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01월 통권 제1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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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찾아서]
자연을 선물하고 싶은 그림 작가 김재홍

공혜조 | 2001년 10월

선생님이 일러 주신 길을 따라 철길을 넘고 개천을 따라 주욱 내려갑니다. 개천과 공장으로 에워싸인 곳에 작은 아파트 단지가 섬처럼 자리잡고 있고 그 맞은편에 작은 상가가 있습니다. 전화를 드리고 사방을 두리번거릴 새도 없이 선생님이 차창을 두드립니다.
작업실의 김재홍 선생님
적당한 자리를 찾아 차를 세우고 작업실을 향해 걷는데 선생님의 얼굴과 몸피가 무척 단단해 보입니다. 선생님이 그린 그림책 속 사람들의 몸과 많이 닮은 선생님의 몸입니다. 상가 건물 이층의 피아노 학원과 출입문을 같이 쓰고 있습니다. 피아노 소리가 그림 그리는 일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여쭈어 보니 이력이 나서 괜찮다며 활짝 웃어 보이십니다.

조금 전까지 하시던 작업이 그대로 펼쳐진 이젤에는『고양이 학교』셋째 권에 실릴 그림이 이야기만큼이나 환상적인 색채를 내뿜고 있습니다. 이젤 너머 벽에는 ‘그림 속의 그림, 동강’전에 전시되었던「시집가는 날」이 걸려 있고 제 몸을 온통 물감에게 내어 준 빠레트가 제 할 일을 다한 듯 걸려 있습니다. 벽에 걸린 빠레트 대신 선생님의 붓을 기다리는 건 놀랍게도 이젤 옆에 엎어져 놓인 네모난 커다란 쟁반 한 쌍입니다. 선생님이 엎어져 있는 쟁반 뚜껑을 열어젖히니 아래 누운 쟁반에서 온갖 색이 튀어나옵니다. “아크릴 물감은 워낙 잘 말라서요. 잠시라도 작업을 중단할 때는 이렇게 덮어 놓아요.” 이왕 빠레트를 젖히신 김에 사진을 찍게 해 달라고 부탁드리니 붓을 잡고 앉으십니다.

고양이 사진들
작은 탁자를 옆 둔 의자에 앉으니 눈길 닿는 곳마다 고양이 사진과 그림입니다. “인터넷이건 어디건 고양이 그림이나 사진만 보면 다 모아요.”『고양이 학교』에 실린 신비롭고도 시원한 그림이 글과 썩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말씀 드리니 아주 기분 좋게 웃으십니다. “안 그래도 동물 그림을 한번 그려 보고 싶었는데 마침『고양이 학교』작업을 해 보지 않겠냐는 제의가 들어와서 반갑게 작업에 들어갔어요. 요즈음은 온통 고양이 생각뿐이랍니다.”

『고양이 학교』 표지
어리석은 줄 알면서 한 마디 여쭈어 봅니다. “글을 다 읽으시는 거죠?”“네. 김진경 선생 글이 참 재미있어요. 큰 줄기만 계획을 세우고 써 나가면서 캐릭터가 움직이는 대로 자기도 즐기면서 글을 쓴다고 하는데, 그런 자유분방함이 참 좋아요. 글도 힘이 있고요. 그런 분의 글에 그림을 그려서 기분이 무척 좋아요. 본격적인 환타지물로는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인 작품에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기쁘고요.”

“고양이 학교 그림도 아크릴로 그리시네요?”“네, 수채화는 색을 강하게 쓸 수 없어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난 미묘하게 감성을 건드리는 색을 좋아하는데, 켄싱지에 아크릴로 그림을 그리면 발색도 잘 되고 보존도 잘 되어서 좋아요.『고양이 학교』의 주조색인 에메랄드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색이에요. 너무 빨리 마르는 게 단점이긴 하지만 그만큼 빨리 그리면 되지 않겠어요?”그래서 선생님은 아주 빨리 붓질을 하시지요. 아크릴은 아주 빨리 마르기 때문에 자칫하면 물감 값이 많이 든다고 합니다. “골덴이나 암스텔담 같은 물감을 써요. 덧칠할 때 아래 색이 안 배어나와서 작업하기가 더 쉬워요. 그런데 물감 값이 상당히 비싸거든요. 이제는 물감을 낭비하지 않는 방법을 알아냈어요. 거의 한 방울의 물감도 낭비하지 않지요.”

