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09월 통권 제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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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책 이야기]
꼬마 백수의 행복한 글 읽기

김혜영 | 2004년 09월

권표는 다섯 살배기 남자아이다. 권표 친구의 엄마들은 권표를 ‘백수’라고 부른다. 유치원이나 별도의 교육을 받지 않으며 집에서 빈둥(?)대기 때문이다. 다섯 살짜리 백수라……요즘 아이들의 바쁜 일상을 짐작하게 하는 별명이다. 그렇지만 권표는 늦잠을 실컷 자고 엄마랑 나들이도 가고, 책도 밤늦도록 맘껏 볼 수 있는 행복한 백수다. 나들이 코스 중 나와 권표 모두가 좋아하는 곳은 어린이 도서관이다. 특히 더운 여름엔 도서관만큼 좋은 곳이 없다. 오전에는 한산하기까지 해서 금상첨화다. 권표가 도서관에 가면 항상 뽑아 오는 책들이 몇 권 있다. 그런 책들은 집에도 구비해 뒀건만 집에서 읽는 것도 모자라 도서관에서도 읽는다.

『불꽃놀이』 표지와 본문

그 중 하나가 『불꽃놀이』이다. 도서관 책꽂이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인데 권표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작년과 작년에 여의도에서 열린 불꽃 축제를 본 후 불꽃놀이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밤하늘로 불꽃 하나. 슝―. 펑! 밤하늘로 불꽃 두 개. 슝, 슈웅―. 펑!펑!…… 하늘 가득 불꽃송이야…….” 한쪽 면에 짧은 글이 한 줄씩 있어 환상적인 불꽃의 모습을 더욱 살려 주는 듯하다. 군더더기 설명이 없어 그림에 몰두하며 불꽃놀이를 감상할 수 있다. 이 책을 본 다음부터 권표는 벽에 붙여 둔 종이에 볼꽃놀이만 그린다. 집에 있는 그림 도구란 도구는 다 꺼내어 마구 마구 그려 댄다. 마치 영감을 받은 예술가처럼 종이 한 장 가득 형형색색으로 쫙쫙 그어 대는 모습이 시원스럽기까지 하다. 불꽃이 하늘로 올라가서 펑하고 터지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얼굴 가득 환하게 번지는 미소를 보면 내 마음도 행복해진다. 책 한 권으로도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는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정말 부럽다.

『로라의 별님』 표지와 본문

그 다음은 『로라의 별님』. 로라라는 여자아이가 어느 날 밤에 하늘에서 떨어져 다친 별을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간호해 준다. 별은 곧 다 나았지만 점점 빛을 잃어 가게 된다. 하늘로 돌아가고 싶은 별의 마음을 헤아린 로라는 이별이 슬프지만 별에 풍선을 달아 하늘로 돌려보내 준다. 매끄럽고 쉬운 문장과 수채화의 은은하고 포근한 느낌이 순수한 로라의 마음을 전해 준다. 별을 반짝거리는 은박으로 처리하여 그림을 더욱 돋보이게 하면서 아이의 흥미를 유발하는 데 도움을 준다. 권표는 로라가 다친 별을 간호해 주는 장면을 특히 좋아한다. 로라가 병원놀이 장난감으로 별을 진찰하고 밴드를 붙여 주는 장면만 나오면 책을 눕혀 놓고 자기도 별을 진찰한다. 별에 밴드를 붙여 두기도 했다. 자기가 붙인 밴드를 볼 때마다 자기가 붙였으면서 ‘누가 붙인 거지?’ 하며 흐뭇해하는 권표. 자기가 별을 낫게 해 줬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로라가 별을 풍선에 매달아 하늘로 올려 보냈으니 자기도 풍선에 매달리면 하늘에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가 정말 사랑스럽다. 마지막 장면에는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있는데 그 별은 ‘권표 별’이란다. 권표의 소중한 추억이 될 이 밴드 붙여 놓은 책을 계속 보관해야겠다.

