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03월 통권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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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보는 다른 나라 그림책]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 변주가 존 버닝햄

서남희 | 2003년 03월

존 버닝햄
쪽지 시험에 깜박 잊고 이름을 안 쓴 친구가 반 아이들 앞에서 자기 이름을 열 번 말해야 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여고 1학년씩이나 되어 그런 벌을 받았으니 이 친구는 창피해서 한참을 머뭇거렸죠. 한참 후에 목을 가다듬고 하는 말, “제 이름은 이샛별입니다.” 모두들 당연히 똑같은 소리를 아홉 번 더 듣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다음에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제 이름은 이샛별이에요. 제 이름은요, 이샛별이라니까요. 제 이름이 뭐냐고요? 이샛별이랍니다.”

무지무지하게 제목이 긴 존 버닝햄의 책, 『John Patrick Norman Mc-Hennessy: The Boy Who Was Always Late』(지각대장 존─아이구 간편해라!)에서 꼬마 존은 언제나 학교에 지각해서 벌을 받지요. 불행히도 지각을 한 이유가 어른의 입장에서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것들─하수구에서 악어 한 마리가 나와 책가방을 물었기 때문에, 덤불에서 사자가 나와 바지를 물어뜯었기 때문에─이라서 선생님은 늘 화를 내며 벌을 줍니다.

번역본을 펼치면 표지 바로 뒤에 삐뚤빼뚤 쓴 “악어가 나온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또, 다시는 장갑을 잃어버리지 않겠습니다.”라는 반성문이 끝없이 이어지는데, 학교에 늦는 이유에 대해서는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하던 이 꼬마는, 주어진 벌에 관해서는 그저 똑같은 말만 반복해서 써 놓았군요.

『John Patrick Norman Mc-Hennessy: The Boy Who Was Always Late』(지각대장 존)
표지와 본문

이 책에 나오는 선생님이나 『The Shopping Basket』(장바구니)에 나오는 엄마는 슬프게도 아이들에게 우격다짐형인 어른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Courtney』(내 친구 커트니)에 나온 엄마 아빠도 아이들의 말을 들어 주는 귀가 없는 어른들이지요. 회색 토끼 인형 ‘알도’를 마음 친구로 삼아 외롭고 힘든 시간을 이겨 나가는 여자애를 그린 『Aldo』(알도)에서도 엄마 아빠는 서로 손가락질을 하며 싸워 댑니다. 슬픈 자화상이군요. 이래서 어른들도 그림책을 보면서 자신을 돌이켜봐야 하나 봅니다.

『The Shopping Basket』(장바구니),『Courtney』(내 친구 커트니), 『Aldo』(알도) 표지

그림책에는 대개 아이들에게 사랑이 넘치는 부드러운 엄마 아빠가 나오는데 존 버닝햄(1936∼ )은 왜 삐딱선을 탔을까요? 대안 학교인 서머힐의 교육을 받다 보니 은근히 정형화된 부모상을 거부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이미 열일곱 살(1953) 때 ‘정부’라는 권위와 싸우며 양심적 병역 거부를 했던 경험 때문에 그림책에서 ‘선생님’이라는 권위를 사나운 우격다짐형으로 그리게 되었는지 궁금하군요.

『Aldo』(알도) 본문에서

젊은이 존은 양심적 병역 거부를 하고 퀘이커 교도들의 병역 거부 모임인 ‘The Friends Ambulance Unit’에 들어가 1954년부터 2년 간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이스라엘 등지의 슬럼가에서 학교를 짓는 등의 일을 했습니다. (이것으로 면제가 되나 봐요? 중국에도 이 단체가 있던데…….) 그 뒤에 런던으로 돌아와 ‘Central School of Art’에서 디자인 분야 학위를 따고, 일러스트레이션 일을 했지요. 누구나 젊은 시절엔 여러 가지 일을 해 보기 마련. 런던 교통국 광고 포스터를 만들고, 잡지에 만화도 그리고, 크리스마스 카드 디자인도 했는데, 젊은 사람은 나중에 뭐가 될지 알 수 없으니까, 지금 박대하면 안 된다는 말이 딱 맞습니다. 이 젊은이가 나중에 수많은 어린이들과 어른들에게 사랑받는 그림책 작가가 될지 카드 인쇄소 아저씨가 우찌 알았겠심까?

1963년에 출판한 첫 번째 그림책 『Borka: The Adventures of a Goose With No Feathers』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는 젊은 그대, 존에게 깃털이 모인 날개를 달아 주지요. 첫 책으로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Kate Greenaway Medal)을 받았거든요. 깃털 없이 태어나서, 엄마가 짜 준 회색 털옷을 입고 있는 보르카가 식구들이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갈 때 홀로 남겨졌다가 친절한 개와 선장의 도움을 받아 런던의 큐 가든에 와서 살게 된 이야기를 그린 이 책과 『Cannonball Simp 』(대포알 심프), 『Seasons』(사계절) 등의 초기 작품은 그의 책 중에서는 색채가 강렬한 편.