아크릴 물감과 여러 가지 붓
이젤 부근의 붓통에 담긴 붓이며 탁자를 빙 둘러 박힌 못에 걸린 붓을 둘러보니 마치 붓 전시장 같습니다. 아크릴용 붓뿐 아니라 유화용 붓, 서예용 붓, 동양화용 붓 등을 사서 시험해 보고 쓴다는 선생님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그리고 있는 그림과 가장 잘 어울리는 붓을 쓰신다고 합니다. 책 그림을 그릴 때는 아주 가는 붓을 쓰지요.

“그림책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2000년 2월이에요. 이억배, 정승각, 이재수, 김환영 등 동료 화가들이 그림책 작업을 해 보면 어떻겠냐고 하더군요. 마침 그 전 해 8월 말부터 9월 중순에 걸쳐 열었던 ‘그림 속의 그림, 동강’ 전시회에 온 어린이들이 제 그림 속에 숨은 그림을 어른보다 더 잘 찾아내는 것을 보고 어린이를 위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고 해서 그림책 작업을 한번 해 보리라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는 오누이를 떠올리게 되었고,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지요. 얼개를 잡고 출판사를 찾다가 길벗어린이에서 책을 내기로 했어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김재홍 선생님의 첫 그림책『동강의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동강의 아이들은 김재홍 선생님이 오랜 기간 좋아하던 동강의 풍경과 주인공 동이와 순이가 한데 어울린 고급스러운 숨은 그림 찾기 책이라고 볼 수도 있지요.

『동강의 아이들』과 『숲 속에서』 표지
선생님은 그 뒤로도 아이들이 자연과 친해지기 바라는 마음을 담은 숨은 그림 찾기 그림 동화책『숲 속에서』를 펴냈답니다. 비가 오락가락 하는 흐린 날, 서울서 이사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샘이는 숲 속에 숨은 동물의 모습을 찾으며 점점 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다 넘어져 무릎이 깨지고, 샘이는 와락 두려움에 빠져들지요. 숲 속에 홀로 들어가 본 사람은 숲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거예요. 선생님은 샘이의 무서운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숲도 아주 무섭게 그렸답니다. 나무 등걸이나 바위에 동물을 숨기는 것도 물론 잊지 않으셨지요. 그런데 바로 이 때 동네 개구쟁이들이 나타나 샘이를 무섬증에서 구해 줍니다. 자연과 자연 속의 아이들과 친해진 샘이는 이제 냇가의 돌무더기를 건너가며 환히 웃습니다. 우리 어린이들을 자연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게 하고픈 선생님의 마음이 물씬 묻어나는 그림책이지요.

『숲 속에서』 본문
“어렸을 때부터 그림 속에 뭔가를 숨기길 즐겨했어요. 그래서 그런 그림책을 한 권 더 내고 싶어요. 아이들에게 자연에 관해 생각하게 해 주고 싶어요. 숨은 그림을 찾으면서 아이들이 자연스레 자연을 흡수하는 마음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림책 작가로서는 이제 겨우 발을 뗀 정도니까 앞으로 작업을 한다면 좀 더 그림책다운 그림책을 낼 수 있겠지요.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그림책이란 그림도 중요하지만 기승전결이랄까, 리듬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처음에는 리듬이 안 생겨서 무척 애를 먹었는데, 이제는 좀 알 것 같기도 하고 여전히 모를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진작 그런 생각을 더 깊이 했더라면 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참 아쉬워요.”

작은 물웅덩이와 땅을 그린 「대지」81×121㎝
마감을 잘 지키는 성실한 일러스트레이터로 소문나 있는데 아시냐고 물으니 싱긋 웃으십니다. “글쎄요, 준비를 많이 하고 작업 시간을 늘린다면 그게 뭐 힘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림은 준비를 철저히 했을 때 빨리 수월하게 그릴 수 있지요. 사진 자료, 스케치, 실제로 보는 것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지요. ‘그림 속의 그림, 동강’전시회 때 그린 그림들도 오랫동안 자료를 준비했던 그림이었죠. 한 번은 동강에 갔다가 자동차 안에 갇힌 적도 있어요. 그때 내가 탄 차를 에워싼 지역 주민들과 술을 마시면서 그 지역 주민들의 아픔을 확실히 알게 되었죠. 정책 입안자가 과연 그 지역에 댐이 들어서는 것이 합당한지 아닌지 좀 더 생각을 깊이 했더라면 주민들이 그토록 아파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때 마을 사람들하고 나눴던 대화 때문에 마을 아이들 이야기가 담긴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 건지도 모르죠.”

