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0월 웹진 제10호
열린어린이 책 이야기
열린 주제 열린 글
주목 받는 새 책
열린어린이가 권하는
이 달의 책

열린어린이 책 이야기

[다시 생각하는 어린이 문학]
사랑이라는 위대한 힘에 대하여

오석균 | 2001년 10월

문학 작품을 감상하고 해석할 때 나는 가급적이면 특정 장르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축에 속한다. 개별 작품의 특성이나 위치를 구분하고 규정하는 유형론적인 편리함과 유용함을 가볍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성글기 그지없는 개념의 그물로 건져 올리기에는 너무 깊고 폭넓은 작품들이 많기 때문이다.
『백조의 트럼펫』 표지
어쩌면 정말 뛰어난 작품일수록 장르적인 관습을 뛰어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문학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에 담는 희망과 꿈이, 절망과 그 극복의 과정이 고정된 틀 안에서 온전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인가. 그건 복잡하고 다양하게 얽힌 우리의 삶이 몇 개의 인식론적 유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치와도 비슷할 것이다.

『백조의 트럼펫』은 『샬롯의 거미줄』(1952)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국 작가 엘윈 브룩스 화이트가 1970년에 펴낸 작품이다. 『샬롯의 거미줄』에서는 자신이 뽑아낸 거미줄로 글을 써서 죽음의 위험에 처한 친구인 돼지를 구해 내는 거미의 헌신적인 우정이 감동적으로 다루어졌다. 『백조의 트럼펫』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말을 하지 못하는 트럼펫 백조인 루이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동물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셈이다. 루이는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전하기 위해 글을 배우고 트럼펫 연주를 배운다.

『백조의 트럼펫』본문 그림
그런데 동물이 주인공이 되어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을 이루어 낸다고 해서 이 작품을 굳이 판타지 동화로 분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판타지의 틀 안에만 가두기에는 주제의 깊이와 폭이 만만치 않고, 주제와 어울리며 빚어지는 표현과 묘사도 예사롭지 않다. 물론 판타지의 범주를 보다 넓게 설정하여 작품 해석에 적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도 역시 문제는 남는다. 요컨대 현실과 판타지는 정말로 영역이 구분될 수 있는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 접점과 경계는 어디인가. 그리고 두 영역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포괄적인가. 이러한 물음들은 아무래도 정확한 답이 주어지기 힘든 것들이다. 그렇다면 작품에 대한 보다 전체적인 이해는 판타지 개념의 외연과 내포를 넘어서는 곳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백조의 트럼펫』을 읽고 난 느낌은 사건의 흐름이 무척 경쾌하고 상큼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느낌은 다소 뜻밖이었다. 왜냐하면 작품의 주인공인 루이가 언어 장애를 가지고 있는 트럼펫 백조이기 때문이다. 희귀종인 트럼펫 백조는 백조 가운데 가장 몸집이 크며, 그 울음소리는 자동차 경적처럼 힘차고 묵직하게 멀리 울려 퍼지는 음색을 가진다. 수명은 35년 정도인데, 한 번 짝을 맺은 암컷과 수컷은 평생을 함께 살아간다.

작품은 아빠와 함께 캐나다 서부의 숲으로 캠핑을 온 샘이라는 소년이 늪지대 한가운데에서 둥지를 틀고 있는 트럼펫 백조 한 쌍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백조들은 봄이 되자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기 위해 멀리 남쪽으로부터 날아온 철새였다. 알을 품고 있는 백조 부부와 샘 사이에는 한동안 긴장이 감돈다. 하지만 암컷 백조를 해치려던 여우를 샘이 쫓아 준 덕분에 이들 사이에는 믿음이 생겨나고, 연못의 분위기는 때마침 불어오는 싱그러운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서정적인 공간으로 녹아든다.

새로운 생명들을 기다리는 백조 부부에게 세상은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감은 근심과 걱정으로 바뀐다. 다섯째 아이로 태어난 루이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즐거운 의무와 신나는 책임’을 잊지 않는 아빠 백조는 루이에게 강인하고 용감하며 명랑하기를 당부한다. “이 세상에는 극복해야 할 장애를 가진 젊은이가 아주 많단다. 물론 너도 언어 장애를 가지고 있어. 하지만 언젠가는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아빠는 믿는다. 네 나이에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오히려 이로울 수도 있어.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자세를 키워 줄 수 있으니까.”

『백조의 트럼펫』본문 그림
다른 존재와 의사를 소통하지 못한다는 것은 커다란 고통이다. 아빠를 닮아 자부심이 강한 루이는 이러한 난관을 넘어서기 위한 방법을 찾아 나선다. 루이는 샘을 따라 학교에 다니면서 읽기와 쓰기를 배운다. 이로써 사람들과의 대화는 가능하게 되었지만, 아름다운 백조 세레나가 글자를 이해할 리는 없다.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 없다는 것보다 더 쓸쓸하고 괴로운 일이 있을까. 점점 좌절감에 빠져드는 루이를 보다못한 아빠 백조는 악기점으로 날아가 트럼펫을 훔쳐다 준다. 용기를 되찾은 루이는 열심히 트럼펫 부는 법을 배워 훌륭한 음악가가 되며, 연주를 해서 번 돈으로 악기 값을 물어준다. 그리고 마침내는 세레나의 마음까지도 사로잡는다. “이제 루이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백조였다. 마침내 진짜 ‘트럼펫 백조’가 된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말하지 못하는 불행과 어려움을 마침내 이겨 낸 것이었다.”

백조가 트럼펫을 불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허구이다.
『백조의 트럼펫』 본문 그림
그러나 문학 작품 속의 사건이란 작가의 소망에 의해 다른 차원으로 옮겨진 변용된 현실이다. 이렇게 변용된 세계에서는 사실성의 단순한 결합을 뛰어넘는 의미의 맥락이 작품의 이해를 밝히는 빛이 된다. 루이의 트럼펫은 의사 소통을 위한 도구에 그치지 않는다. ‘아빠의 사랑과 축복’이 가득 담긴 트럼펫은 루이에게는 슬픔을 넘어서게 하는 힘이며 희망이다. 그것은 또한 장애를 넘어서는 자유 의지이며, 자기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위대한 사랑의 힘’이다.

루이가 불행을 극복하는 과정은 결코 어둡거나 무겁지 않다. 작품은 긴장된 서술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시종일관 명랑함과 익살스러움을 유지한다.
『백조의 트럼펫』본문 그림
그리고 주로 북아메리카의 환경에서 서식하는 트럼펫 백조들의 생태와 성장을 생동감 있게 서술하면서도, 작품 전편에 걸쳐 펼쳐지는 시적 묘사는 읽는 이의 가슴에 기다란 여운을 남긴다. 삽화 역시 글과 잘 어울린다. 2도로 처리되어 소박한 느낌을 주는 삽화들은 고즈넉하고 아련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도,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과 인물들의 표정과 심리를 빼어나게 살려냈다. 이 작품을 보면서 문득, 양적으로 팽창하고 있는 우리의 어린이 문학이 내용의 튼실함보다도 시각적인 화려함만을 좇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의 기우일는지.
오석균 / 성균관대학교와 독일 뮌헨 대학에서 독문학을 공부했습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어린이 책을 비롯하여 여러 책들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산하 출판사와 계림북스쿨 출판사에서 어린이 책을 만들었으며, 지금은 도서 출판 청년사의 주간으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