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09월 통권 제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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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보는 다른 나라 그림책]
작고 섬세한 소리에 귀 기울이는 로버트 맥클로스키

서남희 | 2003년 09월

로버트 맥클로스키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의 한 음계를 다 짚을 수 있을 정도로 길어지자 레슨을 받기 시작했던 꼬마가 있었어요. 신기한 소리의 나라에 푹 빠진 아이는 하모니카와 드럼과 오보에의 세계로 빠져 들었고, 음악 연주만이 자기가 가야 할 길인 것 같았죠.

하지만 어느 날 ‘기계’라는 것이 눈에 확 들어오죠. 아이는 낡은 시계, 전동 모터, 철삿줄, 강철 조립 세트 등을 소중하게 모으기 시작했고, 새로 뛰어든 이 발명가의 세계는 놀라웠습니다. 리모컨을 누르면 훌륭하게 돌아가는 기차와 크레인도, 불꽃을 튕기며 빙글빙글 도는 크리스마스 트리도 만들어 냈으니까요.

빙글빙글 돌다 보니 다른 세상―물감과 붓이 어울려 드러내는 세상이 열렸죠. 고등 학교 때 리포트와 연감에 그림을 그리다 눈이 뜨였다니…… 학교 덕분에 열리는 세상도 있군요. 재주가 뛰어나 장학금을 받으며 보스턴, 뉴욕, 로마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메인 주에 정착하면서 뛰어난 그림책을 여러 권 만들어 내 칼데콧 상을 네 번이나 수상한 이 사람의 이름은 ‘로버트 맥클로스키’.

그를 그림책 세상에 널리 알린 책은 『아기 오리들한테 길을 비켜 주세요』(Make Way for Ducklings)입니다. 알을 안전하게 낳아 살 곳을 찾아 헤매던 오리 부부는 보스턴의 이곳 저곳을 찾아 헤매다가 공원에서 멀지 않은 찰스 강의 어느 작은 섬에 정착하지요. 경찰관인 마이클이 그들에게 모이로 땅콩을 주곤 했고, 새댁 오리는 드디어 알을 여덟 개 낳아 엄마 오리가 되었고, 거기서 부화한 아기 오리들을 공원에 데리고 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도로를 건너기 위해 엄마 오리와 아기 오리들이 꽥꽥거립니다. 그 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온 마이클은 차들을 세우고 오리들을 먼저 건너게 하죠. 운전자들이 황당해 하는 모습과 콧대를 높이 들고 건너는 엄마 오리의 모습이 아주 재미있는 책입니다.

『아기 오리들한테 길을 비켜 주세요』(Make Way for Ducklings)
표지와 본문

그는 이 책을 만드는 데 꼬박 삼 년이 걸렸다고 하네요. 혼북(Horn Book)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림은 일단 다 완성해 놓고서 글을 쓰고, 고치고, 또 고치고 했답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아는 여자 아이들 이름이 떠올라서 “Jack, Kack, Lack, Mack, Nack, Ouack, Pack, Quack” 이렇게 다 모아 보고는 자꾸 읽어 봤더니 점점 아기 오리들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군요. 이 책이 칼데콧 메달을 받게 되어 로버트 맥클로스키라는 이름이 유명해지긴 했지만, 오리들이 자연에서 스스로 먹이를 구하지 않고 사람들이 주는 땅콩에만 매달리는 내용으로 인해 일부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요.

그의 책 중에서 제가 처음 읽은 것은 블루베리와 곰과 아이가 나오는, 은은한 청색 그림이 정답고 내용도 잔잔하면서 은근히 재미있는 책이었는데, 제목도 지은이도 기억을 못해 안타까웠었죠. 그래서 도서관에 갈 적마다 이리저리 둘러보곤 했는데 이 년쯤 뒤에 드디어 Blueberries for Sal책으로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나 주었을 때의 그 기쁨! 바로 그 책이었답니다.

딸기보다 작고, 블랙베리
보다 큰 블루베리
(오른쪽 아래)
우리 말로는 『딸기 따는 샐』로 번역이 되어 있지만, 블루베리는 딸기가 아니라 앵두보다 더 작고 검푸른 색이 나는 열매입니다. 사전을 찾아 보니 ‘월귤’이라고 나왔는데, 이름이 좀 서먹하군요. 여름 한철 잠깐 나오는데, ‘Bing cherry’라는 품명의 체리가 크고 단단하며 달고 화려한 맛이라면 블루베리는 작고 소박하고 심심한 맛이 나고 열매가 물렁물렁해서 금방 으깨지기 때문에 살살 씻어야 한답니다.

책을 펼치면 기본 색은 모두 한가지깺죨블루베리 색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작가의 세심한 면에 마음이 아릿아릿해지지요. 엄마는 큰 양철통, 샐은 작은 양철통을 갖고 블루베리 언덕으로 블루베리를 따러 가는 길. 엄마는 열심히 그 수줍은 남보랏빛 알들을 따 통에 모으지만 샐은 세 개를 톡, 태, 톡 넣어 보았다가 다시 집어 먹는답니다. 그리곤 엄마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며 엄마의 통 속에 든 블루베리를 한 줌 가득 꺼내 먹는 귀여운 모습. 슬슬 다리가 아파지자 그냥 덤불 틈에 주저앉아 마음껏 블루베리를 따먹기 시작하는데…….