『Borka: The Adventures of a Goose With No Feathers』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 『Cannonball Simp 』(대포알 심프), 『Seasons』(사계절)표지

하지만 그의 강렬한 색채는 『Mr. Gumpy's Outing』(검피 아저씨의 뱃놀이)에서 조심스럽게 변합니다. 색연필로 데생하듯 그린 그림들은 한여름에 입으면 시원할 세모시와 삼베의 중간 정도의 느낌. 거친 엄마 아빠와 사나운 선생님은 이제 보이지 않고 대신 순하고 수줍은 ‘검피’라는 아저씨가 물뿌리개를 들고 여름 아침녘에 정원에 나와 서 있지요. 보트로 뛰어드는 아이들의 맨발은 무척이나 활기차고 개가 나오는 장면의 왼쪽 페이지는 햇빛을 받은 나무가 너무나도 눈이 부셔 볼 수가 없습니다. 갈색 색연필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뛰어난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군요. 작가는 말합니다. “전 되도록 선을 조금만 써요. 그리고 새 책을 만들 때마다 생각하게 되죠. 내가 이걸 다시 할 수 있을까? 내가 이것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제 능력에 회의를 느끼고 좌절하게 되는 힘든 순간들이 있답니다. 하지만, 곧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Mr. Gumpy's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 표지와 본문

수줍은 ‘검피 아저씨’는 1971년 두 번째로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을 작가에게 가져다 주고, 한동안 작가는 단순하고 섬세한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을 그리지요. 『Mr. Gumpy's Motor Car』(검피 아저씨의 드라이브)나 『Grandpa』(우리 할아버지)의 그림들은 참으로 정겹고, 조용합니다. 눈을 감고 옛날을 회상하며 아주 천천히 줄넘기를 하면서 “내가 어렸을 때는……. 굴렁쇠를 굴리며 놀았단다.”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자전거 위에 올라앉아 호기심에 눈을 반짝거리며 “할아버지도 아기였던 때가 있어요?”라고 묻는 손녀딸의 모습은 천진하면서도 애처롭습니다. 언젠가 자기도 그 말을 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짐작도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할아버지의 빈 의자.

『Grandpa』(우리 할아버지) 표지와 본문


이제 그 할아버지는 멀고 먼 산꼭대기 오두막집에 사는 아이에게 선물을 갖다 주러 먼길을 떠나는 산타 할아버지로 바뀝니다. 『Harvey Slumfenburger's Christmas Present』(크리스마스 선물)에서 산타 할아버지는 순록이 끄는 마차를 타고 세상의 아이들에게 선물을 갖다주고 오지요. 그런데 순록이 아파서 침대에 뉘여 재우고 나니, 글쎄 ‘하비 슬럼펜버거’라는 아이에게 줘야 할 선물이 아직 남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할아버지는 추운 겨울밤에 아주아주 멀고 먼 롤리 폴리 산으로 떠나지요. 자동차 정비소의 지프차 아저씨의 도움을 받고 지프를 타고 가는 장면은 눈보라치는 광막한 길을 너무나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콜라주와 스크래치 기법을 사용한, 등반가의 도움을 받아 줄을 타고 절벽을 오르는 장면 또한 아주 재미있지요.

『Harvey Slumfenburger's Christmas Present』(크리스마스 선물) 표지와 본문

‘환경 보호’라는 큰 주제를 아이의 기차 놀이와 연관시켜 다룬 책, 『Oi! Get Off Our Train』 (미국판: Hey! Get Off Our Train, 한국판: 야, 우리 기차에서 내려!)은 아마존의 열대 우림을 지키려 애썼던 ‘체코 멘데스’라는 사람에게 헌정된 책입니다. Lynne Cherry라는 작가가 『The Great Kapok Tree: A Tale of the Amazon Rain Forest』에서 환경 보호에 관해 직접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반면, 존 아저씨는 이 책에서 기차 놀이를 떠난 아이가 코끼리나 물개, 호랑이 등 멸종 위기의 동물들과 만나서 논다는(물론 그 동물들에게는 “사람들이 나를 잡아다가 털옷을 만들려고 해” 등등 나름대로 기차를 태워 달라는 절박한 이유가 있지요.) 이야기 구조와 아주 단순한 선의 그림을 보여 주고 있지요. 어떤 사실적 이유와 설득보다도 이런 간단한 이야기가 어린 아이들에게는 훨씬 더 호소력 있어 보입니다.

