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 웹진 제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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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어린이 책 이야기

[작가를 찾아서]
새로운 즐거움을 주는 책을 만들고 싶은 작가 차정인

공혜조 | 2002년 11월

차정인 선생님
일산 신도시, 이름에서 신도시를 빼도 좋을 만치 아파트 뜰에는 나무가 무성합니다. 잎사귀들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는 아파트 이층이 선생님이 살고 계신 곳이고, 그 생활 공간 가운데 한 방이 선생님의 작업실입니다.

선생님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어린이에게 주는 좋은 그림책을 그렸습니다. 1991년에 나온 『먹물통에 빠진 쐐기 벌레』 『나비의 숨바꼭질』 1994년에 나온 『이것 좀 먹어봐』 『너는 누구니』『아하 보리였구나』를 비롯하여 2001년에 나온 『우리 아빠가 최고야!』『나 너 좋아해』와 2002년 3월에 나온 『너무 늦었어요』에 이르기까지 선생님이 그림을 그린 책을 헤아리려면 열 손가락을 몇 번이나 꼽아가며, 한참 동안 세어 보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수채화 작업도 많이 했지만, 최근에는 콜라쥬 작업도 많이 하십니다. 왜 콜라쥬 작업을 많이 하실까요?

“콜라쥬 작업을 하면 어린이들이 책을 보면서 친근감을 느끼고 자신감을 느끼게 되지요. 또한 여러 자극을 주어 상상력도 많이 발달하게 되고요. 이미 다른 데 쓰였던 재료가 그 자리에 붙어 있으면 그것이 자극제가 되어 아이들로 하여금 다른 상상을 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저는 그림책 작업을 하면서 어떤 재료든 집어넣어 봅니다. 꼭 작업을 할 때가 아니라도 시간 날 때마다 그런 재료들을 가지고 놀다 보면 그림책 작업을 하면서 적절한 자리에 그 재료를 쓰게 됩니다.”

『나 너 좋아해』『너무 늦었어요』『우리 아빠가 최고야!』같은 책에는 천 조각, 이미 인쇄된 종이에 색을 칠한 것, 망사 따위 재료들이 군데군데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방에는 이런 재료들이 많이 있습니다.

콜라쥬에 쓰일 여러 재료들

“어렸을 때 창호지에 그림을 그린 적이 있어요. 머플러를 날리며 스케이트 타는 아이들을 그렸는데, 그 그림을 보신 어머니께서 종이를 많이 가져다 주셨어요. 앞면에는 광고가 인쇄되어 있고 뒷면은 비어 있는 갱지나 잘못 인쇄되어 못 쓰게 된 종이를 모아서 제게 가져다주셨어요. 저는 연년생 다섯 가운데 둘째였는데, 어머니께서 가져다주신 종이를 들고 골방에 들어가 그림 그리는 데만 빠져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손으로 무엇을 만들어내는 제 모습을 눈여겨보셨는지, 어머니께서는 조각 천도 많이 모아 주셨지요.”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조각 천으로 무엇인가를 만들던 아이가 자라 이제는 조각 천을 붙여 그림 작업을 하는 그림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조각 천을 모아 주시던 어머니께서 얼마 전 세상을 떠나시고 난 뒤 선생님은 어머니의 한복 천으로 수첩을 만들어 동생들과 나누어 가졌습니다. 종이를 잘라 가운데를 실로 꿰매어 속지를 만들고, 두꺼운 종이로 표지와 책 등의 바탕을 마련하여 어머니께서 입으시던 한복 천을 붙였습니다. 그렇게 만든 수첩에 떠오르는 생각을 적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합니다. 이런 그림들이 모여 그림책 그림을 그릴 때 좋은 바탕이 되나 봅니다.

어머니 한복 천으로 표지를 만든 수첩과 수첩에 그린 그림

선생님은 형태가 보통의 책과 다른 책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다른 나라에 다니면서 아주 재미있게 본 책을 꺼내 보이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꼭 샌드위치 같이 생긴 『SAM’S SANDWICH』라는 책입니다. 동생에게 먹일 샌드위치를 만들면서 동생을 놀래킬 것들을 숨겨 놓는 오빠의 짓궂은 장난이 이어지는 책입니다. 빵처럼 두툼한 표지를 넘기면 본문의 모서리 부분이 접혀 있는데, 그 접힌 곳을 펼치면 채소 잎이 펼쳐지고, 그 속에는 오빠가 숨긴 벌레가 있지요. 다음 장을 넘기면 토마토 속에 숨긴 민달팽이, 그 다음 장을 넘기면 치즈 속에 숨겨 둔 개미, 또 다음 장에는 콩 속에 숨겨 둔 개미, 또 그 다음 장에는 달걀 속에 숨긴 달팽이……. 이런 식으로 벌레들을 숨기면서 그 벌레들이 어디에 사는지 맞은 편에 그림으로 그려 둔, 악동 오빠의 샌드위치 만들기 책입니다. 본문을 다 펼치고 표지를 덮으면 먹음직한 샌드위치 모양이 되지요.

