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 웹진 제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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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책 이야기]
책과 함께 크는 아이들

이정은 | 2002년 10월

이야기 하나

엄마라면 누구나 자신의 아이들을 보면서 ‘그래, 나도 그 때 그랬어.’라며 희미하게 기억되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곤 할 것이다. 나도 우리 집 큰 아이를 보면서 어릴 때 내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어째 너는 누굴 닮아서 그러냐.’고 핀잔을 주다가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바로 나의 모습인 경우가 많다.

어제도 그랬다. 일을 마치고 저녁 늦게 들어가 보니 아이들 방바닥에는 책꽂이에서 한번 나오면 내 손을 거치지 않고서는 다신 꽂히지 않는 책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희들끼리 저녁 챙겨 먹고, 잘 놀고 있었던 것만도 대견하다 싶었는데, 이제 아이들이 좀 크니까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엄마 없이는 하지 않는 것에 화가 나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뭐 했어?”
“…….”
“숙제 했어?”
“…….”
“그럼, 뭐 했는데?”
“책 봤어……. 엄마, 이상해. 책을 한번 보기 시작하면, 또 다른 책에 저절로 손이 가서 자꾸 자꾸 더 보게 돼.”
그래, 사실은 나도 그랬다. 해야 할 일이 많은 날은 왜 그렇게 더 책이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특히 시험 때나 숙제가 많은 날은 더 그랬다. 읽었던 책을 또 읽어도 재미있고, 긴 책도 지루한 줄 모른다. 수열이에게 책은 피신처인가 보다. 내게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 둘

『몽실 언니』 표지
나는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을 읽는 시간이 좋다. 정말로 아름다운 그림 가득히 재미난 이야기들이 솔솔 풀어져 나오는 그림책을 함께 보고 있노라면 마음도 눈도 모두 행복하다. 하지만 수열이가 3학년이 되고 보니, 그림책을 함께 보기보다는 내가 읽어 주기에는 벅찬 장편 동화들을 저 혼자서 읽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아이들의 책을 다 꿰어차고 있던 나도 수열이의 책 읽기를 좇아가기에 바쁘다.

어느 날인가 수열이가 책상에 앉아 혼자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몽실 언니』였다.
“재미있니?”
“…….”
“이거 되게 슬프지?”
“으으아앙앙.”
당황한 쪽은 나였다. 대개의 경우 책을 읽고 나서 어떠냐고 물으면 ‘재미있다’, ‘너무 재미있다’, 또는 ‘그냥 그래’이렇게 짧게 대답하고 한 번 내 눈을 쳐다보는 것이 고작이던 아이가 겨우 울음을 삭이며 책을 보고 있다가 나의 질문에 울음을 터뜨리고 만 것이었다.

『마당을 나온 암탉』 『늑대의 눈』표지
“몽실 언니가 너무 불쌍해. 몽실언니만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와. 목구멍에 뭐가 걸려 있는 것 같아.” 나중에 한 말이다. 수열이는 한동안 『몽실 언니』책 얘기만 나오면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그 날 밤 당장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몽실 언니』를 만났다. 아직 어리게만 보였던 수열이에게 타인의 삶에 가슴아파할 줄 아는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몽실 언니』가 한없이 고마웠다.

그렇게 수열이가 먼저 읽고, 내가 뒤따라 읽은 책 몇 권이 더 있다. 모두 수열이가 ‘재미있다’는 말 대신 무엇인가 색다른 경험을 한 듯한 표정으로 감동적이라 말하며 내게 권한 책들이다. 나약한 암탉 잎싹이의 당당한 삶에 대한 이야기인 『마당을 나온 암탉』도, 번역자 최윤정 씨의 번역이 너무나 돋보이는 『늑대의 눈』도 그리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지던 『마지막 거인』도 모두 다 수열이의 세계에 날 초대해 준 소중한 보물들이다.

『마지막 거인』 표지와 본문



이야기 셋

『어진이의 농장 일기』 표지
우리 집은 딸만 둘이다. 큰 아이 수열이는 3학년, 작은 아이 수빈이는 1학년, 뭐든지 제 나이 또래보다는 좀 성숙해 보이는 수열이와는 달리 마냥 어리게만 보이는 수빈이는 책 읽기도 꼭 엄마와 함께 해야 했다. 초등 학교에 들어가서도 한참 유행하던 그리스 신화에 대한 만화책을 빼고는 글씨가 좀 많다 싶으면, 절대로 혼자서 읽으려 들지 않았다. 그런 수빈이가 신기하게도 몇 번이고 혼자서 읽는 책이 생겼다. 바로 『어진이의 농장 일기』이다. 요새도 학교에서 준비물로 동화책을 갖고 오라고 하면, 어김없이 가방에 집어넣는 책이다.

『어진이의 농장 일기』는 이 책을 쓴 신혜원 씨가 한 해 동안 주말 농장을 가꾸면서 있었던 일들을, 자신의 아들 어진이의 입장에서 재미있게 꾸민 책이다. 아마도 수빈이가 쿡쿡 웃으며 혼자서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도 다정다감하고 아기자기하게 그린 삽화 속 말풍선 안에 들어 있는 재미난 대사들 때문이었을 것이다(아직도 목욕탕에서 씻을 때 이 책에서 읽은 대사를 마치 연극 대사처럼 읊으며 마냥 좋아한다). 내년에는 우리도 꼭 주말 농장을 하자고 야단들이다.

『냄비와 국자 전쟁』『마법의 설탕 두 조각』『호랑이 뱃속에서 고래 잡기』 표지
『어진이의 농장 일기』를 시작으로 수빈이는 혼자서 책 읽기에 조금씩 맛을 들이기 시작한 모양이다. 역시 신혜원 씨의 재미난 그림과 김용택 선생님의 구수한 옛날 이야기가 잘 어울리는 『호랑이 뱃속에서 고래 잡기』도 혼자서 읽는 책의 단골 메뉴가 되었고, 언니가 적극 권장해서 읽기 시작한 미하엘 엔데의 환상적인 동화인 『냄비와 국자 전쟁』과 『마법의 설탕 두 조각』도 '수빈이가 혼자서 읽은 글씨 많은 책'목록에 추가되었다.

“엄마, 오늘 읽어 줄 책 두 권 저장! 그러니까 내일 네 권 읽어 줘야 돼.” 요새는 밤마다 함께 읽는 그림책의 권수도 줄었고, 예전 같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잠자기 전에 꼭 읽어야 했던 그림책도 졸리면 다음날로 미루는 여유도 생겼다. 나는 아이들의 책 읽는 모습을 통해 아이들이 커 가는 것을 느낀다.
이정은 / 이정은 / 예쁜 딸 수열이, 수빈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나이는 벌써 30대 중반을 훌쩍 넘었건만,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날마다 고민하는 청년의 마음으로 산답니다. 아이들과 함께 여행하면서 야생화 사진 찍는 것이 취미이고, 그림책, 동화책을 너무나 사랑한답니다. 이번 여름방학에 큰 딸 수열이가 홈페이지(myhome.nate.com/binarykim/soo) 만드는 것을 도와 주면서 평소에 하지 못했던 대화를 많이 하게 된 일이 무척 좋은 추억이었다고 합니다. 한 때 목소리가 무척 예쁘다는 소리를 들은 걸 은근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딸들에게 실감나고 재미있게 책을 읽어 주며 성우나 아나운서가 되지 못한 한을 풀고 있다고 합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