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 웹진 제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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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과 나누어요]
아이들 마음을 여는 그림책

강승숙 | 2002년 10월

일 년이란 시간이 결코 짧지 않은 데도 말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헤어지는 아이들이 많다. 어떻게 해서라도 짬을 내려 들지만, 하루에 한 명씩이라도 붙잡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보려 들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번호대로 한 명씩 쉬는 시간에 나오라고 해서 뭐 좀 묻고 하려면 아이들 사이에서 “짝이 막 때려요!” “화장실 갔다 와도 돼요?” 같은 물음이 끝없이 터져 나온다.

점심 나들이라고 해서 하루에 한 명씩 정해 놓고 점심 먹고 교실에 들어오기 전 학교 둘레를 돌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시간이 짧다. 친구들 사이는 괜찮아? 어머니가 뭐하신다고 했더라 같은 이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그저 묻고 아이는 답하는 데서 그칠 때가 많다.

『천둥케이크』 『알도』표지
그래도 드물게 아이들이 마음을 열고 묻지도 않는 말들을 쏟아 낼 때가 있다. 아이와 둘이 붙어 앉아 그림책을 볼 때다. 이럴 때는 공부가 다 끝나고 조용한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일부러 부탁을 해서 남게 된 아이들이나 우연히 교실에 남아서 놀고 있는 아이하고 책을 읽게 된다.

지난 해에 가르쳤던 미영이는 그림책을 좋아해서 일주일에 한두 차례는 꼭 남아서 그림책을 보았다. 그림책을 읽으면서 미영이는 자기 이야기를 많이 했다. 『천둥케이크』를 볼 때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과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해 말했다. 『알도』를 읽을 때에는 자기가 친구가 없어서 얼마나 쓸쓸한지, 누구하고 친구가 되고 싶은지 줄줄줄 풀어놓았다. 물론 미영이는 평소에도 곧잘 내게 와서는 속상한 일에 대해 잘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림책이 아니었다면 그 아이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듣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중 『검피아저씨의 뱃놀이』를 읽을 때가 가장 마음에 남는다. 미영이는 『검피아저씨의 뱃놀이』를 보다가 배를 타려고 뛰어오르고 있는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가 나오는 장면에서 한참 멈추어 있었다. 그 얼굴이 예사롭지 않아 내가 한 마디 던졌다.
“너 누구 좋아하는구나."
”네”
미영이는 부끄러운 듯 조그맣게 말했고 조금 우물쭈물 하더니 신나게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냥 좋아하는 남자 친구가 있냐고 물었다면 장난끼 어린 말밖에 되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그림책을 보는 중에 이야기가 나오다 보니 듣는 나나 들려주는 아이나 모두 편하고 자연스럽다.

『검피아저씨의 뱃놀이』표지와 본문

올해 만난 세일이하고도 몇 차례 그림책을 읽었다. 세일이는 두어 달 동안 날마다 연습했던 리코더를 한 음도 바르게 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내가 연습 좀 해보라고 하면 “나는 못해요.” 그런다. 아예 연습도 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세일이한테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할까 생각하다가 고른 그림책이 에즈라 캑 키츠의 『휘파람을 불어요』다. 나는 이 그림책을 보면서 세일이도 피터처럼 뭔가를 해보겠다는 마음을 갖기 바랐고 그 바람은 이루어졌다.

『휘파람을 불어요』표지와 본문
처음에 세일이는 시큰둥했다. 피터가 어떠냐고 물어도 별 관심 없는 듯 모르겠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피터가 휘파람 부는 연습을 할 때마다 저도 따라서 ‘흡흡’하고 소리를 냈다. 책을 다 보고 나더니 피터가 휘파람을 부는 순간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나는 이 틈을 타서 얼른 세일이한테 너도 피터처럼 리코더 연습을 해보라고 했다. 세일이는 그저 웃기만 했다. 처음하고는 사뭇 다른 태도다. 다음날, 세일이는 아침부터 리코더를 불고 있었는데 집에서 연습했는지 소리가 한결 나아졌다.

세일이가 생전 꺼내지 않던 아버지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낸 것도 그림책 『고릴라』를 보면서다. 세일이는 고릴라를 보면서 자그마한 소리로 “고릴라가 아버지 같다!”하고 말했다. 그랬을 것이다. 그 듬직한 고릴라를 보면서 어떻게 아버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릴라』표지
“세일이, 아빠 생각나니?”
“네.”
“아빠 언제 봤지?”
“유치원 때요.”
“좀 오래 됐구나. 보고싶겠네?”
“네.”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세일이 얼굴은 그다지 어두워 보이지 않았다. 그림책 속에서 고릴라를 아버지로 상상하고 하늘도 날고 영화도 보고 동물원에도 갔다왔기 때문일까?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표지
어린아이일수록 하고 싶은 말을 마음속 깊이 담아두고 있으면 마음의 병이 된다고 한다. 마음에 담아둔 것은 말이나 글로 그때그때 풀어야 하는데 풀지 못하고 사는 아이들이 많다. 이런 속사정은 글을 써서 드러낼 수도 있지만 이렇게 그림책 한 권을 보면서도 끄집어 낼 수도 있다. 아이들한테 그림책을 자주 보여 주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아이 마음을 짐작하게 될 때가 있다.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를 제일 좋아하는 책이라고 골라 온 아이한테 “너는 먹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지?” 하고 물은 일이 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지면서 “그거 어떻게 알았어요?” 한다.

그림책을 보면서 나는 아이들한테 이렇게 말을 건넨다. 아이들이 왜 그림책을 읽다가 내게 스스럼없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주는 걸까? 그것은 어른과 함께 그림책을 보는 그 자리가 아이들의 마음을 풀어 주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 때만큼은 무서운 선생도 아이들한테 한없이 포근하게 느껴질 것이다.
강승숙 / 아이들을 가르친 지 15년이 넘었고 지금은 인천 남부 초등 학교 3학년 아이들하고 지내십니다. 글쓰기와 예술로 하는 교육에 관심이 많아서 아이들과 연극놀이, 리코더 연주, 우리 춤 추기, 자세히 보고 그리기를 많이 하신다네요. 교단에 설 때부터 동화 읽어 주는 일은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동화책 보기를 좋아해서 자연히 아이들한테 읽어 주게 되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그림책을 많이 보여 준다고 합니다. ‘겨레 아동 문학 연구회’와 ‘한국 글쓰기 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