『SAM’S SANDWICH』 위 맨 왼쪽부터 차레대로 펼치면 아래 맨 오른쪽처럼 먹음직한 샌드위치가 된다.

선생님이 보여 주시는 또 다른 책은 『THE JOLLY POCKET POSTMAN』이라는 책입니다. 한 장이 넘어갈 때마다 편지 봉투가 있고, 그 편지 봉투를 열면 재미있는 편지가 나옵니다. 기대에 부푼 얼굴로 봉투를 여는 어린이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귀엽습니다.


『THE JOLLY POCKET POSTMAN』 표지와 본문들,
본문 왼쪽 면에 봉투가 있고, 봉투 속에 담긴 것을 빼 보도록 구성되어 있다.


펼치면 점점 본문 종이가 커지면서 동물의 크기를 비교할 수 있게 만든 책도 선생님의 마음에 담긴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책과 비슷하게 구성된 책이 『우리 아빠가 최고야!』입니다.


본문 그림을 펼칠 때마다 크기가 커지고, 점점 큰 동물이 등장하는 그림책

“저는 제가 가진 직업이 ‘머리와 몸을 공평하게 쓰는 작업’이어서 참 좋아요. 이런 길을 걷게 되었으니 참 행복하죠. 제 아이들도 머리와 몸을 공평하게 쓰는 직업을 가지게 된다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물론 늘 일이 많아 아이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일 때문에 웃지 못할 일을 겪기도 했어요. 엄마가 작업하는 책상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아이가 사람의 얼굴을 거꾸로 그리는 것을 보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요. 엄마 맞은 편에서 보이는 대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맨 먼저 눈을 그리는데, 눈을 맨 아래에다 그리는 거예요. 그런 다음에 코를 그리더니 입을 맨 위에 그리더군요. 그러고서는 종이를 180도로 돌려서 제대로 보이는 얼굴 아래에다 몸통을 그리는 거예요. 아이는 엄마가 끊임없이 그리는 사람의 얼굴을 제가 본 모양대로 그렸던 거예요.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엄마가 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게 신기했어요.”

그림으로 그린 선생님의 하루
요즈음 선생님은 주로 밤에 작업을 하십니다. 낮에는 이것저것 볼일을 보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조용한 밤에 작업실에 앉게 되지요. 중학교 때는 미술반과 합창반에 들었고, 고등 학교 때는 어원 찾기를 좋아했다는 선생님은 국어를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번째 개인전 때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오셨는데, 어떻게 미대를 갔냐며 의아해 하시더군요. 사실 국문과를 갈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진명 여고를 다닐 때 미술 선생님이 조각하는 김광우 선생님이었는데, 이 선생님을 만난 게 인연이 되어 미대에 진학하게 되었지요. 김광우 선생님이 나무를 깎을 때 잡아드린 적이 있는데, 그 때 선생님께서 ‘정인아, 미대 가라, 미대 가라.’ 하셨어요. 그러면서 만약 가면 무슨 과에 갈 거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씀 드렸지요.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넌 힘도 있으니 조각해라. 조각해’ 하시더군요. 그래도 저는 제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디자인과에 가게 되었고,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게 된 거예요. 사실 아버지가 오랫동안 공직에 계셨기 때문에 미대에 갈 형편이 아니었어요. 다만 건축가인 외삼촌이 그때까지 결혼을 않고 계셔서 저를 많이 도와 주셨지요.”

선생님은 어린이 책의 그림을 그리는 그림 작가일 뿐 아니라 아티스트 북을 만드는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2001년에는 ‘틈새...조심!’이라는 이름으로 아티스트 북 개인 전시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책의 낱장이 두 개의 실로 연결된 책, 집에서 아이를 기르고 살림하는 여성을 주제로 삼아 병풍처럼 펼쳐 보게 만든 책, 상자를 열어 한 겹 한 겹 열어 보며 책 속에 담긴 뜻을 생각해 보게 하는 책, 아파트의 여러 층을 아코디언처럼 펼쳐 보게 하는 책, 엇갈리고 엇갈리며 여러 생각을 나타내는 책, 수많은 자리가 아래위로 한 줄에 꿰어 그네처럼 만든 책, 두루말이 책, 접었다 열었다 하며 뜻을 생각해 보게 하는 책……. 책에 대해, 살아가는 일에 대해 여러 방향에서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틈새...조심!’ 전시회의 팜플랫에 실린 아트북 사진들