「거인의 잠」81×121㎝
동강 그림 이전에도 선생님은 땅과 산과 들이 갖고 있는 사람의 형상에 관심이 많았습니다.「대지」연작과「거인의 잠」연작을 보면 자연에서 남다른 것을 발견하는 선생님의 눈이 참 특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우리 엄마 데려다 줘』에 나오는「거인의 잠」동화도 혹시 선생님의 그림을 보고 작가가 글을 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니 껄껄 웃으십니다. “우연의 일치였어요. 편집자는 내가「거인의 잠」이라는 작품을 그린 줄 모르고 내게 그림을 부탁했지요. 글 작가가 편집자와 전화하다가 내가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고 하니까 깜짝 놀라면서 혹시 전에 ‘거인의 잠’ 전시회를 했던 그 화가가 아니냐고 되물었다고 해요. 편집자도 그때서야 바로 내가 그런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지요. 글을 쓴 김옥 선생은 내 전시회에 와서 그림을 보고 동화를 떠올렸다고 하더군요. 묘하게도 내 그림을 보고 떠올린 동화에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되었던 것이지요. 지리산 노고단을 갔는데, 산을 따라 구불구불 길을 파낸 모습이 거대한 사람이 누워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 뒤로 산과 들을 바라보면 여러 거인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우리 엄마 데려다 줘』는 상상력 가득한 화가와 글 작가가 행복하게 만난 책입니다.

서랍 안과 책상 위에 놓인 사진 자료들
에메랄드 빛을 무척 좋아한다는 선생님은 물, 특히 강물이나 계곡 물을 즐겨 그린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제주도에서 찍은 에메랄드 빛 바다 사진을 기어이 찾아 보여 주십니다. 작업실에 들어설 때 눈길을 끌었던 커다란 서랍장을 엽니다. 서랍을 여니 온갖 사진 자료가 든 봉투가 빼곡이 꽂혀 있고 그 봉투마다 숫자가 씌어 있습니다. 마치 도서관의 목록함에 꽂힌 목록 카드처럼 꽂혀 있습니다. 자료가 든 봉투 위에는 커다란 종이에 봉투의 번호와 내용이 씌어 있습니다. 그 종이를 눈으로 주욱 훑더니 어떤 봉투를 꺼냅니다. 선생님이 눈으로 주욱 훑었던 종이에는 손쉽게 사진을 찾을 수 있도록 봉투 번호와 내용을 적어 두었습니다. 사진에는 에메랄드 빛 동강이 가득합니다.

『동강의 아이들』 본문
그래서 그런지 선생님이 그린 그림책에는 온통 에메랄드 빛 강물이 넘칩니다. “어렸을 때 송추에 살았는데, 근처에 미군 부대가 많았어요. 그때 아이들은 셀레민트 껌종이를 모으곤 했는데, 다들 좋아하는 색이 달랐어요. 나는 하얀 종이를 제일 좋아했어요. 그 하얀 껌종이가 얼마나 예뻤던지……. 소중히 접어 보석처럼 주머니에 넣고 다녔어요.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신나게 뛰어놀던 송추 계곡은 해골 바가지에 가위표가 크게 그려진 팻말이 군데군데 서 있어서 늘 마음이 편치 못했어요. 그러다가 지뢰를 밟아 발을 다친 사람을 보면서 전쟁의 위험을 피부로 느꼈지요.” 아마 그래서 선생님은 권력과 사회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책상에 앉아 라이트박스에서 작업을 하시던데 선생님은 왜 이젤에서 작업을 하세요?”“책 그림이라고 다르게 그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요. 책 그림을 그리다가도 언제든 내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내 그림을 그리다가도 책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도 나는 작품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젤 작업을 해요.『아버지의 눈물』삽화를 그릴 때 딱 한 번 책상 작업을 했는데, 그림이 나오고 나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요. 원고가 들어오고 난 뒤 그림 작업을 할 시간이 얼마 없었기에 정신없이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을 다 그려놓고 보니 모든 인물의 머리 부분이 커져 있더라구요. 책상 작업을 한 게 실수였지요. 이젤에서 그림을 보는 느낌이랑 책상에서 그림을 보는 느낌은 다르거든요. 손이 빠르다고 자신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그림을 다시 그려 주마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요. 광주 항쟁을 다룬 이야기라는 이유로 출판사에서 어떻게 하든 5월 이전에 책을 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도저히 다시 그릴 시간이 없었어요. 지금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잠시 말씀을 멈춘 선생님
동강 그림을 그리기 전까지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부조리한 권력과 사회에 대한 저항을 그림에 담아 오신 선생님이기에 그 안타까움은 더 커 보입니다. 선생님이 사회성 짙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선생님이 살아온 나날과 자연스레 이어져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월남하여 북녘에 자식을 두고 와 가슴을 앓다가 돌아가신 아버지. ‘제주 4.3 항쟁’ 직후에 육지로 피난 온 외할아버지의 곤고한 삶을 이어 오신 어머니, 새아버지와 세상으로부터 받았던 부당한 대우가 선생님을 일찍부터 사회의 부조리에 눈뜨게 한 것 같습니다. 그런 인식이 권력과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그림을 그리게 했던 것이구요.

