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03월 통권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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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작가 이형진의 그림책 살피기 ]
달콤하고 그윽하게

이형진 | 2003년 03월

연기를 잘하는 배우보다 더 소중한 건 극 전체를 살려 주는 배우가 아닐까 생각한다. 뛰어난 재능으로 맡은 배역을 빈틈없이 소화해 내는 배우도 보기 좋지만, 가끔 배우가 아닌 실제 인물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배우가 있다. 극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 배역을 하는 배우가 보이지 않고 극중 인물이 보이는 것이다. 그 순간을 같이하는 관객도 극 속에 완전히 몰입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림책에서 그림의 역할은 극중 배우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꽤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텍스트의 구조를 기본으로 힘껏 열연을 해 독자와 만나는 것. 그리고 극 전체를 위해서는 세부적인 연기와 더불어 극 전체, 텍스트의 깊이를 온전하게 전달하기. 그림으로 연기하지만 그 기교보다 텍스트가 손상되지 않고 더욱 풍부하게 우러나도록 알맞게 받치는 일도 참 소중하다 할 것이다.

『시인과 여우』의 그림은 뛰어난 기교가 한눈에 느껴지지 않는다. 보자마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빈틈없는 그림이 아니다. 시인 바쇼나 여우의 모습은 거침없이 쓱쓱 그렸다기보다 수줍은 듯 조심스럽게 그려져 있다. 그러니까 형태의 골격에 어려워하면서 겨우 그림을 그려 나간 것이다. 자세히 보면 조금씩 어색하기는 나무, 바위, 풍경이 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시인과 여우』의 그림은 텍스트를 깊숙하게 만나게 한다. 자꾸만 나를 그 깊은 세계로 젖어들게 한다.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그림의 어색한 느낌은 사라지고 몽롱한 시인의 마음 속으로 빠져들어 그와 함께 걷게 되는 것이다.

그건 바로 조화로움이 아닐까. 텍스트를 제대로 헤집고 들어가 독자를 향해 하나의 유기물처럼 보인다는 것. 텍스트를 올바로 좇기 위해 백 번, 천 번 그림의 방향을 고치고 또 고치기. 그래서 독자들에게 따로 빛나는 그림이 아닌 텍스트와 더불어 드러나는 그림을 보여 주는 일은 무척 귀하다.

글 작가 ‘팀 마이어스’가 시인 바쇼를 소개하면 그림 작가 ‘한성옥’은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가 넓은 산 속을 그려 낸다. 재주를 뽐내려고 텍스트보다 한 발 앞서는 잔재주를 부리지 않는다. 작품 속으로 더 들어가도 그림은 텍스트와 함께 걷거나, 슬쩍 뒤로 빠지고 있다. 절대 나서서 큰 몸짓으로 시선을 끌려하지 않는다. 시인 바쇼를 억지로 내세우지도 않고 텍스트가 원하는 몽환적인 세계를 겸손하게 그려 나간다. 책을 읽는 동안 글과 그림의 달콤한 조화로움에 그윽하게 빠질 수 있었다.
이형진│좋은 어린이 책을 만드는 꿈을 이루려고 열심히 작업하고 있습니다. 『고양이』『쉬잉쉬잉, 빙글빙글』『하늘이 이야기』『아주 바쁜 입』을 비롯한 많은 어린이 책에 그림을 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