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01월 웹진 제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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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어린이 책 이야기

[내가 꼭 만들고 싶은 어린이책]
싱싱한 생명력을 가진 아이들이 뛰노는 책

최아란 | 2002년 01월

지금도『순이와 어린 동생』이나『이슬이의 첫 심부름』같은 하야시 아키코의 책을 넘기다 보면, 처음 이 책들을 보았을 때의 그 떨림이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순이와 어린 동생』『이슬이의 첫 심부름』표지
동전을 손에 꼭 쥐고 우유를 사러 나선 첫 심부름길의 흥분, 꼭 쥐고 있던 동전을 그만 떨어뜨렸을 때 난생 처음 맞닥뜨린 위기의 순간, 가게 아주머니를 제딴에는 있는 힘껏 불러 보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 심부름을 제대로 해 내고 돌아오는 아이를 마중나온 흐뭇한 엄마의 미소는 책장을 덮고도 내내 기분 좋은 아늑함으로 긴 여운을 남깁니다. 두부 심부름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눈을 팔아 두부를 깨뜨리고는 혼날까 싶어 집에 가는 길이 두려웠던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슬그머니 되살아나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입사하고 처음 하게 된 일은『월간학습』이라는 초등 학생용 학습 잡지였습니다. 그러다가 그 잡지가 폐간되면서, 우연히 아주 운좋게도 우리 부서가 단행본 일을 하게 되는 부서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처음 시작한 일이,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학습박물관’이라는 여섯 권 짜리 학습 정보책 시리즈 물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학습박물관’ 시리즈
지금이야 인터넷 때문에 이 책의 위력이 좀 덜해졌지만, 전과 이외에는 마땅한 숙제 도우미가 없던 당시에 이 책은 학부모들로부터 꽤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때부터 책 만들기의 진정한 맛과 의미를 조금씩 깨달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코앞의 과학’이라는 생활 과학 동화 시리즈가 제가 만든 두 번째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1996년,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상황으로 보면 너무나 앞선 기획이라고들 합니다. 글이 제법 많은 어린이 책을 화가가 직접 기획했고, 그것도 과학 동화 형식이었으니 말입니다. 의식주라는 소재 속에서 과학적인 요소를 찾아 내고자 하였으니, 동화 부분은 그것대로 재미와 긴장감을 계속 끌고 가야 했고 과학책인 만큼 정보의 양이나 구성도 짜임새를 갖추어야 했지요. 그 작업 과정이 녹록치 않았음은 미루어 짐작이 가능할 것입니다.

‘코앞의 과학’ 시리즈 2, 3권 표지
우리 어린이 책에서 캐릭터를 찾기 힘들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맨 먼저 ‘코앞의 과학’ 시리즈에 나오는 사랑스런 악동 ‘딴지와 달궁이’를 떠올립니다. 책의 맨 처음에 마치 만화 책처럼 등장 인물 소개가 나옵니다. 할아버지와 엄마, 아빠, 그리고 딴지와 달궁이, 누구보다 시집 못 간 만화가로 등장하는 고모가 압권이지요. 할아버지는 외할아버지인데 고모, 즉 사돈 처녀가 한집에 같이 사는 흔치 않은 가족 구성부터가 만만치 않은 사건의 전개를 예고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벌어지는 사건 또한 엽기 그 자체랍니다. 쥐 잡기 작전을 펼치면서 집 구석구석의 구조를 살피는 1권『숨은 쥐를 잡아라』중에서, 쥐덫에 걸려든 쥐를 어떻게 죽일까 논의하는 가족들의 대사를 잠깐 들려 드릴게요.

엄마 : 내가 집게로 꺼낼 테니, 당신이 야구 방망이로 내리쳐요. 달궁 : 그럼 우리 가스불에 태워 죽일까요?

이런 엽기적인 대화가 오가다가, 결국 쥐덫채 물 속에 담가 익사시키고는 죽은 쥐를 마당에 묻고 모두 함께 죽은 쥐를 위해 묵념을 올립니다. 그야말로 ‘코믹 엽기 스릴러’ 성격을 띤 ‘가족 시트콤’을 보는 듯하죠.