선생님이 그런 마음으로 작업한 그림 가운데 널리 알려진 그림으로 1991년에 공권력이나 제도에 의해 파괴된 인간성을 형상화한「하늘」이라는 작품과 1993년에‘동학’이라는 주제로 열린 다섯 번째 ‘조국의 산하전’에 내었던「가보세 가보세 일포륜」이랍니다. 올곧은 역사를 만들려다 핍박받은 사람들과 그들을 핍박한 권력층이 커다란 대포 바퀴 속에 빼곡이 들어차 있지요. 원형의 구도가 시선을 잡아끄는 특이한 그림들입니다. 사회적 책임을 묻는 그림을 많이 그려온 화가라서 그런지 선생님은 예술가로서 화가보다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화가에 더 비중을 두는 것 같습니다.

쓰고 난 빠레트를 정리하는 순서
“별일 없으면 오전 10시 쯤에 작업실에 나와 오후 10시까지 그림을 그려요. 친구들이나 선배들은 그런 저를 보고 ‘아직도 목숨 걸고 그리냐?’고 우스개를 하지요.” 그렇게 오랫동안 작업실에 계시면 식사는 어떻게 하시냐는 말에 씨익 웃으십니다. “집에서 아침 먹고 나오면 오후 서너 시쯤에 점심을 먹어요. 그림 그리는 흐름을 끊고 싶지 않아서 대개는 시켜먹어요. 그리고는 밤 열 시쯤에 작업실을 나서서 열 시 반쯤 되어 저녁을 먹죠.”

작업실 바깥이 차츰 푸른빛을 내어 놓습니다. 작업실에 도착한 시간이 세 시 어름이었으니 어쩌면 선생님께서 점심을 못 드셨을 거라는 생각이 퍼뜩 떠오릅니다. 혹시 오늘 점심을 거르신 것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껄껄 웃으시며 외려 시장하냐고 물으시더니 밖으로 나가자고 하십니다.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선생님은 쓰시던 붓을 물에 씻고 네모난 플라스틱 통을 가져 오시더니 그 안에 담긴 물 묻은 스폰지를 빠레트 가운데에 놓습니다. 그리고는 스폰지로 둘러싸인 곳에 물을 주루룩 붓고, 물감 위에는 분무기로 물을 뿌립니다. 작업실에 들어올 때 덮여 있었던 것처럼 뚜껑을 덮더니 필름통에 감긴 테이프로 가장자리를 감습니다. “이렇게 해 두어야 물감이 굳질 않아요.”내일 아침이면 저 테이프는 또 필름통에 도르르 감기겠지요. 선생님의 검소한 마음이 읽혀 기분이 좋습니다.

