그 자체의 내적 논리를 분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소통의 문제’가 생긴다. 그렇다면 그림책에서 ‘소통의 문제’는 어느 범주에서 가능한 것일까? 그림을 보는 지식이나 관례와 언어적 지각 행위에만 속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야기의 맥락과 기호학적 의미 체계를 포함한 보다 넓은 ‘의미의 인지 체계’를 형성하는 것일까. 또는 그것이 의식의 범주를 넘어 무의식의 범주까지 포함하는 것일까.

『낮에 나온 반달』은 앞서 말한 ‘소통의 문제’를 제기하는 그림책이다. 이 그림책의 글은 반달의 형체로부터 쪽박, 신짝, 면빗을 유추하고, 그것으로부터 연상되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으로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책의 ‘그림으로 이야기하기’는 우리에게 낯설기만 하다. 몽환적 느낌을 자아내는 공간 속으로 등장인물과 사물들이 불쑥 나타나는가 하면 사라지고, 이야기가 진전되는가 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특히 글의 맥락과 연관성이 적어 보이는 소, 탈, 깨진 거울 등은 어떠한 맥락으로 연결되고 있는지 불투명하며 그림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것들은 마치 전위 미술에서 환상적, 상징적 효과를 위해 작품에 넣는 오브제처럼 여겨진다.

왜 아이는 엎드린 채 누워 있고, 왜 탈을 들고 있는가? 뜬금없이 왜 소는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깨진 거울과 그 속의 두 얼굴은 무엇을 표상하고 의미하는가? 또 그밖의 다른 사물들은? 그리고 그것들은 어떠한 내적 논리로 유기체적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일까?

그림 작가 김용철은 「작업일지」에서 “그리움을 느끼게 하는 요소를 배치하기 위해서 직접적인 분단의 이미지를 최대한 감추고 그것을 비유와 상징적인 기법으로 표현하면서 그리움이란 감정을 최대한 풀어내고자 했다.”라고 하면서 “좀 난해한 결과를 낳았다.”고 말한다. 또한 그림책의 상징들에 대해 “가면이 망태할아범을, 소는 우리 민족의 역사 또는 이산된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존재, 아이와 누나의 모습이 반으로 갈라진 거울 속에 남남북녀를 상징하듯이 분단과 통일의 암시”라고 말하면서, 그것들이 의미심장한 요소임을 밝힌다.

그러나 이러한 작가의 말에 쉽게 납득이 안 된다. 어떻게 아이가 베고 있던 가면이 ‘망태할아범’으로 연상되는지? 어떻게 뜬금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소가 ‘우리 민족의 역사와 이산가족을 하나로 통합하는 존재’로 여겨지고, ‘기쁨을 승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말인가. 또한, 깨진 거울 속의 누나와 아이의 얼굴이 교묘히 하나가 되고 있다고 해서 이것을 ‘남남북녀’로, ‘분단과 통일의 암시’로 해석할 수 있는 건지? 그림책 속의 무엇이 그렇다고 말하고, 어떠한 맥락에서 그렇다는 것일까?

상징은 언제나 특정한 전통이나 신화에 속해 있고, 이 전통과 신화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을 환기시킨다. 상징은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개념적인 것’을 나타내거나 ‘무의식적인 측면’을 지닌다. 따라서 상징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고태(古態)의 잔재’이며 융이 말하는 ‘원형’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이 그림책의 상징들에서는 그러한 ‘상징의 기원’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림책의 맥락 안에서 상징에 대한 ‘해석의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들은 개인적 심성에서 고안되고 창안된 것이 같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작가의 변(辯)을 통해 작품의 모티브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징의 기원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성장 배경이나 낮달로부터의 연상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가 경험한 ‘이산 가족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독특한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잠재 의식에 동화된 사상(事象)이 되었고, 그것을 의식으로 끌어 내는 과정을 통해 상징적인 이미지로 표현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그림책의 상징들은 작가의 잠재 의식 속의 ‘심적 사상’을 형상화한 것, 또는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상징적 표현은 시각적 대상들을 그 자체의 의미로 드러낸다기보다는, 다른 추상적인 관념을 나타낸다. 그래서 이해하기 어렵다. 오로지 그것을 잘 아는 사람들만이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징적 표현을 잘 알고 있다고 해서 그림에 있는 대상들의 상징적 의미들을 모두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그것이 작가의 무의식 속의 ‘심적 사상’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정신 분석 학자들은 꿈이 우리 의식이 지닌 ‘심적 사상’의 무의식적인 측면을 연구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결같이 ‘심적 사상’의 궁극적 실체는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불가지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자진하여 그 상징성을 설명해야만 비로소 독자들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낮에 나온 반달』뿐만 아니라 ‘작가의 말’이 그림책 해석의 ‘열쇠’가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림책의 주제를 작품 밖의 의미와 가치(이 그림책의 경우 ‘분단과 통일, 이산 가족의 그리움’)로 연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림책에서 ‘소통의 문제’는 우리가 작품을 통해 ‘무엇을 읽고, 보고, 느끼고, 인지하는가’가 아니라, ‘작가의 말’을 듣고 ‘작가의 의도나 모티브를 이해하고 수용하느냐’에 달렸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설령 작가의 ‘심적 사상’이, 또는 상징이 우리 모두에게 불가지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유기적인 형식으로 짜여져 있다면 독자의 무의식에 반영되고 독자의 ‘심적 사상’과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이 의도한 것을 작품을 통해 성취하여야 하며, 독자는 작품을 통해 작가가 ‘성취한 것’을 보고자 한다. 그것은 결코 ‘작가의 말’과 같은 ‘작품 외의 언술’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독자들은 ‘작가의 말’에 의해 ‘인지 부조화’ 상태에 빠지기를 원치 않으며, 오히려 작품의 결함을 찾아 내려 들 것이다. 이것은 소통의 문제, 즉 ‘작가는 작품을 통해 독자와 소통하여야 한다’는 명제를 소홀히 한 대가가 아닐까 싶다.
윤한구 | 어렸을 시절 꿈은 훌륭한 화가가 되는 거였어요. 어른이 되어서는 금융계에서 경제 전문가로 일했지만 언제나 그림을 좋아하고 그림책에 관심이 많았지요. 평생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는 없을까 고민하다 '도깨비'라는 어린이책 전문 출판사를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앞으로도 언제나 어린읻르이 아주 좋아하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