『숨은 쥐를 잡아라』표지와 본문
당시엔 엽기나 시트콤이 뜨기 전이었으니, 이 책이 시대를 앞선 기획인 건 확실합니다. 그래서인지 처음 책이 나와서는 만든 사람들만 낄낄대며 재미있어 하는 이상한(?) 책이었는데 오히려 요즘 들어서 독자들의 반응이 느껴지니, 어린이 책은 잘만 만들면 어느 때가 되든 알아 보는 독자들이 생긴다는 믿음에 확신을 주는 책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책 말미에 편집 후기 형식으로 화가가 직접 제작한 만화는 책 만드는 이들이 보면 누구나 슬그머니 웃음이 배어 나오는 부분이지요. 기획 회의 단계에서 오가는 작가, 화가, 편집자 간의 설전의 과정, 편집자의 원고 독촉 전화에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먹는 걸로 풀면서도 늘어나는 살을 걱정하는 작가, 괜히 지나가다가 딴지 거는 편집장의 모습까지가 단 두 페이지 안에 그대로 담겨 있으니까요. 드라마보다 뒤에 따라붙는 NG 모음이 더 재미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나쁜 어린이 표』표지
편집자라면 누구나 자기를 변화시키고 사고를 크게 확장시켜 준 책 한 권쯤은 갖고 있을 겁니다. 제게는『나쁜 어린이 표』가 바로 그런 책이죠. 신문에 연재된 1회 원고를 읽었을 때 뒤통수를 때리는 듯 신선했던 느낌, 광주에 사는 작가와 접촉을 시도하면서 가졌던 열정과 설렘, 원고를 넘겨받기까지 첩보전(?)을 연상케 했던 우여곡절의 과정들이 지금도 가슴 떨리는 기억으로 남습니다.

맘에 드는 원고를 덥석 손에 쥐게 되었으나, 이제 어떻게 키우고 가꾸어 세상에 내놓아야 할지 참 막막하더군요. 한 권으로 만들기엔 너무 짧은 분량 때문에 망연해 하고 있을 때 작가의 다른 단편들을 함께 끼워 볼까 하는 망설임에 과감하게 일침을 가해 준 팀장님, 이제까지는 없었던 전혀 다른 형식으로 접근하도록 이끌어 준 노련한 디자이너 선배, 주인공 캐릭터부터 심리 묘사, 장면 묘사까지 120% 이상 작품을 표현해 낸 화가에 이르기까지, 편집자가 원고에 대해 갖는 자신감에 대해서 모두가 믿어 주고 각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 내었기에 만들어진 결과물이었습니다.

『나쁜 어린이 표』본문
그러나 과정의 치열함이나 결과에 대한 좋은 평가보다도 나를 더욱 흐뭇하게 만드는 건, “나는 나쁜 아이가 아닌 것 같은데 왜 자꾸 ‘나쁜 어린이 표’를 받는 걸까?”라는 주인공의 대사를 처음 접했을 때 내 마음이 쿵 하고 울렸던 그 감정을, 아이들이 똑같이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나와 똑같다.” “내 아이와 너무 똑같다.”는 아이들과 부모들의 반응을 편지로, 메일로, 인터넷 서평으로, 독후감으로 만나면서, 동화책 한 권이 상처받은 이들에게 작으나마 위안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참 기뻤습니다.