작업실 밖으로 나가 아파트 옆 작은 횟집에서 길가에 내놓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선생님과 마주보고 앉았습니다. 양쪽으로 늘어선 키 큰 은행나무가 바람을 만나 시원스레 흔들립니다. 하루에 열두 시간 가까이 그림을 그리는 선생님의 부지런함은 어려서부터 몸에 밴 것 같습니다.“아홉 살에 집을 나와 떠돌아다니며 살았어요. 홍은 3동에서 살았는데, 그때는 판자집 몇 채와 뻥튀기 집이 있었고, 거의 논이었어요. 그 동네에서 살면서 신문 배달, 구두닦이 등 어린 나이에 할 수 있는 험한 일은 거의 다 해 보았지요. 그야먈로 살아내기에 급급했던 어린 시절이었지요. 하지만 한번도 좌절한 적은 없었어요. 여동생들은 고아원에 들어갔다가 곧 미국으로 입양되어 갔는데, 몇 년 전에 어렵게 서로 만났어요. 다들 잘 자라 좋은 사람과 결혼을 했더라구요.” 선생님은 코끝이 시큰해 오는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이킵니다. 그렇게 힘들게 살면서도 선생님이 나쁜 길로 빠져들지 않고 그림을 그리면서 가정을 잘 꾸리게 된 건 어쩌면 선생님의 여동생들이 간절하게 오빠의 안녕을 빌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고 조심스레 여쭈니 “아마 그럴 겁니다. 아마 그럴 거예요.”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막내는 미국에서 글을 쓰는데, 내가 그림을 그린다는 걸 알고 얼마나 기뻐하는지 몰라요. 우린 머잖아 책을 내기로 약속했어요. 동생이 동화를 쓰고 내가 그림을 그리기로 했어요. 한국과 미국에서 같이 출간할 겁니다.”

『숲 속에서』 본문 그림
어렸을 때부터 그림 잘 그린다고 소문난 선생님이 그림을 그려서 돈을 벌게 된 건 열여섯 살 때였습니다. “학교도 안 다니고 그때까지 떠돌아다니며 살았으니 심심했던지 동네 개척 교회에 나갔어요. 그 교회에 중등부 선생님으로 봉사 나온 신학 대학에 다니던 형이 내게 자기 방에 와서 살라고 했어요. 그 때 그 형이 내 그림 솜씨를 보고 만화 그리는 일을 하라고 해서 형 아래서 만화를 그렸어요. 열여섯 살 때부터 돈벌이로 만화를 그렸지요. 지금은 아주 큰 교회의 목사님이 되어 있는 그 형이 검정 고시 학원을 가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고등 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검정 고시 시험을 준비했어요.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면서 독서실에 나가 공부도 하고 잠도 자고 했는데, 아무리 해도 구구단이 안 외워지는 거예요. 하루 종일 외워도 돌아서면 까먹고, 또 까먹고……. 두 달만에 구구단을 다 외웠어요. 그러고 나서 두 달인지 세 달인지 지나 검정고시를 보았는데 남보다 좋은 성적으로 붙었어요. 구구단을 외고 나니 공부하는 방법이 터득되었나 봐요. 배재 고등학교에 들어갔지요.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미대에 갔어요. 하지만 그렇게 가고 싶었던 미술 대학을 나는 졸업하지 못 했어요. 나와 맞지 않았어요. 내 속에 있는 응어리들이 다른 친구들처럼 살지 못하게 했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그림 그리는 방식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미술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미술 학원 선생을 했다는 선생님은 오랫동안 미술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노량진에서 미술 학원을 운영해서 집도 사고 경제적 기반을 다졌어요. 물론 미술 학원을 하면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했지요. 그러다 93년에 학원을 정리하고 전업 작가의 길을 걷기로 했어요. 여동생들을 만난 해였지요. 여동생들을 만나고 나니 마음이 풀어지면서 세상이 좀 더 부드러워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 뒤부터 거인의 잠 그림도 그리게 되었구요.”

『우리 엄마 데려다 줘』표지
술잔을 기울이던 선생님이 손가락을 들어 한 곳을 가리키십니다. 은행나무 가지에 턱을 괸 달이 참 아름답습니다. 은행나무 너머는 학교 운동장입니다. 선생님은 이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그림책 속 주인공을 찾아냅니다.『동강의 아이들』에 나오는 동이와 순이,『우리 엄마 데려다 줘』에 나오는 다솔이와 미은이도 모두 선생님 작업실에 이웃한 이 학교에서 선생님의 책 그림 속으로 들어왔답니다. 부인과 아들딸 자랑이 점점 늘어가는 선생님의 말씀에는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이 시대의 어른들이 우리 어린이들에게 줄 가장 아름다운 선물인 그림책을 그리는 선생님의 다음 작품을 기대합니다.
공혜조/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여러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 어린이에게 좋은 읽을거리를 권해 주고 싶어서 좋은 어린이 책 이야기를 나누는 『열린어린이』 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좋은 어린이 책이 엄청나게 많아져서 어린이들이 행복에 겨워 웃음 터뜨릴 날을 기다리는 엄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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