『휘파람을 불어요』 표지와 본문

『휘파람을 불어요』는 권표가 아주 어릴 때부터 좋아해서 지금도 계속 찾는 책이다. 어쩌면 내가 더 좋아하는 책일지도 모른다. 피터라는 아이가 휘파람을 불고 싶어서 입을 쭉 내밀어 연습을 한다. 계속 실망만 하다가 드디어 휘파람을 불 수 있게 되어 기뻐한다는 내용이다. 신기한 모험이나 환상과 상상의 세계, 예상 못한 반전, 톡톡 튀는 문장도 찾을 수 없다. 아주 평범한 아이의 일상적인 행동을 잔잔하게 묘사했음에도 이 책은 권표의 마을을 확 붙잡아 두는 묘한 매력이 있는 책이다. 피터의 행동 하나 하나에서 피터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 낼 수 있는 작가의 역량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애즈라 잭 키츠의 책은 아이의 심리 묘사가 뛰어나 혹시 아이가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이 책은 처음 봤을 때부터 권표가 반드시 좋아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던 책이다. 권표가 매우 좋아하는 신호등과 이발소등이 등장하고, 뱅글뱅글 돌기와 그림자 밟기, 벽 따라 선긋기를 하는 피터의 행동이 권표와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권표도 피터가 자신과 닮은 점이 있다는 걸 아는지 가끔 자기를 ‘피터’라고 불러 달라고 주문한다. “엄마, 오늘은 내가 피터가 됐으니까 피터라고 불러 주세요.” 이렇게 말한 날 내가 실수로 권표라고 부르기라도 하면 짜증을 낸다. 책에 여러 주인공들이 있건만 유독 피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책을 보기 전엔 권표의 친구들은 보통 자동차나 공룡, 동물들을 좋아하는데 이발소등과 신호등에 집착하고 뱅글뱅글 돌기에 열중하는 권표가 참 이상했었다. 그런데 피터를 보니 권표 같은 아이가 또 있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불꽃 그리기에 심취한 권표가 잠시 이발소 그리기에 열을 내게 만든 책이다. 권표의 손때가 묻어 너덜너덜해진 책이 정말 정겹다.

『눈사람 아저씨』는 만화 컷 형식으로 그려진 글자 없는 그림책이다. 눈이 펑펑 내린 어느 겨울날 한 소년이 눈사람을 만들었다. 밤이 되자 그 눈사람이 살아서 움직이게 된다. 눈사람과 집안 구경도 하고 밤새 손을 잡고 하늘도 여행한다. 동틀 무렵 집으로 돌아와 눈사람과 이별하고 잠이 든다. 아침에 마당에 나가보니 눈사람은 이미 녹고 흔적만 남아 있다는 슬픈 이야기다. 색연필로 그린 듯한 담백하고 포근한 그림이 눈사람이라는 소재를 돋보이게 한다. 재작년 겨울에 샀다가 권표가 보기엔 아직 이른 것 같아 나중에 읽어 주려던 책인데 책을 보면서 줄거리만 대충 이야기해 줬는데도 아이가 금세 좋아했다. 대부분의 그림책이 해피 앤딩인 데 반해 슬픈 결말인 점이 독특하다. 권표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펼치지 않고 책을 덮곤 한다. 눈사람 아저씨가 녹은 걸 보는 게 싫다고 한다. 어느 날 권표가 이 책을 보다가 후다닥 뛰어오더니 “엄마는 눈사람처럼 녹아 버리지 마세요, 사랑해.” 하며 안긴 적이 있다.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어린 아이들도 이별의 슬픔과 두려움을 느낄 줄 아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정말 오래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행복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가끔 권표는 화가 나면 “나 녹아 없어져 버릴 거야!”라며 귀여운 협박을 해서 가슴이 덜컹 내려앉게도 한다. 이 책은 비디오로도 나와 있는데 아름다운 영상과 더불어 배경 음악 또한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의 감수성도 자극할 만큼 아름답다. 권표는 이 노래를 가끔 흥얼거린다. 아름다운 음악은 아이도 알아 보는듯하다.

작년 겨울 유치원들이 원아 모집을 할 때 참 망설였었다. 유치원에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 권표는 당연히 안 간다고 했고, 나는 새벽까지 책을 보고 자는 권표를 위해서는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됐었다. 지금에 와서 보니 시간에 쫓겨 억지로 안 재워도 되고, 도서관도 자주 다니고, 자연과 벗하며 사는 우리 권표가 너무 행복해 보인다. 권표의 행복한 책 읽기가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권표가 노년이 되어서도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독서를 취미로 즐기며 평온하게 살기를 바라는 소박한 소망이다.
김혜영 / 다섯 살짜리 아들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살고 있는 평범한 엄마입니다. 현재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권표의 어린 시절에 좋은 추억들을 많이 새겨 줄까 하는 것이랍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