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05월 웹진 제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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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어린이 책 이야기

[우리가 사랑하는 작가]
제임스 베리

김서정 | 2002년 05월

5월입니다. 어린이날이 있는 달이지요. 온갖 축제와 행사로 사방이 떠들썩합니다. 연극, 뮤지컬 공연도 쏟아지는데, 그 가운데 약방의 감초처럼 꼭 끼는 레퍼토리가 있습니다. 바로 ‘피터 팬’입니다.

나는 어린 시절 피터 팬을 디즈니 만화 영화로 처음 만났습니다. 그때는 피터 팬의 그 경쾌한 초록색 나뭇잎 의상, 벌새처럼 날렵하게 하늘을 날아다니며 용감하게 해적을 무찌르는 싸움판, 째깍째깍 시계 소리를 내는 악어와 후크 선장 사이의 신경전이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요정, 하늘을 날 수 있는 가루를 아이들에게 뿌려 주는 팅커 벨도 얼마나 매혹적이었는지요. 팅커 벨이 등장할 때의 그 영롱한 실로폰(인가요? 아무튼 뭔가 정말 수정 가루를 뿌리는 듯한 맑고 반짝거리는,) 소리!

『피터 팬』 표지 사진
그런데 우리에게 피터 팬은 그토록 낯익은 캐릭터이지만, 피터 팬을 쓴 제임스 베리는 또 너무나 낯선 작가입니다. 아니, 피터 팬 자신도 숱한 만화영화와 연극과 뮤지컬로만 알려져 있을 뿐, 그 원작인 희곡과 베리 자신이 희곡을 토대로 다시 쓴 동화는 화려한 무대 뒤에 숨겨져 있습니다. 원작 동화에서 피터 팬은 다알링네 삼남매와 네버랜드에 살던 남자 아이들 여섯을 모두 세상으로 돌려보내고, 부모와 아이들과 입양 아이들이 모두 어울려 떠들썩하게 기쁨을 나눌 때 창문 밖에서 쓸쓸하게 그 광경을 지켜봅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피터 팬을 다시 꼼꼼하게 읽으면서 나는 원작 동화의 피터가 화려한 무대를 그렇게 쓸쓸하게 지켜보고 있을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무대 뒤의 피터 팬을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피터 팬이나 제임스 베리에 대한 안내 글을 읽어 보면 한결같이 나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작가 제임스 베리 자신이 바로 피터 팬이었다는 것입니다. 작가가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 안에 자기 자신을 투영시키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제임스 베리는 특히 더 강력하고도 독특하게 자신을 반영한 극중 인물인 피터 팬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어른이 되어서도 키가 5피트 2인치, 그러니까 약 158센티미터에 머물렀습니다.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곧 이혼했으며, 여자에 대한 관심보다는 어린 아이들 특히 남자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각별했습니다. 그의 형 데이비드 베리는 13살에 하키를 타다 넘어져 머리를 부딪친 사고로 죽었고, 그때부터 데이비드는 13살의 모습 그대로 제임스의 뇌리에 남아 있게 됐습니다.

『피터 팬』 표지 사진
어려서부터 친구들과 즉흥 연극 하는 것을 좋아하고, 대중 잡지를 탐독하면서 바다와 해적에 관한 모험담에 빠져들었던 베리는, 소설가와 희곡 작가로 문명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베리의 우상이었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그에게 "당신은 천재"라는 편지를 써 보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베리가 썼던 성공적인 희곡들에서는 하늘을 날아 다니는 소년, 영원히 자라지 않는 소년 모티프가 자주 발견됩니다. 그러다 마침내 그 모든 모티프들을 집대성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 과거와 현재의 주위 사람들을 모델로 한 어린이용 희곡,『피터 팬』을 쓰게 된 것입니다. 웬디는 자신의 어머니와, 어린 나이로 죽은 친구의 딸이 모델이었습니다. 네버랜드에 있던 아이들이 웬디를 위해 지어 준 나무집은 어렸을 때 친구들과 연극을 하며 놀던 세탁소 건물을 떠올리며 만든 것이었고, 네버랜드는 당시 즐겨 읽던『산호초 섬』의 무대를 옮겨 온 것이었습니다. 네버랜드에 있던 여섯 아이들은 제임스 베리와 절친했던 친구네 집의 다섯 아들이 모델이었습니다. 친구 내외가 일 년 사이에 암으로 연달아 세상을 떠난 후 그 아이들 아버지 노릇을 도맡아 했다는군요.『피터 팬』에 나오는 인물들 이름은 그 아이들과 자기 형제들 이름에서 가져온 게 많습니다.

