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09월 통권 제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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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어린이-동화는 무엇을, 왜, 어떻게 말하는가]
찬장 속의 식은 죽은 정말 썩어 버릴까

노경실 | 2004년 09월

1959년에 제작된 이탈리아 영화, 「형사」. 이 영화의 주제곡인‘아모레 미오’(Amore Mio)는 우리 말로 ‘죽도록 사랑해서’라고 하는 곡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비 오는 오후, 로마 시내의 어느 오래된 고급 아파트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젊은 부인, 릴리아나가 흉기에 찔려 살해당한 것이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인그라발로 형사에게 한 주변인이 이렇게 말한다. “릴리아나 부인은 가족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했죠. 그래서 고아원과 수녀원 일이라면 온갖 정성을 다 쏟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녀에게는 남편 외에는 아무도 없답니다. 사실 그렇지요. 자식이 없는 부부는 찬장 속의 식은 죽 같아요. 언젠가는 상하고, 이내 썩어 버리지요.” 물론 영화를 제작하던 시대가 1959년이고, 어찌 보면 우리보다 더 강력한 가족 중심의 사회인 이탈리아라서 그런 대사가 나온 것일까 ― 마피아도 가족에서 출발하였듯이.

하지만 영화 「형사」가 만들어진 후, 44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그 말이 이탈리아가 아닌 우리 나라에서는 당연함은 물론, 자식 없는 부부나 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천형처럼 압박을 가하고 있다. 우리에게 ‘가족’이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식이라는 필수 구성원이 있어야만 성립되는 불문율이 있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그 여자가 이혼을 했다. 호적을 떼어 보니 ‘일가창립’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편의상의 관제용어일 뿐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이든, 남동생이나 오빠이든, 심지어는 죽은 할아버지이든! 가족의 한 ‘남자’에게 연결되어 있다. 게다가 그녀가 자식을 맡았다고 하자. 그런데 재혼을 하게 되면 그 아이는 절대 새 아버지의 성을 따를 수 없다. 결국 한 집에 3가지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게 된다. 아버지는 김씨, 어머니는 이씨, 아들은 박씨…… 이런 식으로. 우리 나라에서 사람들과 법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남편(아버지)이 없는 가정은 찬장 속의 식은 죽 같아요. 언젠가는 상하고, 이내 썩어 버리지요!”

『못난 바가지들의 하늘』 표지
여기 찬장 하나가 있다. 그 찬장에는 이름도 있다. ‘사랑의 집’. 그 찬장 속에 12개의 죽 그릇이 있다. 그 12개 그릇 속의 죽은 이미 식은 듯도 하고, 이미 상한 냄새도 나는 듯하다. 모두 정신과 육체의 질병으로 부모에게조차 버림받은 어린 영혼들이다. 하지만 그 죽그릇을 피하지 않고 돌보아 주는 부부가 있다. 『못난 바가지들의 하늘』이라는 책은 동화라기보다는 한편의 현장 드라마에 더 가깝다. 작가는 오래 전, 그가 함께 뒹굴었을 법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전하는 데에 차마 수식이나 과장, 미화를 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작가의 작품이 아닌 마치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서 하는 이야기처럼 전해 주는 아이는 ‘사랑의 집’ 근처의 평범한 가정에 사는 ‘문기준’이란 초등학생이다. 기준이는 이야기 서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바가지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에게 이야기의 과정을 암시해 준다.

변소 지붕 위에는 두 개의 박이 열렸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모양도 좋고, 일찍 눈에 띄어 편안히 자리를 잡아 훌륭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무성한 제 이파리에 가려 햇볕도 못 보고 불편한 자리에서 찌그러진 채 잘못 자랐습니다.
“이 박은 키워서 쌀바가지를 하고…….”
주인이 잘생긴 박을 보고 말했습니다.
“이놈은 그저 똥바가지나 해야지…….”
못난 박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략)

겨우내 바가지들은 제 할 일을 했습니다. 잘생긴 바가지 한 쪽은 뒤주 속의 쌀을 됨질하고, 한 쪽은 벽에 걸린 채 시집간 딸이 오기만 기다렸습니다. 못생긴 바가지 한 쪽은 손잡이에 꿰매진 채 똥물을 퍼붓고, 한 쪽은 여물통을 드나들며 외양간의 황소를 살찌웠습니다.

어머니의 둥근 배 안에서도 원하지 않았는데, 세상 빛을 처음 보는 순간 어떤 종류의 악마하고도 부딪힌 적 없는데, 처음 어미의 젖을 빠는 그 순간에 단지 본능적인 배고픔으로 아물지도 않은 잇몸에 힘을 주었을 뿐인데…… 몸도 마음도 내 의지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못난 바가지처럼 일그러져 세상에 나온 아이들. 그 아이들이 설령, ‘불편한 몸으로 인간 세상에 내려가 못된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주어라.’ 하는 특별 명령을 하나님께 받은 천사일지라도, 그 아이들은 ‘지금’ 아프고, ‘지금’ 서럽고, ‘지금’ 외로운 것이다. 그래서 그 아이들은 ‘지금’ 밥이 먹고 싶고, ‘지금’ 곁에 있어 주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고, ‘지금’ 보듬어 주는 손길이 절실한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들의 가족과 이웃은 ‘당장’ 힘들고, ‘당장’ 괴롭고, ‘당장’ 수치스럽다 하여 아이들을 거리 한 구석에, 어느 시설의 문 앞에 내던지고 잰걸음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악마의 세상이 아니다. 즉, 인간 세상인지라 어느 곳에서인가 빛도 이름도 없이 그 아이들을 안아 주는 ‘인간’이 있고, ‘집’이 있다.