“외침을 받아 오랫동안 문화의 흐름이 끊겼던 우리는 옛것과 새로운 것이 따로 몰려가는 경향이 있어요. 문화의 층위가 다양하지 않은 거죠. 서양에는 무엇이든 시작하면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북아트는 시작된 지 100년 정도 되었는데, 프랑스에서는 ‘미술가의 책(livre d'artiste)’이라고도 합니다. 1890년대에 실크스크린이나 석판화에 시를 써서 만든 책으로 시작했어요. 유럽의 프랑스나 독일 영국들에서는 메이저 북인 출판과는 다르게 다양한 예술적 표현 현상으로 많은 아트북들이 만들어졌지요. 중요한 건 소수의 사람들이 이런 전통을 잇고 있다는 사실이죠. 북 아트는 컨텐츠와 구성 두 가지 다 작품이 만나기에 가장 좋은 매체인 것 같아요. 현대에 들어오면서 북아트는 그 개념이 확장되어 단순히 ‘미술가의 책’이 아니라 책의 형식을 취한 시각 미술 작품을 총칭하는 말이 되었어요.

아트북 『긍정적 정신분열증』

우리 나라에도 북 아트를 미술 대학에서 교육이나 전공으로 끌어들여 수업을 해요. 학생들이 가진 개념을 표현할 수 있는 조형적인 요소를 총체적으로 실험하는 가장 좋은 매체이기 때문이지요. 학부 학생들이 많이 만들어요. 1994년 프랑크푸르트 도서 전시회에 가서 북아트를 처음 만났는데, 마음에 깊이 남았어요. 그 이삼 년 뒤에 평소 하던 대로 일러스트 작업을 하는데, 내가 더 이상 더 내려갈 수 없는 바닥까지 내려와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고민을 하는데, 그래서 결단을 내렸지요. 나를 위해 투자하자, 여태까지는 내 가족, 가정 경제만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일했다, 난생 처음 나를 위해 투자하는 거다. 해야 한다. 는 생각이 들더군요. 영국으로 달려갔어요. 그런데 영국에 가니 뜻밖에도 1996년에 석사 과정을 개설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선생님이 직접 만들어 쓰는 공책들

그렇게 뜨거운 가슴으로 영국으로 달려간 선생님은 두 해를 영국에서 지내며 북아트를 공부하게 됩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여러 자연 풍광을 만나게 되는데요, 그런 풍경들을 보면서 우리 풍경을 제대로 그려 내는 작업이 참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언덕이 겹치듯 이어져 있고 그 꼭대기에 집이 있는 다른 나라 그림책을 보면서, 대체 어떻게 이런 풍경을 그렸을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게트윅 공항에서 옥스퍼드 가는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바로 그 풍경, 동글동글한 풀 언덕이 첩첩이 이어진 풍경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림 속에서만 보던 풍경을 실제로 보게 된 것이죠.

공책에 메모한 생각과 자료, 그림들, 가운데는 둘째 딸 다연이 초등 학교 1학년 때 한 낙서

그 풍경을 보고 이태 뒤인가 국전에 대상을 받은 산골 마을 풍경화를 보았어요. 산골 마을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그림이었는데, 하늘이 안 보였죠. 내가 그 안에 있을 때는 못 보고 못 찾아냈던 풍경을 남의 나라에 가서야 찾아 내고,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지요. 그런 경험을 통해 리얼리즘 정신으로 그린 그림, 리얼리즘 정신으로 쓴 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큰 딸 승연이 초등 학교 4학년 때
선생님 공책에 그린 가족
한국에 돌아와서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했는데, 그러다 이번 학기부터 학교 나가는 것을 그만두었어요. 열심히 하느라고 하긴 하지만 작업을 하다 보면 내 마음에 꼭 차지 않는데 그냥 갈 때가 있거든요, 학교 수업 준비도 그렇고요. 그런데, 내 마음에 차지 않는데 보는 사람이나 수강생이 좋아해 주면, 내가 사기쳤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학교 강의를 그만두고 작업에 집중하자고 마음을 먹게 되었어요.

앤서니 브라운의 책을 보면 가슴이 먹먹하고, 버닝햄의 책을 보면 작가는 저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작업을 하면서 늘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느껴요. 이렇게 많이 생각을 했으면 뭔가 나와야 하는데, 아직도 뭔가 내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이 안 나왔어요. 매일매일 일을 하다 보면 뭔가 되겠지요.”

책의 여러 가지 형태를 연구하고 고민하는 선생님의 마음에 꼭 드는 책, 앞으로 우리 어린이들이 화들짝 반하며 좋아할 그림책이 곧 나올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을 마음에 담고 선생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부드러운 빛으로 세상을 감싸며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살이 따뜻합니다.

『아하 보리였구나』『나 너 좋아해』『너는 누구니』『이것 좀 먹어봐』『우리 아빠가 최고야!』표지
공혜조/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여러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 어린이에게 좋은 읽을거리를 권해 주고 싶어서 좋은 어린이 책 이야기를 나누는 『열린어린이』 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좋은 어린이 책이 엄청나게 많아져서 어린이들이 행복에 겨워 웃음 터뜨릴 날을 기다리는 엄마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