『피터 팬』은 나오자마자 '어린이 문학의 고전'이 되어 버렸습니다. 영국에서는 크리스마스 공연의 고정 레퍼토리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람이 하늘을 날게 만드는 장치, 해적과 인디언과 오글오글 모여 사는 어린 아이들 같은 다양한 인물들을 만드는 일은 연극 연출자들에게는 아주 신나는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관중석에 있는 아이들에게는 통쾌하고 재미있는 모험의 세계를, 어른들에게는 어린 시절을 향한 그 영원한 향수를 한껏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원작 희곡은 읽어 보지 않아서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임스 베리가 동화로 옮겨쓴『피터 팬』은, 그렇게 마냥 신나고 행복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라는 일의 그 안타까움과 자라지 않는 일의 그 쓸쓸함이 뒤섞이고, 아이라는 존재의 천진함과 조야함, 어른이라는 위치의 힘있음과 힘없음, 경쾌한 패배와 비통한 승리 같은 이중적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 애잔한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첫머리부터 이렇게 애틋한 소리를 합니다.

한 아이만 빼고, 아이들은 모두 자랍니다. 자신들이 자랄 거란 사실을 그 애들은 오래지 않아 눈치채게 되는데, 웬디는 그것을 이렇게 알게 되었습니다.

『피터 팬』표지 사진
그 애는 두 살 때 정원에서 놀다가 꽃 한 송이를 꺾어 들고 엄마에게 달려갔습니다. “오, 네가 영원히 이대로 머무를 순 없는 걸까!” 다알링 부인이 가슴에 손을 모아 꼭 쥐고서 이렇게 말한 걸로 봐서 그 애는 그 때 무척 즐거워 보였던 게 틀림없어요. 그때 일어난 일은 그것뿐이었지만, 웬디는 그렇게 해서 자기가 자라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두 살만 지나면 알게 된답니다. 그러니까 두 살이란 끝이자 시작인 셈이지요. (『피터 팬』, 삼성출판사, 1997, 6~7쪽)

그렇게 아이들은 자신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을 끝내야 합니다. 그리고 자라는 일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피터는 자라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끝도 거부하고, 시작도 거부한 셈이지요. 그렇게 해서 피터는 영원한 젊음과 즐거움을 확보합니다. 마지막 대결을 벌이는 싸움판에서 후크가 “팬, 너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냐?”고 쉰 목소리로 묻는 말에 피터가 “난 젊음이고, 또 즐거움이야.”라고 대답하는 걸 보세요.

그러나 그렇게 영원한 젊음과 즐거움을 얻은 대신 피터는 잃는 것도 많습니다. 과거의 자신과 미래의 자신을 잃고, 추억을 잃고,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고, 심지어는 적도 잃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인간의 삶을 이루는 기본적인 요소들입니다. 그것을 잃는다는 건 자기 자신을 잃는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피터는 영원한 젊음과 즐거움이라는 추상적인 가치와 자기 실존을 바꾼 셈입니다.