한때 무지막지한 심성의 권투 선수였던 장 선생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권투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함께 출전하려는 친구의 한 쪽 손목을 도끼로 찍어 버렸던 흉악한 범죄자였다. 그런 그에게 신앙의 빛줄기는 심장의 한 구석을 예리하게 갈라 놓으며, 남은 생을 버림받은 아이들과 함께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사랑의 집’에 12명의 아이들이 모여 살게 됐다. 이미 식어 버려서 곧, 썩어 갈 것 같은 하잘 것 없는 식은 죽 그릇 같은 아이들. 그러나 그 아이들은 장 선생의 사랑의 집에서 어느 조미료도 흉내낼 수 없는 맛난 향을 뿜는 따스한 죽그릇으로 변해 갔다. 아이들은 장 선생 내외를 아버지 엄마로 부르며, 못난 바가지에도 쌀을 담을 수 있고, 시집 간 이쁜 딸의 선물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서로가 일깨워 주는 것이다. 이 놀라운 변화에 어찌 수고와 눈물과 땀이 따르지 않겠는가. 작가는 기준이와 기준이 할머니의 텃밭 매는 모습을 통해,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지만 서로 모여 집이 되고, 가족이 되고, 그리하여 행복을 ‘지금’ 느끼며 살 수 있는 힘을 얻게 해 준다.

기준이는 텃밭 귀퉁이에 호미를 들고 앉았습니다. 밭이랑은 참비름, 쇠비름, 질경이까지 어우러져서 아예 풀밭입니다. 그것을 모두 매라는 명령입니다. 밭이랑 이쪽 끝에 앉아 보니 저쪽 끝이 십 리는 되는 듯합니다. 호미로 한 번 찍고, 헛간에 가 오줌 한 번 누고, 풀 한 포기 뽑아 놓고 부엌에 가서 물 한 바가지 더 마시고……. 뙤약볕은 뜨겁고, 미칠 노릇입니다. (중략)

호미를 받아 쥔 할머니는 밭을 매 나가기 시작합니다. 오른손으로 호미질, 왼손으로는 잡아 뽑은 풀들을 간추려서 곁에다 놓습니다. 오줌도 누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하늘도 보지 않고, 호미질로 풀만 뽑아 나갑니다. (중략) “……기준아, 봤지?” 할머니가 한참만에 무릎을 짚고 일어서며 말을 이었습니다. “‘저렇게 풀이 우거지고 기다란 밭이랑을 언제 다 매나’하고 ‘눈’이 걱정할라치면, ‘가만 나둬라. 내가 다 매마’ 하고 호미 잡은 ‘손’이 대답하느니라…….” 할머니는 기준이에게 호미를 건네 주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왜 빛도 이름도 없이 눈물과 땀을 흘리는 일일수록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가? 왜 늘 눈 앞에, 발등 위에 떨어지는 것은 그치지 않는 어려움들인가? 그래서 ‘사랑의 집’의 부모인 장 선생 내외의 일상은 기준이 할머니의 밭 매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러고보면 기준이는 참 운이 좋은 아이다. 밭 매는 모습에서조차 삶의 방식을 보여 주는 할머니와, 자신의 삶 전체가 밭 매는 모습인 장 선생 내외가 곁에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들 곁에는 그런 어른들이 드물다. 어느새 우리들의 가족 개념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사라졌다. 어른이 없다. 신문,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행복한 가족의 모습에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모습은 거의 희화화의 대상일 뿐이다. 소위 우리 나라의 표준적인 가정이란 부모와 한 자녀 혹은 두 자녀이다. 당장 텔레비전을 켜고 광고를 살펴 보아라. 어른이 없고, 가족의 의미는 핵세포처럼 완전 간단해졌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강요하고, 밖으로부터 강요당하고 있는 전통적인 ‘가족’이나 ‘가정’에 대한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한집에 누구누구가 사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누구가 한 지붕 아래에서 ‘어떻게 살아 가느냐’이다. 그렇지 않고서 세상의 도도한 흐름에 숨가쁘게 뒤쫓아 가며 유행 따라 외양은 쉴 새 없이 갈아입으면서도, 머릿속은 절대 한 치도 움직이거나 한 순간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것 같은 납덩어리처럼 굳어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전통적인 가족’ 개념의 노예가 될 것이다.