이 언덕 저 편에서는 엄마 곰과 아기 곰이 블루베리를 먹으려고 언덕을 오르고 있었지요. 엄마 곰의 말씀이 재미있어요. “Little Bear, eat lots of berries and grow big and fat. We must store up food for the long, cold winter.” 음식을 배 안에 넣든지, 병조림으로 만들든지, 겨울을 위해 저장하는 건 사람이나 곰이나 다를 바가 없군요. 이 아기 곰도 엄마를 뒤따라 다니면서 블루베리를 따 먹다가 그만 발이 아파서 아예 어느 덤불 틈에 주저앉아 블루베리를 따 먹기 시작했죠. 그러다가 샐은 엄마 곰을 따라다니게 되고, 아기곰은 샐의 엄마를 뒤따라 다니다가 나중에 진짜 엄마들과 다시 만나서는 원위치―마지막 장을 펼치면 부엌에서 열심히 블루베리 잼을 만드는 엄마의 모습. 꼬마 샐은 병 뚜껑에 끼울 바킹을 팔에도 끼고 숟가락에도 끼워 보며 장난치는 그림이 정답습니다.

『딸기 따는 샐』(Blueberries for Sal)표지와 본문

작가는 이 책에서 자기 딸과 아내의 모습을 샐과 샐의 엄마로 담아 내었다고 합니다. 부엌도 자기 집 부엌과 똑같고요. 단지 난로만 메인 주에 있는 어머니의 집에 있는 것을 본떠 그렸다네요. 요리와 난방을 같이 할 수 있는 이런 무쇠 난로를 박물관에서 본 적 있는데, 처음 나왔을 때는 부유층 전용이었겠구나 싶을 정도로 단단하고 기품 있게 생겼더군요.

블루베리를 야금야금 주워 먹고 잼을 만드는 엄마 옆에서 장난치던 어린 샐은 『기적의 시간』(Time of Wonder)에서는 조각배를 노저을 수 있을 정도로 제법 자란 모습을 보여 줍니다.

메인 주의 연안에서 약간 떨어진 섬에 집을 마련한 작가는 그 작은 섬에서 식구들과 보낸 여름을 시적인 글과 시원한 그림으로 나타냈는데, 그 책이 바로 『기적의 시간』이죠. 비구름이 점점 커지면서 페놉스코트 만의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섬들이 점점 그림자지는 첫 장면을 시작으로, 먼 바다 저쪽의 구름에서 비가 쏟아져 내리고, 비가 그치면서 아직은 흐릿한 모습으로 유령처럼 서 있는 바닷가 뒤쪽 나무들, 그 키 큰 나무들 옆에서 아주 작은 고사리들이 돌돌 말린 연초록 머리를 천천히 펴고 늘이는 소리를 듣고, 하늘에 돋아난 노란 별들과 물에 비친 별빛이 올려다 보는 가운데 작은 배를 노저어가는 자매. 허리케인이 휘몰아치는데 짠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부엌 수건으로 문틈을 틀어막는 아빠, 폭풍이 다 지나간 후 쓰러진 나무 위를 걷는 아이들, 그리고 여름이 고개를 숙이자 떠날 준비를 하면서 마지막 항해를 하는 그림을 보면서 작가가 자연의 일부로 살았던 그 섬의 여름에 읽는 이 역시 스며들어가게 됩니다.

『기적의 시간』(Time of Wonder)표지와 본문

이 섬세한 그림책의 마지막 장, 섬을 떠나면서 파도와 하늘에 마지막 눈길을 보내는 장면의 글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뒤에 둔 곳을 생각하면
약간 슬프고,
앞에 둔 곳을 생각하면
약간 기뻐요.”


소녀들의 앞에 놓인 것은 무엇일까요? 이 책을 펼치는 아이들과 어른들 앞에 놓인 것은 무엇일까요? 슬픔과 기쁨이 미묘하게 교차되며 삶은 이어지는 것. 물감을 섞을 때마다 조금씩 다른 색이 나오듯 미래를 향해 한 발자욱씩 떼며 우리는 바뀌지 않을 듯하면서도 조금씩 바뀌어 갑니다. 작가도 바뀌어 갑니다.

“최근에는 갈매기와 물고기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바다에서 삽니다. 오늘 아침에 면도를 하면서 내 구레나룻이 뭔가 조금 변한 것을 알아채고 자세히 들여다보았지요. 하지만 그게 비늘로 바뀌고 있는지 깃털로 변하고 있는지 말하기는 아직 이르군요.”

우리가, 우리 아이들이 무엇으로 변하고 어떻게 바뀌든 고사리들이 돌돌 말린 연초록 머리를 천천히 펴고 늘이는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참고 사이트
http://www.hbook.com/exhibit/mccloskeyradio.html http://www.friend.ly.net/scoop/biographies/mccloskeyrobert/index.html http://www.penguinputnam.com/Author/AuthorFrame?0000017159
서남희/ 개인 홈페이지 ‘The Cozy Corner http://cozycorner.new21. net)’에 영어 그림책 이야기를 엮어 올리고 있습니다. 미국 유치원 교육에서 활용하고 있는 ‘꼬마 책?Mini-Books)’을 아이와 함께 직접 만들어 볼 수 있게 구성한 『아이와 함께 만드는 꼬마 영어그림책』을 만들었고, 뉴베리 상을 받은 작품 『별을 헤아리며』를 번역했습니다. 그림책과 시, 바위산, 걷는 것과 잠자는 것을 아주 좋아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