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02월 통권 제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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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옥의 그림 읽기]
감미로운 평안에 잠겨 솔솔 졸음이 온다

한성옥 | 2004년 02월

요즘 주변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들 가운데 하나가 ‘정신이 없다’는 말이다. 쉬흔을 눈 앞에 둔 내 또래들이 모일 때면 잊거나 빠뜨리고 착각하고 실수한 이야기를 나이 탓과 함께 저마다 한두 가지씩 늘어 놓는 일이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총각같이 훌쩍 커 버렸어도 늘 풋풋한 나의 중학생 아들아이 역시 만만치 않다. 나이에 따라, 형편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생각할 것, 처리할 것, 기억할 것들이 하도 많아 저마다 나름대로 정신없이 살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을 바라는가?” “‘그것’과 ‘이 순간’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삶의 본질에 관한 질문이 우리 마음에 머문 지도 꽤 오래 되어 이젠 그런 질문을 하는 것조차 낯설고 겸연쩍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숨가쁘게, 숨가쁘게 살고 있다. 정작 소중한 것들은 숨가쁜 사이로 다 흘러 나가는지도 모르겠다. 좀 쉬고 싶은 마음이다.

봄부터 가을 내내 관광객들로 붐비고 온갖 이름 모를 꽃들과 나무들이 가득한 영국에서 겨울을 보낸 적이 있다. 벌써 2년 전 일이다. 그것도 웨일즈 지방의 시골이었던 터라 더욱 더 한가롭고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푸르고 무성했던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유난히도 잔가지가 빼곡한 나무들과 겨울에도 푸른 잔디 위에서 풀을 뜯는 양들의 아담한 조화 속에서 누렸던 평안함이 지금도 가슴 깊이 남아 있다. 오후 네 시면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이 왠지 아쉬움을 머금고 있는 우리네 나이 마음 같아서 차갑고 습습한 공기를 맞으며, 나무들을 바라보며, 양들을 바라보며, 한동안 걷곤 했다.

그렇게 보이는 것에 따라 마음이 달랐다.

알래스카는 미국을 오갈 때 공항에서 먼 발치로 능선과 깜빡이는 불빛밖에는 본 적이 없다. 그것도 늘 어슴푸레한 새벽이나 캄캄한 밤이었다. 그 유리창 너머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알래스카를 볼 때마다 늘 생각나는 책이 있었다. 1992년 미국에서 출간된 Northern Lullaby이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 알래스카로 이사한 낸시 화이트 칼스트롬이 광활한 자연을 보고 영감을 얻어 쓴 평온하고 나지막한 자장가를, 여러 민족의 다양한 문화를 담아 내는 그림으로 정평 있는 위대한 작가 딜런 부부가 걸출한 솜씨로 아름답게 그려 냈다.

자연의 모든 대상을 가족으로 느끼는 따뜻한 시선과 광활한 자연이 딜런 부부의 탁월한 연출로 책을 펼치는 동시에 그대로 가슴으로 온다. 번잡하고 복잡한 도시를 떠나 알래스카로 이사한 글 작가는 그곳의 광활한 자연 속에서 쉼을 얻고 그 쉼을 통해 달라진 작가의 마음은 자연의 모든 대상물을 가족으로 보게 된다. 별과 달과 산과 강, 온갖 동물과 버드나무, 자작나무까지 모두 가족이다. 거기에 작가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는 딜런 부부의 해석력이 힘을 더해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우리는 깊은 안식을 만나게 된다. 자장가가 주는 평온함을 수평 구도로, 자연의 모든 대상을 섬세한 그림 언어로 의인화하여, 세련된 그래픽 디자인 그릇에 담았다. 그 사이 사이 딜런 부부의 섬세한 감수성이 듬뿍 담겨진 액세서리들과 각별한 그림 기법들이 화면에 감칠맛을 더한다. 하지만 오늘은 그저 이 책 전체를 품어 안으며 평안한 휴식에 잠기리라.

우리 나라의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소개할 수 있게 되어 난 무척 기쁘고 행복하다. 내가 쉬고 싶으면 많은 사람도 쉬고 싶겠지. 글 작가가 얻었던 안식을 딜런 부부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우리도 ‘그 곳’에서 함께 만날 수 있으리라. 이렇게 아름답고 평안한 쉼을 주기 위하여 처절한 싸움을 했을 작가의 작업실과 작업 과정은 지금은 생각하지 않으리라. 그냥 그 감미로운 평안 속에 내 몸을 맡겨야지.

솔솔 졸음이 온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미국 FIT와 SVA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하였습니다. 미국에서 활동하다 귀국하여 지금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일러스트레이터, 그림책 작가로 활동합니다. 대표적인 국내 작품으로 『나의 사직동』 『우렁 각시』 『시인과 여우』 『수염 할아버지』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