『Oi! Get Off Our Train』(미국판: Hey! Get Off Our Train, 한국판: 야, 우리 기차에서 내려!) 표지와 본문

엄마 아빠와 함께 등산을 갔다가, 그만 절벽에서 떨어진 아이 이야기를 담은 『Cloudland』 (구름 나라)는 그림책으로서는 특이하게 사진을 배경으로 쓴 작품입니다. 구름 낀 하늘은 전부 사진을 썼고, 산이나 바다 등은 작가가 직접 그렸지요.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다른 종이에 따로 그려 오려 붙여서 입체감이 뚜렷합니다. 절벽에서 떨어진 앨버트를 구름 나라 아이들이 구해 줘서 이들은 함께 놀게 되었지요. 아이들은 구름 침대에서 자기도 하고, 높은 구름 위에서 뛰어내리며 놀기도 합니다. 천둥 번개가 칠 때는 북과 탬버린으로 신나게 놀아 보지요. 앨버트는 비가 오면 수영을 하고 무지개를 보면서 그림도 그리지만, 어느 날 문득 도시의 불빛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죠. 그래서 구름 나라 여왕님은 이별 파티를 열어 주고 주문을 외워 앨버트를 되돌아가게 해 주지요. 침대에서 깨어난 앨버트에게 엄마와 아빠가 기쁨의 뽀뽀를 쏟아붓는데, 머리맡에 있는 그림은 아침 해가 솟아오르는 장면. 저 세상 직전까지 갔다 돌아온 아이가 이제부터 새 날을 시작한다는 상징을 담고 있는 그림 아니겠어요? 아이들의 입장에서 의사 경험(Near-death experience)을 다룬, 독특한 시선이 아주 마음에 드는 책입니다. 염라대왕 앞에서 벌벌 떨고 있다가 돌아오는 대신, 구름 나라 친구들과 폭신한 구름 위에서 뛰어 놀다 왔으니, 아이도 ‘죽으면, 끝’이 아니라 ‘저 세상은 즐겁고 재미난 또 하나의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Cloudland』 (구름 나라) 표지와 본문

이렇게 여러 주제를 다루면서 다양한 재료로 그 주제를 드러내는 그림을 그리는 건 정말 어렵고도 신나는 일이겠죠. 그런데 악기 연습을 몇 번 안 하면 손이 굳듯이 그림도 그런가 봐요. 존 버닝햄 아저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림은 피아노 연주하는 것과 같아요. 그건 벽돌 쌓기처럼 기계적인 일이 아니지요. 유연하게 잘 그리려면 줄곧 연습해야 돼요. 그림 시작한 지 40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쉽지가 않군요.”

종이, 판지, 나무, 목탄, 펜, 먹, 색연필 할 것 없이 여러 재료를 끊임없이 시도해 보며 다양한 텍스처 효과를 내 보는 존 아저씨는 진한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시작하고, 점심 때는 같은 그림책 작가인 아내 헬렌 옥슨버리와 함께 그림책 작업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저녁 때는 향기로운 붉은 포도주 한 잔을 마신답니다.

그러나 그림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재미없죠. 존 아저씨의 일탈은 뭔지 아세요? 특이한 가구나 낡은 커튼을 모으러 영국 일대와 프랑스를 돌아다니는 거래요. 그거 다 모아서 뭐하냐고요? 다른 사람한테도 판대요. 낡은 커튼을 휘감고 있는 존 아저씨. 그 위에 물감을 묻혀서 종이 위를 뒹굴면 아주 재미있는 효과가 나겠죠?!

참고자료
http://www.yourlibrary.ws/childrens_webpage/e-author.htm
http://www.bl.uk/whatson/exhibitions/magicpencil/burningham.html
http://www.amazon.com
서남희/개인 홈페이지 ‘The Cozy Corner(www.cozycorner.new21.net)’에 영어 그림책 이야기를 엮어 올리고 있습니다. 서강 대학교와 서강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UCLA Extension에서 TESOL(영어 교수법)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미국 미시간 주에서 10년 간 살면서 Haslett Adult Education의 영어 클래스에서 보조 교사, 이스트 랜싱에 있는 ‘한마음 한글 학교’의 외국인반 교사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미국 유치원 교육에서 활용하고 있는 ‘꼬마책(Mini-Books)’을 아이와 함께 직접 만들어 볼 수 있게 구성한 『아이와 함께 만드는 꼬마 영어그림책』을 만들었답니다. 그림책, 소설책, 시를 좋아하고, 북한산, 도봉산, 지리산, 속리산, 소백산 등 바위산을 좋아하며, 무엇보다 잠 자는 것을 제일 좋아한답니다. 스스로 뾰족뾰족하다고 말하면서 사랑하는 남편과 딸과 더불어 누구보다 둥글고 넓게 살고 있습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