처음 어린이 책을 만들면서는 편집자는 무슨 책을 만들든 기획자나 작가 이상으로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작가나 기획자의 지식 수준을 절대 넘어설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몇 번인가 체험하고선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그들의 모든 감성과 지성의 코드를 자극시켜서 내가 만들고 싶은 책의 씨앗을 그들에게 뿌리자.’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가나 기획자의 개인적인 관심사를 낱낱이 알고 있어야 했고, 그들의 어린 시절부터 성장기까지의 개인사도 꿰고 있어야 했지요. 또 요즘엔 뭘 생각하면서 사는지, 당장 해야 할 일과 평생에 걸쳐 해 보고 싶어하는 작업은 뭔지 등등, 인간적인 유대감과 믿음이 탄탄하게 깔려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내게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여동생이 있습니다』표지
유년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 그 이야기타래를 하나씩 풀어내면 참 좋겠다 싶은 작가를 만나면, 일본 애니메이션「추억은 방울방울」(おもひで ぽろぽろ)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그림 잘 그리고 자기 이야기도 잘 쓰는 화가를 만나면 쌍빼의『자전거포 아저씨 라울 따뷔랭』을, 솜털의 감촉도 느껴질 만큼 잘 표현해 내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작가에게는『내게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여동생이 있습니다』를, 색다른 형식의 어린이 교양서에 관심이 많은 기획자에게는『모네의 정원에서』(리네아 이야기 1권)를, 판타지에 특별한 감성을 비치는 작가에게는『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1』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지하철 역의 9와 3/4번 승강장을 통해 현실에서 마법의 학교 호그와트로 들어가는 해리포터의 도입부를 읽고부터, 지하철을 기다릴 때면 늘상 마법의 학교로 빨려들어 갈 것 같은 발칙한 상상을 하는 나의 엉뚱함을 함께 나누고 싶으니까요.

나로부터 자극을 받은 작가나 기획자들이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던 이야기 한 토막을 발견하고는 기꺼이 끄집어 내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리게 만들고 싶습니다. 그것이 동화든 기행문이든 미술 책이든 과학 책이든 좋습니다. 진지하게 아이의 내면에 다가서든 장난끼 넘치는 위트와 유머가 가득한 책이든 상관없습니다. 작가가 행복하게 자기 이야기를 쓰는 것, 그 속에서 파닥거리며 살아 숨쉬는 아이들의 모습을 만나게 되는 일이 즐거우니까요.

『모네의 정원에서』『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1』표지
『소설』이라는 소설에는 주인공이 처음 출판사에 입사해서 하루에도 수백 편씩 들어오는 원고를 읽고는 버릴 원고와 취할 원고를 골라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과정을 ‘쓰레기 더미에서 진주를 찾아내는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지요. 일 년에 한번, 아니 몇 년에 단 한 번만이라도 진주를 찾아내는 순간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E.L. 코닉스버그나 수지 모건스턴 같은 작가를 탄생시키기를, 아니 어디서고 그런 가능성을 지닌 작가 지망생이라도 만나게 되면, 떡잎을 알아 보고 싹 틔워 주기를 주저하지 않는 편집자의 안목을 부단히 키워 두어야 할 터입니다. MBA의 스카우터가 무명의 박찬호와 김병현의 가능성을 알아 보고 발굴해 내었듯이 말이죠.

오늘, 극장 앞에서 무슨 영화를 볼까 잠시 망설였습니다. 멋진 톰크루즈가 나오는「바닐라 스카이」에 잠시 흔들려 보지만, 결국「몬스터 주식회사」를 보기 위해 표를 삽니다. 선악의 뻔한 대결이지만 악당을 물리칠 때마다 숨죽이고 있다가 환호성을 터뜨리는 극장을 가득 메운 꼬마들의 숨결을 느끼면서, 내가 만든 책에 이 아이들의 싱싱한 생명력을 불어넣고 싶다고 생각하며, 극장 문을 나섰습니다.
최아란 / 숙명 여자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웅진출판에 입사하여 6년째 아동 단행본 팀에서 어린이책을 기획, 편집하고 있습니다. 지난 해에는『바둑이는 밤중에 무얼할까』,『초대받은 아이들』,『인류 100대 과학사건』 등의 책을 만들었으며, 올해는 단정하고 정갈한 미술책 한 권과 진한 휴먼 스토리가 담긴 과학책을 기획하는 게 꿈이라고 합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