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02월 웹진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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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어린이 책 깊이 들여다보기]
친구의 소중함을 느껴요

나진아 | 2001년 02월

예쁘장한 그림들이 대부분인 보통의 동화책들과 달리『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에 나오는 그림 중에는 색깔이 어둡고 탁하게 칠해진 것들이 많다. 그래서 예솔이에게 이 부분에 대해서 먼저 얘기를 꺼내 본다. "예솔아, 이 아저씨 그림들은 특이하네." "기분이 나쁜 그림들이야. 좀 못 그렸다." "엄마가 보기엔 아저씨는 일부러 이렇게 그린 것 같애. 보르카가 눈물을 닦고 있는 손수건도, 보르카를 남겨 두고 남쪽으로 날아가 버리는 기러기 떼들의 날개도, 아주 뾰족뾰족하게 그려져 있지? 가슴 아픈 장면들은 이렇게 날카롭게 그려져 있네. 그렇지만, 아기 기러기들이 태어날 때엔 동글동글한 꽃들이 세상 가득 피어 있지? 아저씨는, 기분 좋은 내용은 밝고 둥글게, 슬픈 장면은 어둡고 뾰족하게 그린 것 같지?"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표지 사진

예솔이는 그림에 대한 나의 이런 지적에 책장을 이리저리 펼쳐 보면서 다른 모든 그림들도 이런 식으로 봐야 하느냐고 묻는다. 웃으며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여덟 살은 아직은 내 설명이 엉뚱하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나이임을 새삼 깨닫는다. 이렇게 예솔이와 함께 책을 읽으면서 얘기해 본 적이 언제였더라? 얼른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물론 예솔이가 어렸을 때는 소리 내어 읽어 주곤 했었다. 그러나 아이가 글을 잘 읽게 된 뒤로는 책을 사다 주거나 빌려다 줄 때 가끔씩 슬쩍 들춰보기나 했을 뿐, 읽기는 아이에게 전적으로 맡겨 두었다.

오래간만에 엄마와 머리를 맞대고 함께 책을 읽는 것에 아이는 무척 즐거워한다. 책을 읽다 보니 나 역시 동물들이 사람처럼 행동하고 말하는 동화의 세계로 잠시 되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책 속 뜨게 바늘로 깃털을 짜고 있는 엄마 기러기의 모습은 참 따뜻한 느낌을 전해 준다.

"그런데 왜 보르카는 깃털 없이 태어났을까? 혹시 태어나기 전 알 속에서 부지런히 깃털을 만들어 입지 않아서일까?" "아냐, 유전자 때문이야. 둘 있어야 하는 유전자가 하나밖에 없거나, 뭔가 이상이 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예솔이가 유전자라는 말을 들어봤나 보다. 나는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이해하지 못할까봐 일부러 빙 둘러대며 이유를 생각해 보라고 말을 꺼낸 것인데…….
『웬델과 주말을 보낸다고요?』표지 사진

내가 다시 물어 본다. "예솔이가 보르카의 형제였다면 보르카를 놀렸을까?" "보르카의 모습이 보기싫기는 해, 깃털 없이 살만 있으니까. 그래도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야지. 이말은 내가 친구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야."

예솔이가 한 말은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예솔이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이면서도 아이에게 교훈적으로 가르치는 태도를 피하느라 일부러 꺼내지 않았던 말이다. 그런데 예솔이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아 있다니……. 아이가 품고 있는 생각의 크기나 마음 씀씀이가 내가 생각해 오던 것과는 다르게 의외의 부분이 많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는다.

『웬델과 주말을 보낸다고요?』의 몇 장면은 우리를 한참 웃게 만든다. 웬델은 소피와 함게 놀면서도 괜찮은 역을 혼자서 독차지하고 소피에게는 하찮은 역할을 맡긴다. 나중에는 서로 마음을 트고 친구가 되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소피가 힘들어한다.

병원 놀이를 하면서 웬델이 의사며 간호사 역할을 하는 동안 소피는 아무 대사 없이 책상 위에 놓인 시계가 되어 움츠리고 앉아 있어야 했다. 빵집 놀이를 할 때면 소피는 구워 놓은 케이크 역할을 한다.
『이제 너랑 절교야』표지 사진

그런 소피가 측은해 보이기도 하고, 현실에서는 이렇게 놀면 무척이나 곤란할 터이지만 책으로 읽는 이 대목은 너무 재미있다. 두고두고 예솔이와 나의 농담거리가 될 것 같다. 예솔이는 몸을 웅크리고 책상 위에 놓인 시계나 구워 놓은 케이크 역할을 해 보면서 소피의 난감해 하는 표정을 흉내내어 본다. 읽어 가는 동안 저절로 친구를 배려해야 함을 느끼게 해 주는 책이다.

