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 통권 제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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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나온 그림책 들여다보기]
어른들은 모르는 세계, 어른들도 알고 싶은 세계

김지현 | 2003년 11월

희미한 하늘을 뒤로한 채 한 여자 아이가 엄마 아빠와 함께 바닷가 자갈밭을 걸어옵니다. 떠돌이 개 한 마리가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이 가족을 쳐다봅니다. 폴짝거리며 뛰어오는 폼을 보아하니 이 집 딸 셜리는 생기 넘치는 보통 아이임에 틀림없고, 의자에 물병에 신문에 파이프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어른들은…… 어, 이 어른들은 도대체 뭐지?

존 버닝햄의 그림책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의 어른이 등장합니다.『지각대장 존』이나『장바구니』에 나오는, 어린이의 마음을 눈곱만큼도 이해하려 들지 않는 못된 어른들이 있는가 하면,『검피 아저씨의 뱃놀이』나『크리스마스 선물』에서 만나는 순하디순한 천사표 어른들도 있지요. 셜리의 엄마 아빠는 이 둘 중 어디에 속하는 어른들일까요?

바닷가 한쪽에 의자를 놓고 앉아 뜨개질감과 신문을 꺼내 든 엄마 아빠는 또다시 집에서의 일상을 이어나갑니다. 파이프를 입에 문 아빠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신문만 읽더니 곧 잠이 듭니다. 엄마는 새 구두에 흙탕물 안 튀게 해라, 아무 개나 쓰다듬지 마라, 냄새 고약한 바다풀 가지고 놀지 마라, 잔소리에 잔소리를 거듭합니다. 그 동안 셜리는 뭘 하고 있었을까요? 물론 새 구둣발로 흙탕물을 자박거리고, 떠돌이 개를 품에 안고, 바다풀을 한 움큼 쥐고는 뛰어 놀고 있었겠죠. 하지만 또 한명의 셜리는 벌써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흥미진진한 모험을 즐기고 있었답니다.

해적과 한바탕 싸움을 벌여 보물 지도를 손에 넣은 셜리는 떠돌이 개와 함께 보물섬을 찾아갑니다. 드디어 보물 상자를 발견한 셜리와 개. 그들은 금빛 왕관과 진귀한 보석을 주렁주렁 매단 채 달빛 가득한 밤바다를 유유히 항해합니다. 새파란 하늘과 찬란한 태양, 금빛 노을과 낭만적인 밤바다를 배경으로 오른쪽 화면에 펼쳐지는 셜리의 모험은 더할 나위 없이 다채롭고 동화적입니다. 하지만 처음과 똑같은 자세로 하얀 배경 속에 앉아 있는 왼쪽의 두 어른은 왜 이리도 무미건조하고 고단해 보이는지요. 셜리의 엄마 아빠는 결코 천사표 어른은 아니지만, 이 지친 표정 때문에 못된 어른에 끼워 넣기도 찜찜하네요.

바닷가까지 와서도 셜리처럼 뛰어 놀거나 자유로운 상상을 펼치지 못하는 어른들의 등 뒤로 고단하고 빡빡한 일상이 스쳐 지나갑니다. 한때는 셜리처럼 풍성한 색깔로 빛났을 그들의 삶도 세월과 생활에 바래져 흰 여백으로만 남았나 봅니다. 아이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 아직 어딘가에 있을 네버랜드를 이제는 기억조차 못하는 가여운 어른들. 집으로 돌아가는 엄마 아빠의 뒷모습이 엄마 손에 붙들려 억지로 끌려가는 셜리보다 더 안타깝고 씁쓸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닐는지요.
김지현 | 대학에서 문예창작학을 전공하고 오픈키드 컨텐츠팀에서 즐겁게 어린이책을 읽고 있습니다. 자신이 느꼈던 글이 가진 좋은 힘, 그 힘을 믿으며 자라는 아이들이 이 땅에 많아지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