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03월 통권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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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과 나누어요]
아이들과 하나가 되는 즐거움

노미화 | 2003년 03월

『너하고 안 놀아』본문
노마는 구슬 하나를 내밀고 입을 열었습니다.
"너 이것하구 바꿀까?"
"뭣하구 말야."
"포도하구 말야."
"이런 먹콩 같으니."
"그럼 구슬 두 개 허구."
"난 일없어."
"그럼 구슬 세 개 허구."
"그래두 일없어."
"그까짓 먹는 게 존가. 가지구 노는 게 좋지."
"그래두 난 일없어."
( 「포도와 구슬」중에서 )

현덕 선생은 짧은 이야기 속에 아이들의 심리 변화를 아주 선명하게 잘 드러낸다. 두 아이가 주고받는 몇마디 말로 점점 간절해지는 노마의 마음과 냉정한 기동이의 모습을 눈에 보는듯 선하게 그렸다. 이게 현덕 동화의 매력이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까닭이다. 더구나 저학년 아이들이 따라 읽기 좋고 받아쓰기 하기도 좋다.

「포도와 구슬」을 들려준 뒤 우리 반 최고의 욕은 ‘이런 먹콩 같으니’가 되었고 ‘일없어’가 유행어처럼 되었다. 말 한 마디가 아이들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니까 저절로 아이들 말이 되어 버리는가 보다.

『너하고 안 놀아』
표지
나는 강화에서 일 학년 아이들을 가르치는 중에 현덕의 동화를 알게 되었다. 어둡고 힘들었던 일제 시대에 쓴 동화들이니, 이 세상에 이렇게 책으로 나온 것도 어찌 보면 기적 같은 일이다. 나는 그때 문득 현덕 아저씨가 우리 반 칠판에 크게 쓰여진 「포도와 구슬」밑에 ‘지은이 현덕’을 보았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우리 반 아이들 마음 속에 자기 동화가 살아 숨쉬고 있는 걸 알았다면 얼마나 흐믓했을까 생각했다.

그가 인천 사람이라서 더 그랬나 보다. 현덕 동화를 읽으면서 즐거워하는 우리 반 아이들을 보며, 평생을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쓸쓸하게 살다 간 그 넋에 술 한 잔이라도 따라 주고 싶은 심정이 간절해진다. 그리고 내가 열심히 선생 노릇 잘 해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선생도 아닌 사람이 나보다 더 아이들을 사랑하고 더 깊이 이해하고 실천했으니까.

훌륭한 문학 작품 하나는 그 어떤 것보다 훌륭한 교육자료가 된다. 아이들과 교사의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 주고 이어 주어서 하나가 되게 한다. 『너하고 안 놀아』에는 현덕의 보석 같은 짧은 동화들이 여러 편 들어 있다. 이야기가 짧고 주인공이 어린 아이인 동화들이 귀하니, 이 책은 꼭 한 권씩 간직하고 있으면 좋겠다고 자신있게 권한다.

여러 편의 동화 중에 나오는 인물들은 노마, 기동이, 똘똘이, 영이가 전부다. 주인공 노마는 아버지가 멀리 가시고 삯바느질하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기동이는 부잣집 귀염둥이 아들이고 똘똘이는 좀 어린 사내아이, 영이는 역시 노마와 비슷한 처지의 여자아이다. 이 애들이 날이면 날마다 동네 길에서 만나 놀다가 싸우기도 하면서 주고받는 말, 다툼, 신나는 놀이 장면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늘 다투지만 결국 함께 놀지 않으면 심심해서 견딜 수가 없는 영락없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의 순진하고 거짓없는 모습이 읽는 이도 똑같이 그 또래 아이가 되어 아이들 마음을 따라가게 만든다.

『너하고 안 놀아』본문
으스대는 기동이의 물딱총을 보고나서 너무나 갖고싶어 울음을 그치고 곰곰 생각하는 노마의 모습이라든가, 한줌의 흙으로 싸전 가게를 벌이고 장사치가 되어서 재미나게 노는 모습, 살금살금 모두 고양이가 되어서 부엌 찬장에 있는 북어를 찾아내 먹고야마는 아이들, 때로는 한 줄로 가만히 앉아 귀뚜라미 소리를 듣는 모습…….

골목 아이들의 평범한 일상이어서 더욱 친근하고 가깝게 느껴지는 게 현덕의 『너하고 안 놀아』가 갖고 있는 힘이다. 문장 하나하나 어디 버릴 데가 없어서 문장 공부하기도 좋은 책이다.
노미화/서울에서 나 서울 교육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십 년 동안 초등 학교 선생님으로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강화로 학교를 옮긴 후 셋째를 출산하여 육아 휴직중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강화의 조용한 동네에서 쉬고 있답니다. 늘 아이들로 바글바글한 교실에서 지내다가 조용한 동네의 작은 학교에서 몇 명의 아이들을 만나면서 행복해 하는 아줌마 선생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