『이제 너랑 절교야』는 두 친구, 제니퍼와 로리타가 친하면서도 티격태격하는 모양을 보니, 꼭 예솔이와 예솔이의 친구들을 보는 것 같다. 제 또래 아이들의 생활과 심리가 묘사되어 그런지 예솔이는 다른 책보다도 이 시리즈를 더 재미있어 한다. 제니퍼의 새 안경을 로리터가 매우 부러워하는 대목에서 예솔이에게 물어 본다.

"예솔이는 친구들 물건 가운데 뭐가 제일 갖고 싶었어?" "성현이의 예쁜 수첩하고 재원이의 필통, 그리고도 많아." "그럼 친구들이 탐냈던 예솔이 것은?" "내 색칠 공부 책."

그렇지. 예솔이 나이 또래에게는 어른들이 보기엔 별 것 아닌 것 같은 필통, 수첩, 색칠 공부 책 같은 것이 소중하고 갖고 싶은 것들이지. 눈이 나빠졌다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안경도 써 보고 싶은 나이이지.

"도수가 조금 놓은 안경을 쓴 로리타의 기분이 이렇다고 쓰여 있네. '달나라에 간 우주비행사 기분이 이럴까?' '아니면 솜뭉치에 파묻힌 강낭콩이 이럴까?' 재미있는 구절이네. 엄마 안경 써 볼 때 네 기분은 어땠어?" "음……. 생크림 속에 파묻힌 개미가 된 기분? 깊은 웅덩이에 빠진 너구리가 된 기분?"

『내 남자 친구야』를 탁 덮으면서 예솔이는 "야 참 재미있다!"고 감탄한다. 나는 여자인 로리타가 남자 친구인 올리비에보다 더 씩씩하고 여유 있어 보이는 점이 맘에 들어 그 부분을 예솔이에게 지적한다. 예솔이는 그래도 남자가 여자보다 더 씩씩한 것이 좋다고 말한다. 나는 그런 식의 견해를 갖도록 키우지 않았는데 그런 선입견이 아이에게 벌써 들어 있다니 영 마음에 걸린다. 나는 예솔이에게 남자는 이렇고 여자는 이렇다고 미리 정해 놓고 보지는 말자고 얘기를 꺼내 본다.
『내 남자 친구야』표지 사진

같이 책을 읽다 보니 책을 통해서 아이와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참으로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책 내용과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얘기가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평소 생활 모습에서 잘 엿보지 못했던 아이의 관심사나 생각의 폭 등을 이런 대화를 통해서 많이 알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엄마로서 나는 책을 권할 때 아이에게 바라는 몇 가지가 있다. 등장 인물들에게 감정 이입도 해 보고, 많은 감동도 느껴 보고 인생을 풍부하게 해 줄 수 있는 깊이 있는 시선도 얻게 되기를.

그러나 예솔이는 아직은 줄거리 위주로만 책을 읽고, 읽었던 책을 몇 번 더 들춰본다든지, 교훈을 음미해 본다든지 하는 태도는 몸에 붙이지 못했다. 그래도 책을 읽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고 계속 접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책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터득해 내겠지. 언젠가 초등학교 3학년 정도까지는 엄마가 같이 책을 읽어 주는 것이 좋다는 권고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 경험으로 더욱 그 말에 공감하게 된다.

글을 읽는 것과 글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해 낼 줄 아는 것은 다르기 때문에 책을 읽는 재미를 다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어느 정도는 어른들이 아이의 이해력을 끌어 올려 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엄마와 함께 책을 읽으면서 예솔이는 친구가 얼마나 소중한지 마음으로 느꼈을 것이고, 엄마와도 무척 가까워졌다고 느낄 것이다. 이런 느낌들을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 가는 것이 엄마와 함께 책을 읽음으로써 아이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진아 / 1966년에 태어났습니다.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약국을 경영하다가 육아 때문에 쉬고 있답니다. 네 살배기 둘째가 다섯 살이 되면 약국을 계속할까 생각중이랍니다. 예솔이와 지웅이 남매를 기르면서 일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지요. 고양시 '이웃 사랑 독서회' 회원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으며, 시를 좋아해서 시를 공부하는 모임에도 나가고 있답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