실체로서의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고 인어와 요정과 별의 편에 서기를 택하는 일. 그건,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살이나 다름없습니다. 제임스 베리가 아버지 노릇을 했던 친구의 다섯 아이들 중 하나인 피터라는 아이가 자살을 기도했다는 사실은 정말로 기묘한 일치이자 상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피터 팬이 자기 자신을 죽이고 있다는 증거는, 후크와의 싸움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후크는, 어떤 면으로 보자면, 어른이 된 후의 피터 팬입니다. 피터가 어른을 적대시하듯 후크는 아이들을 적대시합니다.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애증이 엇갈리는 반응도 똑같습니다. 둘은 똑같이 잔인하고, 허세 부리기 좋아하고,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 깊은 외로움과 두려움을 갖고 있으며,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거부하는 몸짓을 보이는, 자기 통제가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피터가 어른이 된 자기 자신을 참을 수 없듯이 후크도 어린 자신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둘 사이에는 그래서 그렇게 피튀기는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두 면이 현실의 같은 시공간에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으니까요. 실재로서 나타나고 표현되는 것은 하나를 누른 다른 하나뿐이니까요.

후크 선장과 싸우는 피터 팬
싸움은 결국 피터의 승리로, 그러니까 젊음과 즐거움의 승리로 끝납니다. 그러나 그 승리의 뒷면에는 잠 못 이루는 밤과 슬픈 꿈과 꿈 속의 통곡이 있습니다. 그런 뒤 아이들을 세상으로 데려다 주러 가는 여행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세요.

그런데 피터는 아이들을 아주 거칠게 다루었습니다. 그의 명령에 즉각 복종하는 것만이 가장 안전했습니다. 한번은 슬라이틀리가 물의 깊이를 재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금방 알아듣지 못하여 멍하니 서 있다가 채찍으로 열두 대나 맞았을 정도입니다. 피터는 또 후크의 옷 중에서 가장 악랄한 위험이 돋보이는 것을 골라 웬디한테 줄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 후 아이들 사이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피터가 선실에서 그 옷을 입고 앉아 후크의 담배 파이프를 입에 문 채 한쪽 손을 후크의 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려 내리치는 시늉을 하고 있더라는 얘기였습니다. (같은 책, 209쪽)

미래의 자신을 악어 밥으로 만들어 버린 피터는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그리고 웬디와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따뜻하고 환한 집 안을 쓸쓸히 창문 밖에서 들여다보다가 다시 네버랜드로 물러갑니다. 그 뒤로 또다른 아이들을 네버랜드로 데려오고, 또다른 요정을 데리고 다니고, 또다른 후크와 싸움을 벌이고……. 그런 일들이 영원히 계속되겠지요.

『피터 팬』표지 사진
똑같은 삶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불멸성 모티프를 인상 깊게 그려낸 동화로 나탈리 배비트의『트리갭의 샘물 Tuck Everlasting』이 있습니다. 그 작품에 그려지는 불멸의 삶은 끔찍합니다. 그러나 저주받았다는 느낌으로 현실 세상을 떠도는 터크 일가와 달리 피터 팬은 그 느낌을 안으로 삼켜둔 채, 관객들에게 환상 세계의 활기와 기쁨을 주는 무대의 주인공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피터 팬을 사랑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저주는 온전히 자신이 끌어안고, 우리에게는 축복만을 주는 불멸의 존재가 되어 주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문명은 떨쳤지만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 형의 죽음, 불행한 결혼, 양아들들의 잇따른 변사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을 제임스 베리도, 그러니까 피터 팬만큼은 아니더라도 사랑해 주고 기억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김서정 / 1959년에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고 독일 뮌헨 대학에서 수학했습니다. 한국프뢰벨 유아교육연구소의 수석 연구원과 공주 영상 정보 대학 아동 학습 지도과 교수를 지냈습니다. 동화 작가와 아동 문학 평론가, 번역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동화『믿거나 말거나 동물 이야기』『유령들의 회의』를 썼고,『내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세요?』『행복한 하하호호 가족』『용감한 아이린』『어린이 문학의 즐거움』(시리즈)『용의 아이들』등 옮긴 책이 아주 많습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