마치 오늘은 내가 가족 개념 개혁주의자처럼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너무 솔직하여, 어린아이의 일기장 같은 ‘못난 바가지들의 하늘’ 탓이다. 책을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나 자신이 신념처럼 굳게 믿고 의지하며 갈망하고 있는 ‘가족’에 대한 생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랑의 집’ 식구들은 서로 타인이었으며, 버림받은 자들의 집단이다. 그러기에 법과 우리들은 그들을 전통적인 가정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을 연민의 눈길로 바라본다. 아니, 바라보기만 한다. 하지만 짐짓 심각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이 돌아가야 하는 ‘집’은 어떠한가? 그 ‘집’에 어머니가 있거나 없거나 한들, 쌀독에 쌀이 그득 차거나 텅 비어 있거나 한들, 우리들의 지금 모습은 결국 유년의 자리에서 출발한다.

여기 ‘희대의 살인마’라 불리는 한 사람이 있다. 그에게도 가족과 가정이 있었다. 그는 버림받은 아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범죄자가 된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의 유년을 공범으로 몰았다. 가족도, 가정도 있던 유년 시절이었는데, 왜? 그에게 가족은 있었지만, 장 선생의 사랑의 집에는 넘치도록 있는 ‘서로를 위한 눈물과 수고와 땀’이 없어서였던가? 가족 서로가 못난 바가지들이라 여겼기에 서로가 ‘쪽박’내는 데 급급했다는 것인가?

장마가 끝나고, 오랜만에 만난 눈부신 햇살. 그러나 우리의 두 눈앞을 캄캄하게 만든 소식이 있었다. 연쇄 살인범 검거 소식. 처음엔 19명. 몇 시간 지나지 않아 20명, 하루가 더 지나자 21명…… 그러다 이제는 몇 명이 더 나올지 경찰조차 예상 못하고 있는 형편. 우리들은 한여름의 더운 땀과 공포의 식은땀과 절망의 탄식을 함께 흘려야 했다. 그런데 우리를 기막히게 한 것은 사건 용의자의 원룸에서 발견된 그의 「사진 속의 사랑」이라는 자작시 한 편.

‘온 가족이 / 모였었던 순간이었습니다. / 모처럼 많은 대화 나누며 / 웃을 수 있었던 자리였습니다./ 너무나 행복해 / 그 순간을 사진 속에 담았습니다. / 오랜 시간 흘러 / 그 때의 사진을 다시 꺼냈습니다. / 사진 속의 어머니는 / 가족 모두를 껴안고 계셨습니다. / 어머니 품에 자식 모두를 안고 싶어 / 정말 힘들게도 겨우 모두를 안고 계셨습니다.’

시의 내용이 정확히 보도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살인범이 아닌 한 버림받은 사람의 소망을 절절하게 느꼈다. 그것은 어느 특정 살인범의 꿈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 가는 사람들의 소망이며,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잃어 버리고 있는 소중한 것이 아닌가 한다. “어머니는 가족 모두를 껴안고 계셨습니다. 어머니 품에 자식 모두를 안고 싶어 정말 힘들게도 겨우 모두를 안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가정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를 수 있는 그 어머니들이 지금 어디에 있기에, 많은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거리를 방황하고, 지인들의 가슴에 눈물이 그치지 않게 하며,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비수를 꽂는 것일까?

가만히 서 있어도 온 몸에 땀이 줄줄 흐르는 이 더위에 그 자는 야구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눈 밑까지 올라오는 마스크로 자신을 가렸다. 가끔 두 눈동자가 얼핏 보인다. 보는 이에 따라 그 눈빛은 잔인하거나, 초조하거나, 섬뜩하거나, 회환의 빛일 것이다. 그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앞에 그가 표현한 ‘가족 모두를 힘들게도 껴안는 어머니’가 나타난다면 뭐라 말하며 모자와 마스크를 벗을까. 부모와 형제는 있지만, 가족과 가정도 이루었지만 함께 나눌 사랑이 결핍되어 서로 썩어 가는 줄도 모르는 채 찬장 구석 속에서 행복을 숨 넘어가게 외치는 시대. 그러나 세상의 못난 바가지 취급을 받는 사랑의 집 아이들은 ‘누구누구이냐’를 개의치 않고, 한 지붕 아래에서 ‘어떻게’ 사느냐를 통해 법과 관념이 부끄러워할 만큼 아름다운 바가지이자, 식지 않는 죽 그릇이다.

그런데 당신은 ‘가족’이라는 찬장 속에서 점점 시큼해져 가는 식은 죽은 아닌지? 스스로 못난 바가지라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어쨌거나, 참으로 오랜만에 ‘아모레 미오’를 들어야겠다. 결국은 사랑이다!
노경실 / 『중앙일보』(동화)와 『한국일보』(소설)로 등단하였습니다. 출판 일을 하면서 열심히 글을 쓰고, 시시때때로 그림책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권의 장편 소설과 많은 동화책을 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반 고흐와 체 게바라와 로알드 달 그리고 희진이와 현호를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